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그런 얘기 하려고 비번 중인 날 이렇게 부른 거야?"


쌀쌀맞은 그리폰의 반응에 사령관의 얼굴이 웃는 표정 그대로 흠칫 굳었다. 실로 간만에 느끼는 무안함이었다. 당황한 사령관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사령관은 오르카 호에 새로 합류한 대원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합류한 그리폰 개체에게는 철의 탑 습격 작전을 지휘하느라 바로 환영을 해줄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이렇게 뒤늦게나마 불러서 아쉬운대로 상투적인 감사의 말이라도 건네던 차였다. 그런 자리에서, 신병 그리폰은 초면임에도 당돌하게 사령관의 면전에서 그렇게 쏘아붙이고 만 것이다.


멍청하게 정지한 사령관을 앞에 두고, 그리폰의 가시 돋친 말은 계속됐다.


"흥, 듣던 것만큼 잘생기지도 않았네. 고작 인사 한 번 하겠다고 일개 전투원인 날 이렇게 부른 거 보면,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나봐? 쉬는 사람 괴롭힐 요량이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나는 잘난 인간님에게 아양떠는 모듈 같은 거 탑재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첫 인사가 좀 늦어서 심통이 난 것이 분명한 듯싶었다. 사령관은 그리폰의 언사에 무참하게 난도질 당하면서도 그리운 감회에 젖었다. 이렇게 틱틱대는 그리폰이라니! 감격스러우면서도 애틋한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라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 그리폰이 많이 둥글어져서 잊고 있었지만, 원래는 보통 이랬었지. 그리고 한껏 풀려서 어딘가 집중을 잃은 사령관의 자세는 상황의 호전에 전혀 도움을 못 주고 오히려 그리폰을 부채질했다.


"갑자기 호출한대서 뭔 중요한 일인가 싶었더만, 그냥 인사하려고 불렀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이미 사령관은 먼 눈으로 오르카 호에 합류한 초기를 돌이켜보고 있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성격에 LRL이 많이 고생했었지... 지금이야 안 그러지만 에이미랑도 많이 싸웠고... 그때는 규모가 적어서 매일같이 봤는데, 요즘은 생각보다 못 보고 사네... 간만에 그때 멤버들끼리 조촐하게 식사라도 한 번 해야 하나? 따위의 상념에 빠져서 사령관은 그리폰을 제지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야, 적당히 하지?"


그런 신병 그리폰을 멈춘 것은, 일일 부관을 서느라 마침 함교에 있던 1,122번 그리폰이었다.


"뭐, 뭐야?"


자신과 동종기이지만 상이한 분위기와 겉모습에 당황한 그리폰은, 살짝 위축되어서 갑자기 다가온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령관은 그리폰의 난입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흐리멍덩한 정신을 되돌렸다.


"인간도 문제야. 저런 건방진 행동도 좋다고 실실거리면서 받아주니까, 개나소나 다 버르장머리없이 굴잖아! 이럴 땐 받아주지 말고 강하게 나가봐 좀!"

"넌 뭔데 끼어드는 거야?"

"보면 몰라? 네 선배다!"


서로 똑바로 마주보며 신경전을 벌이는 두 그리폰을 보고 사령관은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오~ 신병 교육하는 거야?"

"뭐, 뭐래! 인간이 똑바로 안 하니까 부관인 나라도 체면을 살려 줘야지! 방해되니까 사령관은 가만히 있어 봐!"


같은 눈높이를 앞에 두고, 그리폰은 작게 헛기침했다. 신입 그리폰은 미간을 좁히며 작게 으르렁거렸다.


"뭐 할 말 있어?"

"그래. 할 말 많은데, 내가 길게 얘기하는 거 싫고, 인간 앞에서 큰 소리 내기도 싫으니까 짧게 할 거야. 그러니까 잘 들어."


그리폰도 지지 않고 신입의 눈을 째릿 노려보았다.


"인간이 저렇게 보여도, 궤멸 직전인 저항군을 여기까지 끌고 온 몸이야. 그래봤자 출격 한두 번 나갔을 너같은 신삥한테 그따구로 무시당할 위치가 아니라고. 그리고, 설령 인간이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자라고 쳐도 엄연히 너의 명령권자인데... 그 싹바가지 없는 말투는 뭐야? 눈땡이에 들어간 힘도 빼고!"

"그래, 명령이야 하면 듣겠지. 하지만 명령을 따르더라도 내가 어떤 평가를 내리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거든? 그리고 출격? 네가 출격 운운할 수 있어? 햇볕에 그을린 티도 안 나고, 바람도 안 맞아본 것 같은 그 피부에? 심지어 분칠도 했네! 그리고, 그 손톱에 그건 뭐야? 저래서 조종간은 잡을 수 있어? 팔랑팔랑한 옷도 그렇고... 너, 진짜 전투용 맞아?"

"뭐, 뭐라고? 애, 애초에 이건 프로... 아니, 인간이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해서 오늘만 특별히...!"

"흥, 너한테는 그렇게 알랑거리는 모듈이 있는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목 뒤를 더듬어봐도 안 느껴지네. 계속 해봤자 시간낭비일 것 같으니까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마저 쉴래."


싱글거리며 즐겁게 지켜보는 사령관을 뒤로 하고, 그리폰은 몸을 홱 돌려 나갔다.


"너, 너 그 말 여기 와서 다시 해 봐!"


잠시 얼이 빠졌던 그리폰이 주먹을 휘두르며 쫓아가려고 했다. 사령관은 눈짓으로 그런 그리폰을 멈춰 세웠고, 그렇게 함교의 문이 열리며 신병 그리폰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망연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리폰은 씩씩거리며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이, 인간! 저 개싸가지 저대로 둘 거야?!"

"뭐 어때. 예전 너 생각나서 귀엽기만 한데."

"뭐...! 내가 언제 저랬다고!"


사령관은 방정맞은 입이 내뱉으려는 '완전 똑같은데?'를 목구멍 속으로 간신히 삼켰다. 말했다가는 분명 밤까지 말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계산 하였다.


"저 애도 내가 바로 만나러 가주지 못해서 섭섭했던 거겠지. 그래서 괜히 볼멘소리 몇 마디 하려다가, 그리폰이 끼어드니까 당황한 거야. 가만히 뒀으면 적당히 하고 돌아갔을걸? 분명 지금도 숙소 가는 길에 여기서 했던 말들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리폰과 오랫동안 봐온 사이여서 헤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리폰은 그런 내막을 알게 되면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리폰이 조금 지나치게 말한 것에는 일종의 동족혐오도 조금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벌집을 들쑤신 꼴이 되었지만.


그런 사령관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폰은 사령관을 한껏 흘겨보았다.


"그럼 지금 다 나 때문이라는 거야?"

"아하하... 그런 뜻은 아니고... 날 위해 나서준 건데, 당연히 고맙지."

"흥..."


그리폰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사령관의 무릎에 털썩 걸터앉았다. 사령관이 보드라운 머릿결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어주자, 조금은 누그러지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그리폰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고 판단한 사령관은 넌지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밤에... 쟤도 부를까?"

"뭐...?! 뭘 잘했다고? 절대 싫어!"

"왜? 버릇 고치는 데에는 이게 직빵 아니야? 그리고... 네가 선배로서 어떻게 예절을 지켜야 하는지 다시 지도할 기회도 생기고... 이번엔 제대로."

"인간...! 정말 악취미야! 두둔해 줘서 손해봤어!"


휙 몸을 뗀 그리폰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나갔다. 공교롭게도 아까 전 나간 그 신병의 걸음걸이와 똑같았다.


"그리폰~ 그래서 허락 안 해주는 거야? 혼자 감당할 자신 있겠어?"

"몰라! 이 변태야! 그냥 마음대로 하지 그래?! 언젠 내가 말해서 들었나?"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닫혀가는 함교의 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