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44권, 중종 17년 3월 4일 신해 1번째기사 1522년 명 가정(嘉靖) 1년
어사 파견·문신 수령 파견·서적 인출 등을 의논하다
하였다. 득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서적을 인출하는 데가 교서관(校書館) 하나뿐이라, 비록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이더라도 서적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중국에는 서사(書肆)가 있기 때문에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쉽사리 구입하여 배워 익히니, 지금 저자 안에 서사를 설치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구입하여 그 편리함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사에 관한 일을 지난 기묘년에 이미 절목(節目)을 마련했는데 지금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해조(該曹)에 묻겠다."




16세기 중종실록엔 행부사과의 어득강이 書肆란 것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書肆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書肆란 서점을 뜻한다.
놀랍게도 16세기까지 조선엔 서점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송나라 때 이미 민간 출판사와 서점이 존재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때 출판사와 서점이 급증한 것과 비교하면 이상한 모습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책을 왕으로부터 하사받기도 하고, 없는 책은 빌려서 베끼고, 지방 고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의 목판으로 책을 찍어 달라 하거나, 중국에 가는 사람에게 북경에서 책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책을 마련했다. 기존에 나온 고전도 새로 찍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논어>나 <중용>의 가격이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따르면 영조 때 인쇄돼 보급된 <대학>과 <중용>은 각각 178면, 294면으로 그리 두껍지 않다. 이 책의 값은 그러나 각각 면포 서너 필에 해당했다. 면포 또는 광목 서너 필은 요즘 화폐로 얼마 정도 할까. 광목이 요즘도 비교 가능한 다른 품목과 어떤 비율로 교환됐는지 알면 환산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현금 역할을 한 쌀과의 교환 비율을 찾으면 된다. 1955년 신문기사를 보면 쌀 한 가마(80㎏) 도매가가 1만3000환이고 광목 한 필이 6200환이다. (경향신문, 추석 후 제 물가 동향, 1955.10.4.) 광목 두 필을 사려면 대략 쌀 한 가마 값을 치러야 했다는 얘기다. 면포 서너 필은 최고 쌀 두 가마의 값에 해당했다. 요즘 쌀 한 가마 시세를 17만원이라고 하고 이 시세를 조선시대에 적용하면 책 한 권 가격이 34만원이었다는 얘기다.


조선은 출판을 독점해 체제를 유지하고 통치이념을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데 썼다. <조선출판주식회사>에 따르면 조선은 나라가 책을 출판해 보급하는 업무를 주관했다. 


조정은 어떤 책을 얼마나 간행할지, 어디서 출판할지 결정해 중앙 관청이나 지방 감영에 그 일을 부과했다. 충성과 효도 같은 유교 윤리를 가르치는 책은 대대적으로 간행해 배포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종 때는 <삼강행실도>를 한번에 2940질이나 펴냈다.


아울러 조선은 간혹 유교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 수 있는 내용의 책이 발견되면 곧바로 책을 거둬들이고 유통을 금지시켰다.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이처럼 출판을 나라에서 틀어쥐고 주도했다. 


조정에서 공급하는 도서와 백성이 읽고자 하는 책에는 목록의 차이와 수량의 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서점은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 “서적 인쇄를 국가가 독점한 것이 민간 인쇄출판업의 발달을 막았고, 서적공급량을 확대하는 데도 장애물이 됐다”고 설명한다. 


서점이 생겨났어도 사농공상의 순서에서 상업을 가장 천하게 여긴 조선에서 도서가 활발히 유통되고 출판시장이 커졌을지는 의문이지만, 하여간 조선은 서점조차 생겨나지 않아 지식 확산과 축적의 숨통이 막힌 나라였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따르면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등 대표적인 실학자의 저서도 출판되지 않았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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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왜 한국이 근대화와 공업발전의 역사가 늦었는지 이유를 알것같다.

지식도 없고 인재도 없고 의지도 없고 자원도 없고 돈도 없고 다 없으니까 못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