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르카호에 도착하기 전에 철충과 마주쳤다간 큰일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무기로 쓸만한 걸 찾기 위해 멸망 전 블랙리버 직원들이 쓰던 벙커에 찾아왔었다. 여기서 아직 작동이 되는 기간테스를 찾을 수 있었지만 정작 그 기간테스는 처참하게 박살나 겨우 전원만 켜지는 상태였다.


기간테스를 기용하기 위해선 수리할 필요가 있으나 우리 중 기간테스를 수리할 서 있을 정도로 기계공학에 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디 하늘에서 포츈이나 그렘린 같은 엔지니어가 뚝 떨어지지 않을까 하면서 무작정 바깥을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 기간테스를 메인 홀에 냅두고 벙커 실내부터 탐색하기로 했다.


벽엔 핏자국이 시꺼멓게 말라붙어있고 바닥엔 뼈다귀가 굴러다니는 복도를 지나자 괜히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완전히 묘지구만..."


"그러게요... 역시 생존자는 저 기간테스 한 대 뿐인 것 같아요."


그나마 건물에 불이 들어와서 다행이지, 어둠 속에서 해매다가 해골이랑 마주했다간 제대로 기겁했을 것이다.


"그런데 보리는 의외로 뼈에 별 관심을 안 가지네? 수십 년 동안 썩은 뼈라서 안에 영양분이나 그런 게 다 빠져나갔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보리도 바이오로이드니까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못하도록 제한이 걸려있을 거에요."


"그게 시체한테도 적용돼?"


"죽은 인간이 대상이더라도 고의적인 식인이나 시체 훼손 같은 건 못해요."


"멍!"


앞서서 걷던 보리가 그게 정답이라는 듯 뒤돌아보며 가볍게 한번 짖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하베트롯이 꼭 한 마디 씩 대꾸해줘서 심심하진 않았다. 그렇게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걷기를 잠시, 연구실이라고 적힌 펫말을 발견한 우리는 그 펫말의 바로 옆에 있는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도 다른 곳이랑 다를 바 없이 난장판이었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턱에 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뼈만 남은 시체와 부숴진 기계 등으로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이 보였다. 대충 봤을 땐 건질만 한 게 없어보였으나 보리가 대뜸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잔해 속에서 뭔가 동그란 걸 찾아 입에 물고 돌아왔다. 안전모 같은 걸 쓰고있는 주먹보다 조금 큰 크기의 구체 기계였다.


"이건...?"


"아! 저, 본 적 있어요! 그러니까, 수리용 드론이에요!"


생각났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 했던 라오에서 본 기억이 난다. AGS 수복실이라던가, 기지의 그... 무슨 공방이라던가,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아무튼, 여기 보리가 가져온 로봇은 칠이 벗겨지거나 흠집 투성이인 점을 빼면 거기 나왔던 로봇과 똑같이 생겼었다.


보리한테 수리용 드론을 건네받자 보기보다 묵직한 게 작은 아령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뒤쪽에 전원 버튼으로 보이는 엄지만한 버튼을 찾아 눌러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베트롯이 겉보기엔 멀쩡해보이니 배터리가 바닥난 것일 거라고 했다.


한 손에 그 드론을 든 채 다시 연구실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자 바닥에 널부러진 수리용 드론을 몇 개 더 보였다.


"이게 있으면 저 기간테스를 고칠 수 있겠지?"


"아마... 그럴걸요?"


하베트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이게 작동될 지 확신은 없지만 엔지니어가 없는 이상 이게 기간테스를 수리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보리랑 같이 이 드론을 더 찾아볼게. 안에 몇 개 더 있는 것 같아. 하베트롯 넌 여기 집어넣을 배터리를 찾아줘. 서랍 있는대로 열어보면 뭐든 나오겠지."


"아, 예! 알겠습니다!"


"멍!"


그렇게 쓰레기장같은 연구실을 10분인가 20분인가 샅샅이 뒤진 끝에 수리용 드론 한 다스는 찾을 수 있었다. 허나 그 중 반 이상이 구멍이 나있거나 기계 내부가 드러날 정도로 찢겨져있는 등 척 보기에도 작동될 것 같지가 않은 상태였었고, 비교적 외관이 멀쩡한 것들도 하베트롯이 배터리를 갈아끼우자 불이 들어온 건 3개 뿐이었다.


거기다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이제 전원만 켰을 뿐, 뭘 어떻게 해야 이것들이 수리를 시작하는 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공중에 둥둥 떠서 아무것도 안하는 드론들을 손으로 잡아 기간테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뒤 사용법을 물어보자 기간테스가 AGS 수리 프로토콜 송신 하고 중얼거리더니 곧이어 드론들이 우리 손에서 날아올라 일하기 시작했다. 부품은 주변에 쌓인 로봇 잔해들을 분해해서 확보하고, 전력은 이 건물의 비상용 발전기에서 뽑아오는건지 수리용 드론들이 어디선가 전력 케이블을 가져와 기간테스에 연결하자 천장의 불이 약해졌다.


여담이지만 기간테스 말로는 이 수리용 드론들은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AI가 탑재된 AGS가 아니였기 때문에 일을 시키기 위해선 따로 명령어를 입력해야 한다고 한다. 어쩐지 무슨 말을 하든 계속 무시하더라.


아무튼 이제 기간테스가 수리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고치려면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충전도 해야하고 말이지. 다리가 피곤해진 나는 근처에 있는 적당한 높이의 잔해를 의자 삼아 앉았다. 그러자 하베트롯도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옆에 엉덩이를 털썩 내려놓았다.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네요. 기간테스가 우리 편이 된다면 철충이 습격해도 대응할 수 있을거에요!"


"...어... 그거 말인데..."


"왜, 왜 그러세요...?"


"지금 생각난 간데. 기간테스? 너 생체회로 탑재돼있니?"


"부정. 생체회로에 관한 데이터를 찾을 수 없음."


"그럼 철충 기생은 못막는다는 뜻이네..."


"긍정. 기간테스 기종, 전쟁 동안 철충의 집중 표적이 됐었음. 기간테스, 그 때문에 전선에서 물러나 본 벙커 수비 목적으로 배치됨."


"앗..."


옆에 앉은 하베트롯이 그걸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오르카호 공순이들이 개발한 생체회로가 없는 이상 여기있는 기간테스는 철충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얘를 고친 뒤 밖에 데리고 나갔다가 철충한테 기생당하기라도 하면 저 거대한 주먹으로 날 쥐포로 만들어버릴 게 뻔하다. 하물며 기간테스는 철충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화력을 퍼부을 능력이 되는 것도, 철충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고속이동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넷이 합쳐서 전투력 0 이라니, 뭐 이런 파티가 다있냐..."


내가 신세한탄하며 한숨을 쉬고 난 뒤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차분히 수리받고 있던 기간테스의 발광부가 몇 번 점멸하더니 잠시후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간테스, 생체회로에 대한 설명을 요청함."


"응? 생체회로? 그건 그 뭐냐, AGS가 철충에 감염되지 않게 해주는 특수한 회로인데... 그런 게 있어,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어디서 들은 거 뿐이라서."


"기간테스, 생체회로는 없으나 감염으로부터 안전함."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생체회로 이의에도 기생을 막을 방법이 있다고? 내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되묻자 기간테스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대답해주었다.


"블랙 리버 중공업은 규소-금속 중합 자생적 유기체의 AGS 코어 감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었음. 본 벙커에 상주하던 연구진들이 제시한 방법은 AGS가 AI회로를 사용하지 않고 수동으로 작동되도록 개조하는 거였음."


"저기, 잠시만요. 규소 금속... 뭐라고요?"


"철충 말하는 거야. 기간테스, 그 규소 뭐시기 좀 철충이라고 불러줄 순 없겠어? 너무 길잖아."


"긍정. 규소-금속 중합 자생적 유기체의 호칭을 철충으로 수정함."


"고마워. 이제 좀 낫겠네."


"설명을 계속하겠음. 개조 결과, 성공적이었음. 본 기체는 인간이 탑승 가능하도록 개조됨. 수동 모드에선 인간이 안에 타 직접 조종해야만 움직일 수 있음."


"뭐? 안에 타서 조종하는 게 가능하다고? 인간이, 네 몸 안에 들어가서?"


"긍정. 철충은 AI회로가 탑재된 기계만을 감염시킬 수 있음. 그러나 본 기체를 포함해 개조받은 동형기들은 수동 모드일 경우 AI가 장악되도 몸의 통제권을 잃지 않음. 때문에 철충의 감염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


"아까 수동 모드라고 하던게 그거 때문이었구나. 어쩐지 처음 듣는 기능이더라..."


"잠깐만요, 그 개조가 성공적이었다면... 여긴 어째서 철충한테 함락됐던 거죠?"


"철충이 문을 부수고 벙커 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인간들은 패닉에 빠졌음. 누구도 기간테스에 타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음. 인간, 기간테스가 감염되지 않는 특성 탓에 바리케이드로만 사용함. 결과: 기간테스를 포함한 수비용 병력이 전부 뚫리고 인간들은 몰살당함. 철충, 그 후 기간테스를 두고 떠남. 기간테스, 파손된 몸을 고칠 수 없었기에 절전모드에 들어감. 그리고 현재, 다시 깨어남."


"...그러니까 기껏 대항수단을 만들어놓고선 안쓰다가 다 뒤졌다고?"


"...정확함."


기간테스가 한 박자 띄고 대답한 게 무뚝뚝한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 목소리에 구인류를 향한 한심함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거 참... 바보같은 이야기네요..."


"그러게 말이다. 구인류가 병신짓한 게 한두번이 아니긴 하다만... 하지만 요점은, 우리 중 누군가가 저 안에 타서 조종하면 기간테스의 힘을 휘두를 수 있다는 거지."


"라붕님이 타세요."


"긍정."


"멍!"


내가 말을 마치자 다른 셋이서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입을 모아 나를 지목했다.


"뭐? 잠깐, 나보단 하베트롯이 타서 조종하는 게 더 낫지않아? 니가 나보다 더 잘 싸울텐데? 기계 조작도 더 잘할거라고 생각하고."


"기간테스 사용 난이도: 쉬움. 본 기체에 내장된 조종간은 강화 외골격을 베이스로 만들어졌음. 탑승자가 팔다리를 움직이면 거기에 맞춰 본 기체가 움직여짐."


"뭣보다도 기간테스 안에 타고있는 것 만으로도 든든한 방패로 감싸진 거나 다름없다고요! 라붕님 안전을 위해서라도 라붕님이 타야만 해요!"


"어어... 음... 알았어. 내가 타지 뭐..." 


하베트롯이 부담감이 느껴질 정도로 완강하게 나와서 얼떨결에 내가 로봇 조종사가 되어버렸다. 강화 외골격처럼 조종할 수 있다지만 난 강화 외골격도 써본 적 없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그보다 향후 계획이나 생각해보자.


이로서 철충과 조우할 경우 대항할 수단이 생겼다. 기간테스가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우린 다시 오르카호 합류지점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휩노스병도 문제지만 오르카호가 우리 존재를 모르는 이상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이 근방에서 털 거 다 털면 도로 바다로 떠나겠지.


하지만 시간에 쫓기고 있다 한들 수리가 끝나는대로 출발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게, 쾌속 수복 같은 것도 불가능하니 기간테스 수리가 끝나려면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릴 것이다. 따라서 수리가 끝날 때 쯤이면 밤일테고, 아무런 빛도 없는 밤에 돌아다니다가 기습 당하기라도 했다간 꼼짝없이 당할 거다. 오히려 기간테스에서 나오는 불빛 때문에 적들에게 우리 위치를 광고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따라서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하베트롯."


"네? 아, 네. 말씀하세요."


"그리고 보리야."


바닥에 엎드려있던 보리는 이름을 불리자 고개를 들고 귀를 쫑긋거렸다.


"오늘밤은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하자. 기간테스랑 함께."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잘 만한 곳을 찾아볼까요?"


"아직 밤이 되려면 멀었으니까 벙커 안을 좀 더 둘러보자. 아직 확인 못한 데도 많이 남아있으니까."


생각보다 큰 벙커라 아직 내부를 전부 다 확인하진 못했다. 당장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메인 홀만 해도 기간테스나 포트리스같은 대형 로봇들이 돌아다닐 정도로 넓었으니까. 방도 여러개 있는 모양이니 각잡고 내부를 전부 탐색하려면 시간이 제법 소요될 듯 했다. 우린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못가본 곳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수리용 드론은 얘들 말하는거. 실제 설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선 AGS가 아니라 그냥 로봇이라는 설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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