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뉴들박 절대 사절 최종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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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문 : 조선풍 소울라이크 게임의 최종보스가 되었으나, 함께 빙의한 고인물에게 참패하기를 일백 번.


마침내 돌아온 현대는 기억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었다.



고인물 PTSD 저승사자와 사흉 4자매의 현대 적응기.


태그 : #현대판타지,#TS,#귀환,#헌터,#성장,#먼치킨,#일상



< 1화 - 사생결단. >



 세상에 이룰 수 없는 꿈은 없다.

 나도 한때는 그리 생각했었다.


 모든 꿈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 장애물은 시간과 수명뿐, 그 외는 모두 꿈을 향해 달리는 이의 몫이라고.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세상엔 이룰 수 없는 꿈도 있었다.

 다만,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을 뿐.


 "···죽었나? 저, 정말로 죽은 게냐?"


 만월의 밤. 결전의 여파로 천지영기가 요동치는 사토의 황야.

 남아있는 것이라곤 거대한 짐승 네 마리의 사체와 보라색 살점들 뿐인 대지에서, 한 여인이 감격의 외침을 내뱉었다.
 
 여인의 신장은 8척에 이르렀다. 검은 도포를 두르고 갓을 쓴 모양새가 심히 범상치 않아, 마치 저승사자를 보는 듯 했다.

 황야의 참상을 목도한 여인이 스르륵 쓰러졌다.

 여인은 쉽게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대며, 연신 흙바닥을 뒹굴었다.

 그 여인이, 바로 나였다.


 "정말로, 참으로 죽었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의 숙적이자 우상, 경쟁자이며, 또한 스승인 존재.

 자색 괴인의 숨이 멎었다. 

 절단된 사지, 멀리 떨어져 나간 머리통, 사라져 버린 양기. 어느 하나 녀석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으리라.


 "내, 드디어. 마침내 그대를 이겼다니, 감회가 새로울 지경일세."


 꿈을 이뤘다. 기필코 그를 이기고 말겠다는 오랜 꿈을.

 이룰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끝내 이루었다.

 그러니 이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


 "···물론. 기뻐할 수만 있다면, 실컷 자축하고도 남을 사항이겠지. 내, 괜히 일백 번의 회귀(回歸)를 했겠나."


 회차 당 일백 년.

 일백 번의 회귀.

 도합 일만 년의 시간을, 오직 꿈을 위해 쏟아 부었다. 매몰 비용을 감안하면 기뻐하는 편이 더 옳았다.


 "단지··· 내게 쌓인 것이 너무 많을 뿐이지."


 일만 년간의 기억, 감정, 후회, 연심, 추억. 어느 하나 논하기도 버거운 지경이었다.

 그러니 그저 기뻐할 수야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엔 일만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너무나 방대한 서사가 쌓여버렸으니.


 "···너무 오래 걸렸네. 비록 내 오기심이 부른 화라고들 하나, 이건 조금 지나치지 않은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오기심에 불과했다.

 어린 날의 치기어린 오기심.

 빙의 이전의 난, 한 꿈에 빠져있었다. 지금과 같은 꿈이었다.

 가장 빨리 게임의 특정 목표를 달성하는 기록 경쟁, 스피드런. 그것의 만년 1위였던 그를 이기고자 했다.

 물론,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분야의 절대자를 꺾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을까.

 그저 부족한 만큼 더욱 노력할 뿐이지.


 "타고난 천재를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노력이라면, 노력하는 천재를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겠나?"


 답은 간단했다.


 "필사적인 노력. 평범한 둔재의 노력이 아닌, 기필코 천재를 끌어내리고야 말겠다는 사생결단(死生決斷)! 그 죽음을 각오한 노력이 필요하다네."


 처음엔 그의 길을 따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더 나은 방식으로 나만의 길을 깎고, 밤낮으로 게임을 분석했다.

 오직 그를 이기고 말겠다는 목표. 그 하나만을 위해, 삼대 욕구를 잊을 정도로 몰두했다.

 식욕도, 색욕도, 잠욕도 잊고, 그렇게 도전하기를 1년.

 그러니 죽지 않고 배길 수야 있을까.

 결국 나는 그를 이기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제 몸이 불타는 것도 모르는 나방이 불빛을 향해 날개짓한 꼴이었다.


 "···뭐, 나도 정말로 죽을 줄은 몰랐다네. 그래도 목표가 코앞이었거늘. 지금 생각해봐도 아깝구만."


 분명 최종보스를 잡았을 당시의 타이머는 기록 갱신을 알리는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게 무척이나 감격스러워선지, 혹은 초월적인 정신력으로 겨우 목숨만을 붙들고 있던 상황에서 긴장이 놓여버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게임 속이었으니.

 아마 현실의 나는 그때 죽었다고 보는게 옳겠지.

 항상 마음에 걸리던 오점이었다.

 그때 조금만 더 살아 있었다면, 그를 이기고 죽을 수 있었을텐데. 결국 패배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니.

 끝내 미련으로 남아버렸으니, 오죽할까.


 "그래도 이렇게 게임 속에서라도 자네를 이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두번째 기회를 받은 게지."


 평범한 한 번의 기회도 아니었다.

 사망회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특권. 영원히 반복할 수 있는 두번째 기회. 그것을 얻었으니, 나름 잘된 일이지 않나.


 "단지··· 그 게임이 빙의하기에 좋은 게임이냐 묻는다면, 썩 그렇지 아니한 것이 문제였을 뿐."


 그와 내가 빙의한 게임 '원귀사변(寃鬼事變)'은 빈말로도 실제로 살아가기에 좋은 세계가 아니다.

 게임의 장르도 문제였고, 세계관도 여간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장르부터가 소울라이크였으니, 말 다했지.

 '소울라이크'.

 유명 게임 시리즈 '소울시리즈'의 흥행 이후 정립된, 주로 다크 판타지 계열의 고난이도 3인칭 액션 RPG게임을 의미하는 장르.

 어두운 세계관, 양심은 내다버린 난이도, 둔탁한 액션미, 멋들여진 설정, 불친절한 스토리텔링 등등.

 매력은 가득하지만, 뭣 하나 호불호 안갈리는 요소가 없었으니 유저층도 명확했다.


 "웬만큼 짬이 찼다 싶으면 하나같이 그대처럼 형광색으로 온몸을 도색한 망자로 변모하더군··· 뭐, 그 또한 고인물의 특색이 아니겠나."


 강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던 물이 어느 한자리에 고여 썩어가듯이, 한 게임에 매몰되버린 자들.

 그런 이들을 세간에선 고인물이라고 불렀다.

 특징도 다양했다. 누구는 초심자들을 괴롭히고 다닌다 하면, 되려 그들이 게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다니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물론 전자나 후자나 둘 다 외형이 괴상망측하게 생긴 것은 매한가지라, 오히려 게임에 유입되는 초심자들. 뉴비들의 시선에선 그 둘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당연한 인과였다.

 광인의 생각을 어찌 한낱 범인이 엿볼 수 있을까.

 모든 고인물들은 광인과 다를 바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게임에 빠진 건지, 게임에 빠져서 그렇게 되버린 건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그들이 게임에 반쯤 미쳐있다는 것은 명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게임을 수백, 수천 시간씩 맨정신으로 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는가.


 "애국심은··· 아니었겠지. 그래, 그랬다면 되려 게임을 욕했을테니."


 아무리 국내 유명 게임사에서 만든 AAA급 게임이라고들 하나, 게임의 설정이 과관인지라 쉽사리 구설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임 '원귀사변(寃鬼事變)'의 스토리를 요약해보자면, 이러하다.
 

 가장 억울하게 죽은 세자. 뒤주에서 죽어버린 사도세자가 저승에서 온갖 원혼들을 이끌고 귀왕(鬼王)으로 돌아와 영조를 폐위시켜 왕위를 찬탈한 지도 어연 일백 년.

 그간 조선 팔도는 사특한 요괴들과 이맹망량들이 들끓고, 흉흉한 괴력난신의 낭설과 잡신들의 소문이 떠도는 지옥으로 변모해버렸으니.

 이를 저승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가장 선하고 한치의 죄도 지니지 아니한 자, 귀인(貴人)이 무당으로 정체를 감춘 바리데기의 비호를 받아 이승을 구원한다.


 ···솔직히 게임인걸 감안해도 적잖이 무리수가 있긴 했다.

 다행히도 파격적인 세계관 만큼, 당시 굉장한 유명세를 얻었기에 망정이지.

 솔직히 한국사에서나 보던 유명인들이 다크 판타지 세기말 조선 게임에 나오는 걸 어떻게 참는가?

 이순신 장군님의 부탁을 받아 남해 바다를 떠돌며 해악질을 부리는 원균의 유령함대를 격파하는 걸 생각해봐라.

 혹은 고려의 소드마스터로 불리는 척준경과 검을 겨루는 것도 좋다.

 그 외에도 조선의 폐단을 보다 못해 돌아온 이성계, 미쳐버린 연산군, 파계승 묘청, 광해군 등등 여러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구미호, 도깨비, 장산범 같은 친숙한 요괴들과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괴물들이 적으로 출현하기도 했다.


 ···단지, 초반부터 산에서 잡몹으로 튀어나오는 호랑이가 게임의 뉴비 절단기가 되어버려, 대다수는 저걸 보지도 못하고 게임을 접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고증을 잘 살렸던 게임사가 필드의 대부분을 산지로 도배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 게임에 빙의했으니··· 보통이라면 재수가 없었다고 봐야 되겠지."


 솔직히 저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조선에서 일개 백성으로 살아갈 바엔, 죽는 게 훨 낫지 않나.


 "다행히도 나와 그대 모두 이야기의 주역을 맡았으니, 나름 괜찮은 빙의었다고 볼 수 있겠구만."


 그는 주인공을, 나는 최종보스를 맡았으니, 결국 우린 필연적으로 맞붙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게 악수(惡手)였다.

 평생토록 고통받게 될, 최악의 실수.


 "헌데··· 분명 내가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것만, 음. 역시 다시 생각해봐도 그대는 귀인보다 괴인이 어울린다네."


 커뮤니티 닉네임 '하회탈'. 항상 하회탈을 착용한 채로 모든 기록을 달성하는, '원귀사변' 게임 커뮤니티계의 괴인.

 귀인은 커녕 광인이라는 칭호도 부족한 이. 그것이 괴인의 정체였다.


 "그도 그럴것이··· 대체 세상 어느 사람이 최종보스를 맨몸으로 잡는단 말인가!"


 최종보스, 이야기의 최종 흑막인 만큼 절대 약할 리가 없는 존재. 게다가 1페이즈가 아닌, 2페이즈 혹은 때때로 3, 4페이즈까지도 존재하는 장기전의 끝판왕.

 그런 최종보스인 저승의 반역자. 타락한 저승사자, 사월로 빙의했음에도 나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가 스피드런의 모든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 원인이었다.

 'Low%'.

 즉, '최소한의 조건으로 보스를 잡는 것' 또한 부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설마 했는데··· 어찌 그런 괴상망측한 객기를 현실에서도 부릴 수 있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야 있는 게냐?"


 첫 회차 당시, 그는 하회탈과 팬티 한 장만을 걸치고 승리하는 객기를 보여주었다.

 어떤 사람이 날아오는 검격을 한낱 춤 동작으로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기예에 가까운 권격을 실낱같은 검날 사이로 박아넣을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다.

 게임이 현실이 된 것은 그와 나 모두 동일할 터인데.

 내가 제 몸도 잘 겨누지 못하던 것에 반해, 그는 마치 게임 속 캐릭터를 조종하듯이 움직였으니···.

 그걸 이길 수야 있겠나.

 이래서야 서로의 입장이 바뀐 것밖에 더 되지 않았다.


 "동작이 큰 기술은 모두 굴러서 피해버리고, 짧고 치명적인 기술은 쳐내버리고, 즉사에 이르는 기술은 애초에 범위에 들어오지를 않으니. 내, 도통 이길 수가 없겠더군."


 분했다.

 맨주먹과 검이라는 명백한 상성의 우위에서 진 것.

 현실에 이어 게임 속에서조차 진 것.

 그가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 모두 분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분했던 것은 단 하나.


 "내 노력이··· 고작 그것 밖에 안됐나 싶은 기분이 들더군. 하핫, 참 웃기지 않나. 추하게 져 놓고서 자책하는 꼴이라니."


 처음 사월의 몸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는 극심한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것의 원인이 노력이 부정 당했다는 것에 대한 원망인지, 치욕스러운 자신에 대한 모멸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만 죽고 싶었다.

 빙의 이전, 처음 꿈을 새겼을 때처럼.


 "···세상 어느 이가 사생결단의 신념으로 꿈을 이루고자 하겠나. 애초에 죽고자 하였으니, 이거라도 이루고 죽자 싶은거지."


 어차피 곧 죽을 몸. 

 갈 땐 가더라도, 무언가 하나라도 이루고 가고 싶어서 만들어낸 꿈이었다.

 설사 이루었어도,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나··· 한 번 죽어보니 오기가 들더군. 또, 희망도 생겼고 말이야."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무한한 시간을 담보로, 그에게 도전 할 수 있는 기회를.


 "그래서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네. 그대가 매 회귀 이후 일년 만에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나는 매번 일백 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렸지."


 일백 년.

 한 세기라는 단위는 충분히 긴 시간임이 틀림 없다. 

 원작의 사월의 행보를 끝내 놓고도 늘상 몇 십년이 남아 돌았으니.


 "그녀의 꿈은 항상 가장 먼저 이루어 두었다네. ···내 꿈을 위해 그녀의 육신을 앗아갔으니, 그녀의 꿈이라도 이뤄줘야 하지 않겠나."


 사망 직후 발생한 모종의 빙의 현상.

 비록 불가해적인 현상이었다고늘 하나, 결국 타인의 몸을 빼앗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최종보스인 사월에게도 꿈은 있었다. 

 조금 소박하나, 나름의 사정이 있는 꿈이.

 그렇기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악인의 꿈이더라도, 나의 꿈이 그것보다 가치 있는가. 창작된 인물의 꿈이더라도, 그 또한 하나의 꿈이 아니던가.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그녀가 된 이상, 그녀의 꿈 역시 나의 것이 되었으니.

 결국 둘 다 이뤄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제 아무리 꿈이 있고, 목표가 있더라도 상식적으로 한 회차당 일백 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틸 순 없는 노릇.

 내겐 그 영겹의 시간을 함께한 이들이 존재했다.


 "혼자는 아니었다네. 늘 사흉(四凶)이라는 충실한 벗들이 나를 도왔으니."


 사흉.

 각각 혼돈, 궁기, 도올, 도철로 불리는, 4마리의 거대하고 사악한 짐승들.

 원작에서 네 명의 왕에게 붙었던 그들은 본래 저승의 원혼들을 해방시킨 사월과 계약한 이들이었으니, 나 또한 그들을 수하로 부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매 회차마다 사월의 육신에 익숙해지고, 원작 속 그녀의 꿈을 위해 분투하고, 동시에 나의 꿈을 위해 노력하고, 세상에 원귀들을 풀어놓기를 몇십 회차.

 한 가지,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사흉 녀석들은 매 회차마다 기억을 잃어버리더군. 게다가 매번 최종 결전 이전에 전부 죽어나가니, 결국 결과는 달라지는 게 없지 않던가."


 아무리 내가 강해지고, 세상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든 뭔들하나. 여전히 단 한 대도 맞출 수 없는 노릇인데.

 나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걸 20회차 즈음에야 깨달았으니, 여간 둔한 게 아니었다.

 그에 비해 사흉 녀석들의 문제는 명확했다.

 회귀할 때마다 기억을 잃어 버리고, 자꾸만 내게서 벗어나려 든다니.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지 않나.


 "나는 녀석들을 나의 영혼에 봉인했네. 이로서 그들은 죽어도 나와 함께 죽을 수 밖에 없는, 진정한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지."


 한 배를 탔으면, 도중에 내려서는 안될 법인데. 계속해서 도망치기를 반복한다면, 강제적인 수단을 쓸 수 밖에.

 그리하여, 난 녀석들의 영혼을 나의 영혼과 결속시켰다.

 이미 지난 회차들 동안 게임에 존재하던 온갖 도술과 법술, 그리고 저승사자라는 육신의 사용법을 익혔으니, 그들을 봉인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성과도 있었다.

 필연적으로 토벌될 놈들에게서 사흉을 때어내자, 최종 결전에서 1대 5로 싸우는 것과 같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가 조금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겁하다면 비겁하다 할 수도 있겠다만··· 그게 대수인가? 그렇게라도 이길 수 있다면, 응당 해야 할 일이지 않나."


 꼼수로만 깰 수 있는 보스라면, 그건 더이상 편법이 아니다. 오히려 정공법이라 보는 편이 더 옳겠지.

 그 결과.

 그로부터 80회차.

 미운정 고운정은 다 들고도 남은 사흉들과 나의 유대는 절정에 치닿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전장에선 더이상 사각지대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마침내, 우린 그를 이길 수 있었다.


 "뭐,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떠하냐고 묻는다면···."


 긴장을 완전히 풀고, 대자로 누워 푸념하기를 어느덧 한 시진.

 고개를 들어 널리 흩어진 거대한 짐승들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늑대를 닮은 녀석이 한 놈.

 범을 닮은 녀석이 둘.

 양을 닮은 녀석이 하나.

 ···사흉들 중 어느 하나 살아있는 녀석은 없었다.


 "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로구나."


 기쁨, 슬픔, 분노, 안도감, 성취감, 허망함, 분함, 원통함··· 수 많은 감정이 매몰차게 쏟아졌다.

 급류에 휩쓸린 폭포처럼 순식간에 감정이 바뀌어 갔다.

 그럼에도 단 하나. 졸곧 걸리던 것이 있었으니.


 "허나, 딱 하나만 꼽아 보라면."


  아쉬움.


  "···아쉽구나. 이 모든 것들이."

 
 사흉 녀석들과 맞이한 승리가 아니라는 아쉬움.

 꿈을 이루긴 이뤘으나, 마냥 석연치 않아 생긴 아쉬움.

 그리고 그녀의 꿈도, 나의 꿈도, 모두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나의 한(恨)이었다.

 사유는 명확했다.


 "―쿨럭. 제길, 역시 내상이 심했군. 결국 동귀어진(同歸於盡)이 최선이란 겐가···."


 입에서 사기(死氣)로 점칠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기껏 되살아난 육신이 죽음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전투 중 입은 갖가지 자상과 단 한 번의 일격타가 원인이었다.

 육신의 생환은 곧 그녀의 꿈. 헌데, 이젠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그녀의 꿈 또한 무너지리라. 

 
 "단신으로 사흉을 모두 죽인 것도 모자라서, 내게 치명상까지 욱여 넣을 수 있다니···. 이토록 치밀해서야, 어디 한 번 이겨보겠나."


 겨우 얻어낸 첫 승리였는데, 이래서야 진 것과도 다를 바 없었다.

 역시 한 치 앞을 모르겠는 녀석이로다.


 "하, 이래서야 녀석들을 대체 무슨 낯짝으로 볼련 지··· 참으로 원통할 노릇이구나."


 이 고생을 해놓고 반쪽 뿐인 승리라니···.

 앞날이 뻔했다.

 보나마나 또 궁기에게 대차게 까일 테지. 도철이 그 놈은 양껏 징징댈 것이 확실하고, 혼돈과 도올은 은근슬쩍 궁기를 거들 것이다.


 ···허나, 그게 대수인가.

 녀석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회귀의 값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충분하지 않나.

 시간은 괴인의 편이 아닌 나의 편이니.

 결국 언젠가 또 기회가 올 터였다.


 그러니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지.

 그에게 말을 청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지금 뿐일테니.


 "그래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건 꽤나 좋은 기분이군. 그렇지 않은가? 괴인의 혼이여."


 그리 말하며, 나는 아까부터 졸곧 떠있던 괴인의 혼백을 응시했다.

 갈라진 하회탈, 자색 피부, 아직도 빛을 발하는 사인검(四寅劍), 불그스름한 곤룡포.

 비록 불투명하게 보였으나, 어느 하나 그의 것이 아닌 게 없었다.


 "그간 별의 별 무기로 맞아가며 싸웠지만, 그대도 종국엔 진심으로 나와줬으니. 내, 그대가 나를 인정했다고 생각하겠네."


 처음엔 맨 주먹, 그 다음엔 몽둥이, 담뱃대, 부채, 나아가선 진검으로도 모잘라 신기(神器)를 들고 왔으니.

 갈수록 내가 그의 호적수가 되어갔다는 게 아니겠는가.


 "···."


 허나, 괴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저승사자는 혼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니, 이는 온전히 그의 침묵이로다.


 "거, 참. 옛적부터 말 한 마디가 없으시구료. 말하는 사람 서운하게시리···."

 
 하긴, 괴인에게 뭘 기대하나. 어차피 다시 싸워야 할 상대이거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뭐, 되었네. 다음엔 필히 완벽한 승리를 따낼 수 있겠지. 그땐 기필코 그대에게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


 사족이 길었다. 

 진작 사흉 녀석들과 재회해도 모자랄 판에 괜한 희망이나 걸었으니, 오죽하겠나.


 "그럼, 이걸로 백 일번째 회귀인가. 나름 기념비적이었군. 일백 번째에 맞이한 첫 승리라니···."


 길고 추잡한 싸움을, 너무 길게 끌었다.

 혹자는 이를 추하다면 추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망도 없어보이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다고 볼 지도 모른다.


 "허나, 이로서 만족할 순 없으니."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의 노력을 한낱 미물의 발버둥으로 보더라도, 거짓된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나를 욕하더라도.

 나는 '나'의 꿈을 위해 노력할 것이니.


 "그것이, 나. 사월의 꿈이노라."


 세상에 이룰 수 없는 꿈은 없다.

 그러니 다음엔 기필코 완벽한 승리를 따내리라.



 ***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장소의 이변을 감지할 수 있었다.


 "사월 나으리―! 어서 눈 뜨고 이것 좀 보시오! 여기 신기하게 생긴 나무가 있소!"

 "혼돈. 그보다, 어째서 우리가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묻는 게 맞지 않겠나?"

 "혼돈, 궁기. 둘 다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도, 도올씨. 그, 그래도. 일단 깨울 시도라도 해, 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회귀했다고 생각해서 깨어나보니, 작아진 사흉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 회차는 망한 모양이니, 이참에 한 번 더 죽어야겠다.


 "사, 사월 나으리! 죽으면 아니되오!!! 퍼뜩 정신 차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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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제목 정해주라 했던 소설 슬슬 비축분 쌓여서 들고와봤어!


그리고 이건 추하고 허접한 최종보스 틋녀가 일백 회차 동안 참교육 당하다가 겨우 이겨놓고선 허무하게 출혈뎀으로 죽어버린 1화!


...근데 이거 1화치고는 너무 길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