2019년쯤에 개봉했던 SF 영화 중 알리타 - 배틀엔젤이라는 영화가 있다


세계관의 배경은 대충 고물상에서 기억을 잃은 안드로이드를 줍게되고, 주인공과 알리타가 각종 사건에 휘말리는 SF 영화다.






이 영화는 개봉 이전 예고편부터 안좋은 부분으로 화제에 올랐는데


그것은 여주인공의 얼굴의 지나치게 큰 눈과 인위적인 눈 깜빡임, 자연스럽지 않은 표정 등 기괴함 때문에 사람에 따라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시킨다는 점 때문이다.




불쾌한 골짜기는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개성있는 외모를 가진다는건 좋은 일이었지만, 개성이 과해 그것이 관객들에게 불쾌함을 유발한다면 큰 문제가 된다.


물론 일반 관객들이 느끼는 문제는, 촬영과 CG 작업 중에도 당연히 문제로 거론됐다.




"감독님 어쩌죠. 불쾌하다는 의견이 많이 나오는데, 조금만 더 다듬어서 인간처럼 만들죠. 지적받은대로 눈 좀 작게 만드는건 어떨까요?"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스


"아니, 눈은 더 키워. 연기자에게 표정도 더 어색하게 연기하게 해. 그리고 안드로이드의 피부는 그냥 외피잖아? 로봇은 땀이 배출될 필요가 없으니까 피부에 모공도 싹 지워버려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감독은, 문제로 지적된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알리타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눈을 더 크게 만들고, 피부의 모공을 지우고, 걷는 자세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알리타의 외견에서 인간다운 요소를 더 뺴버린 것이다.


이러한 주문을 한 감독의 계획대로, CG를 입혀진 알리타는 더더욱 "인간과 닮았지만, 확실히 인간은 아닌", 누가 봐도 확실히 불쾌한 골짜기를 유발하는 형태로 영화에서 그려진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런 결정을 한걸까? 그것은 122분이라는 영화라는 장르가 가진 가진 긴 러닝타임에서, 알리타의 단점으로 지적된 불쾌함을 영화적 장치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의 자리에 앉아, 스크린에 송출되는 영화에서 처음 알리타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짧은 순간, 첫 등장부터 그 인물이 인간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으로 순간적인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적받은 대로, "눈을 더 작게 만들어라" "표정연기를 더 자연스럽게 해라." "불쾌감을 줄여라" 같은 주문들을 들어줬다면, 알리타의 모습은 더 인간다워 졌을까? 그것만으로 우리는 알리타를 인간으로 느꼈을까?



영화를 잠깐 멈추고, 돌려서 다른 주제를 이야기해보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쉽게 인간이 아닌 것에도 인간성을 부여하고 인간의 기준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짤에서 보이듯이 강아지는 유모차를 타고 있고,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으며, 옷을 입고있다.


"개" 라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생각한다면 유모차, 선풍기, 옷 셋 다 개라는 생물에게는 분명히 불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의 주인이 되는 인간은 옷이 필요 없는 동물에게 옷을 입히기도 하고, "강아지용 케이크" 같은, 인간이 먹는 음식을 동물에게 먹이려고도 한다.  이것들이 강아지에게 쥐여진 이유는, 이 강아지의 소유주가 강아지에게 인간성을 부여했고, 대등한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 개에게 그에 걸맞는 인간의 기준을 제공했기 떄문이다.




애완동물을 오랫동안 키우게 되는 사람은 쉽게 애완동물을 "가족" 이라고 지칭하곤 한다.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 나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굉장히 웃기게 들린다. 피를 나눈것도 아닌 털날리는 축생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동물또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에, 지구의 절반 이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동의를 할것이고, "키우던 개가 죽었다" 라는건 갑작스러운 연차의 사용 사유로도 평범하게 인정받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는다.  생물이라는 종의 벽을 넘어, 말하지 못하는 축생도 쉽게 인간의 기준을 부여받는 것은 가능하다. 



다시 영화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첫인상에서 알리타에 불쾌함을 느낀 관객들이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알리타의 이야기를 함께하게 될것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동안, 관객들은 알리타의 행적을 따라간다.





처음에는 표정 짓는 법과 걷는 방법조차 몰랐던 알리타는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미소짓는 법을 배우며, 초콜릿을 먹으며 그 달콤한 맛을 느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진행되며 소녀는 사람과 더 닮아가고 자신의 강철 골격을 드러내는것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안드로이드는 어느새 전투에서 자신의 골격 위를 덮고 있는 인공 피부인 외피가 벗겨지자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숨기는 인간의 감성을 갖게 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알리타는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에서 인간성을 갖게 되며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피가 흐르지 않는 로봇도 인간성을 가질 수 있다. 철학적인 주제와 메세지다. 



재밌는 건 여기서 영화 속의 알리타의 인간성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관객이라는 것이다. 영화가 중반이 넘어가게 되면, 보통의 사람은 처음에 느꼈을 불쾌한 골짜기가 사라지게 된다.


이야기의 끝에 다달아서는 처음에 불쾌한 골짜기를 느꼈던 관객들은 처음에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알리타에게 인간성을 인정하고, 그녀에게도 인간의 기준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알리타의 눈알이 지나치게 크고 표정이 어색하다고 영화를 보기 전에 혹평했던 관객들중 일부는 처음으로 사랑을 하며 수줍음이라는 자신의 감정을 혼란스러워하는 알리타의 모습에서 그녀의 외모를 귀엽고 예쁘다고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기까지 한다. 영화가 끝나게 됐을 때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외모에 대한 불평과 불쾌한 골짜기는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알리타의 인간다움을 부정했던 사람들이, 영화가 끝내게 되면 도리어 알리타에게 인간다움을 부여한다. 영화를 보고 알리타가 더 이상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로봇또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라는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가 관객들에게 전해졌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 메세지를 담는건 쉬운 일이나, 그 메세지를 관객에게 전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물렁한 살덩이가 아닌 단단한 강철의 몸도, 뜨거운 심장이 아닌 냉각이 이루어져야 하는 집적회로도, 누구도 원하지 않아 고철장의 쓸모없어 버려진 고장난 고철조차도 인간이 될 수 있다."


너무나 유명해져버린, 그렇기에 너무나 식상해져버린 SF의 클리셰적인 이야기에서 감독은 고전이 되어버린 원작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지적받았던 불쾌한 골짜기라는 단점을 도리어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20세기에 개쩌는 21세기를 꿈꾸며 썻던 원작자의 메시지를, 그럭저럭 평범한 미래를 살고 있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다시 전해주었다. 멋진 영화적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해석이 틀렸을수도 있다. 개봉 당시에도 비슷한글 썻는데 아무도 내말에 동조 안해주더라. 감독도 거기까진 생각 안했을거라나. 꿈보다 해몽이긴 하다.


쏟아지는 컨텐츠 속에서, 그저 그런 평범한 영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 속에 잊혀지고 있는 5년전에 개봉했던 SF 영화.


알리타 배틀엔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