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서는 건설 당시의 자료에 토대하여 세 가지 새로운 해석을 하고자 한다. 


첫째,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은 박정희의 업무 추진방식이 잘 나타나 있는 대표적 사례였으며 가장 중요한 사업들 중의 하나였다. 박정희는 새로운 목표를 세워놓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특히 경제개발과 관련해서는 단계별 실행목표를 설정하고, 실무적인 부분까지 직접 기획, 추진하는 목표지향적인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또한 현장을 중시하는 인물로, 주어진 목표를 기한 내에 달성하도록 ‘밀어붙이기(Big Push) 전략’을 구사하는 등 군인적 리더십의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박정희만의 추진방식으로 인해 짧은 공사기간과 적은 비용으로 ‘단군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정해진 목표를 위해 절차를 무시하고 반대여론을 억압과 통제로 잠재우는 등 ‘소통의 부재’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둘째,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가장 큰 목적이 경제적 효과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설 당시 박정희의 발언 내용과 주변 인물들의 회고를 살펴보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있어 가장 중점에 두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의식의 고양이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부분의 강조는 북한과의 체제경쟁에 놓인 당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으로 인식하였다. 


마지막으로, 많은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의지만으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는 현재의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여론은 고속도로 건설 자체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도로의 대부분이 파손되어 복구가 절실히 요구되었고, 제 1 차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인한 수요증가로 수송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는 상황에서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여론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았다. 


다만, 당시 한국의 교통실태를 조사한 IBRD 보고서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기존의 정비된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남북도로보다는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의 건설이 절실하다는 우선순위의 문제와 남북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될 경우 예상되는 지역불균등 발전의 심화, 그리고 고속도로를 건설할 경우 막대한 건설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의 문제를 두고 공방이 진행되었다. 다만 고속도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당시 상황에서 정부는 건설목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의견들이 시간이 지나며 무조건적인 반대로 와전되었던 것이다. 


http://congress.aks.ac.kr/korean/files/2_1393900797.pdf

박정희는 어떻게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였는가 - 최광승(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나라살림연구소 정창수 https://www.narasallim.net/749 블로그글 발췌


그들은 경부고속도로건설을 왜 반대했을까 


우리나라의 산업근대화의 시점을 잡으라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개통을 그시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않을 것이다. 1970년 7월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역사상 가장싸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건설되었다. 429km를 건설하는데 429억원이 들어가서 당시 일본 동명고속도로의 8분의 1수준이었다. 거기다가 1968년 12월1일이 공식착공일이었으니 19개월만에 완공한 셈이다. 이러다보니 부실공사가 되어 1990년 말까지 보수비만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가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자체는 허술했지만 ‘다이나믹 코리아’의 상징이었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는 없다. 제대로 했다면 12년은 걸렸을 거라고 한다. 더군다나 이사업은 격렬한 정치적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히 추진한 박정희 리더쉽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신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박정희독재에 대한 향수는 그런 결단이 우리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기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기억이든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이렇다. 우선 반대가 많지 않았다. 고속도로건설은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대선공약으로 발표되었고 직후 여론조사 결과 68%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찬성, 반대는 5%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고속도로 건설당시에 일반국민들은 애국심으로 용지대금을 낮출 정도였다. 582만 7,000평의 용지대금으로 지급된 총액이 18억 7,667만 3,000만원으로 평당 236원에 매수했다. 당시 담배한갑에 40원(파고다), 쌀한가마에 4,350원하던 때였다.


찬성여론이 다수였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지역균형발전이었다. 세계은행의 자매기구인 국제개발협회가 “경부고속도로같은 남북종단도로보다는 횡단도로가 더 시급하다”라며 차관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


따라서 호남을 중심으로 편향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6대 대통령선거때 박정희후보의 호남선복선화공약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와 같이 착공된 호남선복선화 공사는 36년이걸린 후 2004년에야 완공되었다. 어느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정권교체전까지 영남과 호남의 예산투자액수가 10대1이었다고 한다.


결국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재원배분 논쟁이었던 셈이다. 고속도로가 경제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한 논란이었다. 당시 반대진영의 논객은 건설위원회 소속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이 돋보였다. 당시 그는 호남의 이익만 옹호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보고서를 근거로 서울-부산간에는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서울-강릉간 고속도로를 가장 먼저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강원도에는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예철도조차 없다는 이유였다. 아마 이 주장대로 되었다면 해안은 교통시설이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급속한 성장에 대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 고민한 흔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