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배고파.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건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투덜거림에 돌아보자 목소리의 주인이 바닥에 앉아 투덜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곧 마을이다 마을이다 말만하고! 마을은 커녕 굴뚝 연기조차 안보이잖아!”

 

그 말에 내 옆에서 묵묵히 걷던 엘프가 징징거리는 여자를 달랬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실프의 말에 의하면 진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더군.”

 

“또 그 소리! 방금도 얼마 안 남았다고 했으면서!”

 

그 투정섞인 힐난에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려 애를 쓰던 수녀가 쓰게 웃었다.

 

“마리,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잖아. 실프의 거리개념은 우리랑 좀 다르긴 하지만 엘리아가 저렇게 말하는 것 보면 진짜 얼마 안 남은 거 같아. 조금만 더 힘내보자.”

 

“루체 너까지...! 싫어, 안 가 아니 못 가! 가지고 있던 육포도 다 떨어졌다고 이대로는 힘들어서 못 가!”

 

어린아이처럼 드러누워 바둥거리기 시작하는 철부지에게 다가간 나는 조용히 품속에 고이 가지고 있던 육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뭔데.”

 

“내 몫. 진짜 얼마 안 남았다고 하니 이거라도 먹고 움직여. 설마 자칭 대마법사님께서 힘들다고 노숙을 청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의향이 있다면 여기 있어.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지.”

 

누구보다 확고한 내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자칭 대마법사님은 내가 내민 육포를 재빠르게 낚아채더니 누구보다 빠르고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내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 그럴리가 있나. 일용할 양식도 생겼으니까 빨리 움직이자고. 물론 내가 노숙을 싫어해서 가자고 하는 건 아니야. 진짜로!”

 

그렇게 앞서나가는 그녀의 뒤를 보며 나는 피식거리며 따랐고 뒤따르던 엘리아와 루체도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쫒았다. 역시 당근과 채찍은 위대하다니까.

 

-


“도착! 드디어 씻고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

 

입성 검문을 마치고 성 내로 들어온 우리는 곧장 숙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도시가 아니라서 숙소는 빠르게 찾을 수 있었고 곧장 짐을 푼 우리는 여관 1층에 위치한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자, 우리 새내기 모험가들. 뭘 먹겠나?”

 

“새내기라니, 이래보여도 엄연히 금 등급 모험가 파티거든! 이 여관에서 가장 잘 나가는거로 4인분, 아니다 5인분 줘!”

 

“앗차차 이거 실례했구만! 조금만 기다리게. 내 금방 음식을 내오지.”

 

주문을 받은 여관주인이 떠나자 마리는 그대로 식탁에 엎어졌다.

 

“이래서 원정 의뢰는 싫어. 한번 나가는 것도 일인데 돌아오는 것도 힘들단 말이지.”

 

“그리 투덜대지마 마리. 하필 남아있는 의뢰가 그거 뿐이었는걸 어떡해.”

 

“루체 말이 맞다. 한동안 의뢰를 못 받아서 강등 위기에 처했다고 하나 남은 의뢰를 확인도 안 해보고 가져온 건 마리 너이지 않았나.”

 

루체와 엘리아의 말에 마리는 식탁에 턱을 괸 채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치만 진짜 급했단 말이야. 졸업 마법은 완성 못했지. 제출 일은 시시각각 다가오지.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는듯한 그 촉박함을 너네가 알아!”

 

“응, 얌전히 아카데미 출석 꼬박꼬박 했으면 문제 없었죠? 실전 압축 단련 어쩌구 하면서 안 간 사람 잘못이죠? 제적 당할 뻔한 거 간신히 모험가 공적으로 퉁쳐서 살았죠?”

 

“게일 너, 그 입 닥쳐어어어엇!”

 

그렇게 우리가 히히덕거리며 쓰잘대기 없는 잡담으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 여관 주인이 무언가 수북하게 쌓인 쟁반을 양손으로 들고오더니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자, 우리 새벽달빛 여관이 자랑하는 특제 족발보쌈 모둠 5인분 등장이요!”

 

여관주인이 자랑스럽게 내려놓은 음식은 다소 특이한 생김새를 띄고 있었다. 색이 다른 고기가 쌓여있었는데 한쪽은 윤기가 도는 갈색빛의 껍데기를 가진 것에 비해 고기와 지방은 물에 삶은 듯 희어멀건 했다. 다른 쪽은 고기를 그냥 통째로 삶은 후에 그대로 먹기 좋게 썰어 놓은듯한 모양새였는데 고기 자체의 기름으로 인해 촉촉해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갖은 야채가 들어있는 국수와 넓은 잎 채소들이 딸려왔는데 특이하게 국수의 색이 검었다.

 

“일단은 고기의 양이 상당하군.”

 

그제서야 엘리아를 눈치챘는지 적잖게 놀란 여관주인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엘프가 있는 줄은 몰랐군. 보다시피 고기인데 괜찮나?”

 

“엘프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철 지난 낭설일 뿐이다. 내가 놀란 이유는 고기라서 놀란 것이 아니라 고기의 양이 상당해서 놀랐을 뿐이다.”

 

엘리아의 말에 여관주인은 안심이라는 듯이 웃었다.

 

“하핫, 그거 참 다행이구먼! 고기라서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

 

“그건 그렇고 방금 족발보쌈 모둠이라고 했는데 그건 이 음식의 이름인가?”

 

내가 갈색빛 껍데기를 가진 쪽을 들어올리며 묻자 여관주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쪽이 족발, 이쪽의 하얀 쪽이 보쌈이지. 그리고 이쪽의 새까만 국수는 막국수라고 하는 음식이다. 원래는 내 고향에서만 먹던 음식인데 우린 그냥 구분없이 삶은 고기랑 비빔국수라고만 불렀거든. 근데 용사님이 모험가 시절에 우리 마을에 마수 퇴치를 하러왔다가 대접 받은 음식들을 보고는 ‘족발과 보쌈에 막국수라고?’ 말하면서 환장하고 달려들었다더군. 우리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니까 확실하다고?”

 

오호, 용사님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음식이란 말이지? 그렇게 흥미롭게 고기와 국수를 바라보고 있자 이번에는 루체가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용사님이 정신 못 차리고 드신 음식이라니 신기하네요. 혹시 어떻게 만드는 음식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여관주인은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손에 새까만 물을 들고오더니 설명을 이었다.

 

“내 고향은 산림 지역이라 화전을 짓고 살았는데 땅이 척박해서 밀과 쌀을 키울 수 없는 곳이었지. 그래서 메밀이라고 하는 작물과 콩을 키워서 살았다네. 하지만 콩과 메밀은 그냥은 먹을 수 없는 작물이기에 우리 선조들은 이리저리 궁리를 한 끝에 메밀로는 국수를 콩은 삶은 후에 잘 가공해서 암염과 함께 물에 담가 먹었지. 그게 바로 이 검은 물일세. 용사님은 ‘간장’이라고 불렀지.”

 

여관주인의 설명에 마리는 호기심이 들었는지 숟가락으로 크게 뜨더니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우왁, 이거 겁나 짜!”

 

허겁지겁 물을 들이키는 마리의 모습에 여관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크흐흐, 방금 뭘 들은건가. 내 분명 소금을 넣었다고 말했거늘.”

 

“누가 이 정도일줄 알았어?!”

 

마리의 억울한 비명에 여관주인은 한참을 웃더니 마저 설명을 이었다.

 

“아무튼 거기 있는 족발은 이 간장과 향신료를 물에 적정량을 섞은 후, 돼지의 다리를 통째로 넣고 삶은 뒤 익으면 먹기 좋게 썰어내지. 원래는 와일드호그의 발을 넣는데 여기는 마수 고기가 구하기 힘들지 않은가. 그래서 비슷한 돼지의 발을 이용하는 것이지. 그리고 보쌈 고기 또한 와일드호그의 뱃살을 이용하는데 마찬가지로 구하기가 힘들어서 돼지의 뱃살을 향신료를 넣은 물에 푹 삶아 먹기좋게 썰어낸 것이지.”

 

“그럼 이 막국수도 콩으로 만든 것인가?”

 

내가 면발을 한 가닥 들어올리며 묻자 여관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메밀로 만든 면일세. 원래는 새하얀 면인데 전에 실수로 껍질을 안 벗기고 제분을 하는 바람에 메밀가루가 검게 변했지. 버리고 새로 하기에는 아까워서 그대로 면으로 반죽해 내었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길래 지금까지 껍질 째로 제분을 하고있지.”

 

“호오, 이게 메밀로 만든 것이었나. 그런 것 치고는 찰기가 있어 보이는데.”

 

설명을 들은 엘리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막국수를 바라보자 여관주인이 되물었다.

 

“보아하니 엘프 아가씨는 메밀이 익숙한가보군?”

 

“너희 고향에서 메밀을 주로 먹듯이 우리 고향에서도 메밀을 주로 먹는다. 하지만 메밀로만 면을 만들면 이런 식의 찰기가 나지 않지. 뭔가 비법이라도 있는가?”

 

엘리아의 물음에 여관주인은 잠시 고심하는 듯 싶더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우리 여관만의 비법인데 메밀가루과 밀가루를 적정 비율로 섞으면 이렇게 찰기가 있는 메밀면이 만들어지지. 비율은 우리 여관만의 비법이기에 알려줄 수는 없지만 어차피 자네들은 타지인 아닌가? 이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과연, 그런 비법이 있었군.”

 

엘리아는 좋은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막국수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들 궁금한 거 끝난거지? 그래서 이건 어떻게 먹는데?”

 

침을 줄줄 흘리며 음식들을 바라보는 마리의 눈빛에 여관주인은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핫, 이것 참. 오랜만에 관심을 가지는 질문들에 나도 모르게 신이 났구만. 좋아 족발과 보쌈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지!”

 

여관주인은 잘 보라는 듯이 막국수를 잘 비비고나서 넓은 잎 채소를 한장 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잘 비빈 막국수와 보쌈, 족발을 올리더니 그대로 싸서 마리에게 내밀었다.

 

“족발과 보쌈은 이렇게 채소에 싸서 통째로 한입에 집어넣는 것이 제일이지. 한번 먹어보게!”

 

여관주인이 내민 쌈 뭉치를 통째로 집어넣은 마리는 몇번 우물거리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여관주인을 바라봤다.

 

“어때, 맛있지 않은가?”

 

여관주인의 물음에 마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입안에 남은 것을 마저 씹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에 우리도 여관주인이 알려준 방법을 따라 쌈 뭉치를 입안에 집어넣었고 그제서야 마리의 격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잎 채소가 아삭하게 터지면서 안에 들어있던 막국수와 고기들이 터져나오더니 그대로 한데 어우러져 다채로운 식감을 펼쳤다. 게다가 씹을수록 고기에서 흐르는 육즙과 육향이 고스란히 식감에 녹아들어 마치 입안에서 식감의 연극이라도 벌어진듯 했다.

 

“우와, 이거 겁나 맛있잖아! 특히 아무 맛도 안날 것 같은 이 국수가 부족할 것 같은 맛을 한층 끌어올렸어!”

 

마리의 감격에 루체와 엘리야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여관주인은 웃으며 말했다.

 

“이 막국수에도 간장이 들어갔거든. 물론 그대로 넣은 것은 아니고 기름이랑 간장의 비율을 1대2 비율로 섞었지.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이런 걸 앞에 두고 술을 안마시면 섭하지! 여기 드워프 맥주 있지? 네잔만 빠르게!”

 

“드워프 맥주 네잔이요! 근데 거기 수녀님은 술을 마셔도 괜찮은가?”

 

여관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루체는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엘프가 고기를 먹지않는다는 것이 철 지난 낭설인 것처럼 성직자도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것 또한 철 지난 낭설이지요. 주께서도 이런 음식을 눈앞에 두셨다면 필히 마시셨을 겁니다.”

 

“이런, 신실한 성직자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융통성이 있구만! 잠시만 기다리게!”

 

여관주인이 맥주를 가지러 자리를 떴고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앞의 음식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많아 보이던 고기의 산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여관주인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고기가 담긴 접시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크흐흐, 고새를 못 참고 싹싹 비우다니. 이 맥주는 어쩌려고 족발과 보쌈을 다 먹었나?”

 

“음식이 부족하면 또 시키면 그만 아닌가?”

 

마리의 반문에 여관주인은 한대 맞았다는 듯이 마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핫, 그거 정답이군! 그래서 한번 더 시킬 건가?”

 

“당연하지! 그래도 먹은 양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2인분만 부탁할게!”

 

마리의 추가 주문에 여관주인은 재빠르게 주방으로 가더니 처음 내오던 것보다 더 빠르게 음식을 내왔다.

 

“족발보쌈 모듬 2인분 추가요!”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용사가 즐겼다는 전설의 고기들을 즐기며 여행의 피로를 맥주 한잔에 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