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society/8819971

에 대한 반박성 요약글입니다.


글쓴이는 


1 의무교육의 활성화, 양반의 전유물이였던 교육이 평민으로 확대

2 여성들도 공부를 할수 있게 됨.

3 교육의 다양성, 성균관하나로 통일된 조선시대의 교육보다 훨씬더 스펙트럼이 넓어짐


이렇게 3개 안을 들며 조선의 교육보다 일제강점기에 더 도움이 된게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를 딱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대한 제국 시기 시도되던 근대교육은 갑오개혁파가 몰락하면서 사실상 방치되었고 이를 다시 고친건 일본 통감부와 일본 정부입니다.


하지만 글쓴이의 가장 큰 오류는 바로 비교대상이 전근대국가인 조선이라는 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전 국민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한 최초의 사례는 1819년의 프로이센입니다. 그 전의 모든 국가들에서는 의무교육이라는 개념은 없었습니다. 


또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이 전국민에게 평민으로 확대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근대 이전의 교육이란 전 세계적으로 상류층 일부의 전유물이었으며전 국민에게 의무교육을 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근대국가에서나 등장하는 개념임에도 글쓴이는 전근대국가인 조선과 근대국가의 면모를 가지게 된 일제 치하 조선을 비교하며 조선보다 나아졌다면서 저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조선 역시 여러 전근대국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물론 조선은 유교국가 답게 백성의 덕치와 교화를 중시했고 훈민정음의 반포, 아동용 교과서인 동몽선습, 훈몽자회등의 간행과 더불어 말단교육기관인 서당이 전국에 있었지만 의무교육이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전근대국가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다만 조선의 경우 일부 외국인에 증언에 따르면 하층민 역시 글을 읽을 수 있었다는 증언이나 일반적으로 백성들도 제대로 한문 독해는 못해도 천자문 정도는 떼었다는걸 보면 나름대로의 무언가가 있엇던 것은 같지만 제가 앞에서 조선과 일제강점기의 1:1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따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문맹률[5]
한글 문해율
가나 문해율
합계
77.7%
22.2%
6.8%
남성
63.9%
36.0%
11.5%
여성
92.0%
7.9%
1.9%
연령
0-14세
89.6%
10.4%
6.7%
15-24세
65.7%
34.3%
14.0%
25-39세
67.6%
32.3%
6.5%
40-59세
73.4%
26.5%
1.9%
60세 이상
79.8%
20.1%
0.4%


다음은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조사된 조선인 문맹률로 표는 부득이하게 나무위키에 있는 표를 그대로 긁어왔지만 원 출처는 통계청입니다.


이 표를 보면 전반적으로 문맹률(한글과 가나를 둘다 모름)이 77%에 달하고 어릴수록 일본의 교육에 의해 가나 문해율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1925년의 일본의 경우 20대 남성의 문맹률이 0.9%, 장애가 있는 사람을 합쳐도 1.7% 밖에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보통교육 제도가 자리잡고 일본이 표면적으로는 내선공학을 내세우며 교육에서의 차별을 줄인다고 한 시기인 1942년에도 인구 1만 명당 조선인 취학 학생은 697명이었지만 동시기 일본인의 경우 1만 명당 거의 2배인 1,379명에 달하였습니다. 


글쓴이는 '중등교육의 경우 지금의 의무교육적 관념과는 전혀 다른 관념이기 때문에 수가 적은 것이 맞다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일본인의 비중도 낮은게 정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중등교육의 경우 격차가 더욱 처참하여 조선인의 경우 1만 명당 33.7명이었지만 일본인의 경우 520명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고 고등교육의 경우 조선인은 1만 명당 1.8명이었지만 일본인의 경우 46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양적으로 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는 늘었지만 교육의 질이나 학교의 물적 측면의 차별은 더 심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1921년부터 1941년까지 교사의 1인당 조선인 학생수는 폭증하는 반면(1921년 39.8명 > 1941년 73.1명) 일본인 학생의 경우는 거의 변화가 없고(1921년 31.5명 > 1941년 34.9명) 학생 1인당 경비와 자산(각종 기구)의 경우도 조선인 학생은 감소하거나 별로 오르지 않는 데에 반해(학생 1인당 경비 1921년 57.1원 > 1941년 30.8원 / 학생 1인당 자산 1921년 59.8원 > 1941년 69.3원) 일본인 학생은 정 반대의 양상을 보입니다(학생 1인당 경비 1921년 65.5원 > 1941년 82.1원 / 학생 1인당 1921년 자산 106.7원 > 1941년 230.8원). 즉 통계 속에서도 이미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에 대한 차별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상급학교 진학에 있어서도 조선인은 모집비율, 선발 방식, 사상 검열등을 통해 차별을 받았는데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전문학교 교장들 사이에 불문율 같은 내규가 있어 내지 학생들에게 50%의 정원을 제공하고 나머지를 외지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할당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나마 조선인이 갈만한 제국대학중 하나인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선발 과정은 명표 외에 호적 등본과 사진, 입학 검정료, 소견표를 제출해야 했는데, 소견표는 출신 학교장이 직접 총독부 안에 있던 예과 개설 사무소로 하던 것으로 당시 학교장이 전부 일본인이 었던걸 감안해보면 민족 의식이 투철한 학생은 합격할 수 없으며, 당시 『동아일보』는 ‘경성 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라고 비판하면서 6·10 만세 운동 관련 학생이 대부분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며 글쓴이가 말한 당시 학생들의 일반적 교육루트를 봅시다.


당시 일반적인 학생의 경우의 교육루트는 다음과 같다.

1. 소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2. 중학교/고등보통학교을 다니며 경성제대 예과 혹은 전문학교 입시, 유학을 준비한다

3-1 경성제대 예과 혹은 관립전문학교/사립전문학교의 국내학교에 입학한다

3-2 일본 대학에 유학한다

4-1 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고시를 치거나 은행, 관공서, 회사 등에 취업한다.

4-2 전문학교의 경우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한다(전문학사를 예과과정으로 인정해주어 6년 중 3년을 제해준다)

*의치약전의 경우 제외

*당시에는 여학교들도 많았으므로 여자들의 교육도 보장이 돼있던 편.


이렇게 보면 아주 다양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1에서도 소학교(보통학교)에서 학업을 멈추었으며 그 아래에 주루룩 써있는 많은 내용들은 '일반적인'이 아니라 아주아주아주 적은 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은 이미 위쪽의 통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당시 일반적인 학생의 경우의 교육루트는 다음과 같다.


1. 학비가 없으므로 교육을 포기한다. 

2. 돈을 조금 마련하여 보통학교에 들어간다. 그나마도 졸업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건 전부 '일반적인'이 아닌 아주 예외적인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 유학의 경우에도 조선인 학생들은 어느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우선 1930년대 이전의 정규코스인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해도 8년으로 일본에서 중학교 졸업 수준입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일본의 대학교에 가려면 추가로 2-3년의 공부를 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이미 내지 일본인/외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가 극명해지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일단 진학은 할 수 있었기는 합니다. 일본 본토에 있는 조선인을 받아주는 일부 지방의 구제중학교-제국대학 예과/구제고등학교를 들어가서 지원 자격을 얻은 다음 제국대학에 지원하거나 주변의 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려운 학력 시험 등을 통과하여 겨우겨우 제국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학생들의 경우 조선 본토의 전문학교를 다니거나 예과를 따로 운영하거나 구제고에 들어가 사립대학에 입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쓴이가 댓글에서 언급한 윤동주 시인의 경우에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국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당시에 기독교 재단으로 그나마 널널하던 릿쿄대학에 진학하기도 하였던걸 보면 조선인이 본토 제대에 입학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고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던 것이죠.


위의 모든 사항을 요약하자면 일본은 조선에 보통교육을 확대 시키기는 했지만 이는 초등교육 한정으로 그마저도 동시기 일본, 동시기 일본 거주 조선인에 비하면 훨씬 열악한 수준이었으며, 일본 정부는 조직적으로 본토와 식민지 조선인의 학제를 다르게 하여 학력차별을 하였고, 중등교육의 기회확대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고등교육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결과로 귀결됩니다.


만약 35년간 이 정도의 업적만으로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가 조선인 교육에 가한 차별에 정당화를 부여할 수 있다면 해방 이후 이북 지역 230만명에 달하던 문맹자를 단 100명대로 줄인(2008년 북한 인구통계) 북한은 일본 제국보다 훨씬 우월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렇게는 인정하지 않겠지요.


특히 1938년부터 시작되어 1943년에 본격적으로 교육현장에 스며들기 시작한 일본 군국주의의 마수는 본토의 일본인들이 군국주의에 세뇌되어 수많은 목숨을 희생한 것에 조선 식민지인들을 끌어들여 같은 희생을 강요하는 끔찍한 제도의 표상입니다. 


일본 제국이 아무리 경제를 개선하고 제도를 개선한들 이런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인을 자신들의 자원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일본 제국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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