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와 이야기 꽃을 피우고 그녀가 시계 바늘을 바라보자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레베카.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네."

"아니야 벨라.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네가 왜 엄마가 되길 두려워 하는지도 알게 되었고."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TS 그러니까 GB로 부모가 된다는 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잘 모르겠어."

타나 씨가 생각이 났지만 타나 씨의 경우 이미 아이가 있었고 이후에 TS를 통해 여자가 된 경우였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몸으로 임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있고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미안한데 내일 이야기해도 될까? 저녁 뷔페를 준비해야 돼서."
레베카는 미안 한 표정을 짓고 내게 말했다.

"아니야. 시간을 같이 보내줘서 고마워. 내일 또 올께."

"고마워. 벨라. 내일 오면 늘 오시는 분 한 분 소개해 줄게. 정말 친절한 분이거든."
레베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대되는데?"

"혹시 갈 곳이 없다면 오른쪽 끝에 카페 열차칸에 한 번 가 봐."

"카페 칸이 따로 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러시아 사람들은 차에 열정적이니까. 러시아산 홍차를 마셔보는 건 어때?"

레베카는 바를 정리하면서 내게 카페 칸을 추천했다.

러시아산 홍차라...
과거 러시아의 독재자처럼 군림했던 한 대통령이 주로 사용했던 암살용으로 종종 언급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러시아예서 홍차를 대접한다는 의미는 꽤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걱정하지마 벨라."

"미안해 레베카. 러시아 홍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혹시 티 났어?"

"응, 얼굴색이 엄청 파래지던뎨?"

"아직 죽기 싫거든."

"응?"
레베카는 바를 정리하면서 내 이야기를 듣느라 다행히 내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야. 가 볼게. 내일 봐!"

"응, 내일 봐 벨라."

나는 식당칸에서 벗어나 오른쪽 칸으로 이동했다.
메릴을 보고 싶었는데 지금 한참 열중하는 메릴을 보면 장난기가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가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잘생기고 매력적이라서 장난을 치고 싶었다.

우리 집 고양이 애니에게 옮은 듯했다.

애니가 종종 내가 무언가에 몰두해서 집중할 때 늘 내 결과물들을 부숴버리기 위해서 다가오니까.

메릴의 고양이인 나는 일반 고양이 보다 더 똑똑하고 그리고 지능적이다.
아마 메릴은 내 유혹에 넘어 올게 분명했다.

복도를 따라오른쪽 쪽으로 향했다.


1등석과 다른 2등석의 객실들을 지나 3등석을 지나치는 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드카를 마시며 카드 게임을 하면서 보내는 데 한 눈에 띄는 중년 상인으로 보이는 분과 눈이 마주 쳤다.

"안녕하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건넸다.

"아, 러시아어로군. 반갑네."
점잖게 인사를 받아주는 중년 남성분은 후덕한 인상에 멋드러진 수염을 가진 유목민처럼 보였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모자를 쓴 그는 듬성듬성 빠진 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눈매는 쳐져 선하게 보였다.
그리고 배가 살짝 나와 있는데 중년 남성들은 전 세계 어디 가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인사에 흥미를 느낀 나는 멈춰서 그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칸을 가려고 하는 데 이쪽 방향이 맞나요?"

"그렇다네. 아름다운 여성분. 이 열차를 타는 것이 처음으로 보이는 군?"

"네, 맞아요. 제 첫 여행이에요."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건 대게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는 웃으며 이야기 했다.

"괜찮다면 나와 대화나 하지 않겠나"
상인 분은 꽤 친절하면서 톰 씨와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셨다.
그 어떠한 위협이나 걱정이 들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용기 있는 여성이군. 보통은 미지의 것에 대해 무서워 하거나 두려워 하는데 말이야."
상인 분은 반쯤 농담식으로 말한 제안을 받아 들인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열차 내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요."


맥그리거 씨가 달아준 통역기에는 보안 장치도 달려 있었다.
애니가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미국에서 특수팀이 오듯이 비슷한 장치였다.

다만 이 장치는 메릴과 맥그리거 씨에게 전달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누추하지만 여기에 앉게. 뭐 좀 먹을 텐가?"
상인 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안내 했다.
그곳에는 여러 겹의 모피가 깔려 있었고 그 옆에 자리를 내어주셨다.

"아 괜찮아요."

"좋은 선택이야. 제가 아무리 무해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니야."
상인 분은 덤덤하게 말씀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제게 무슨 일을 할 거라고 생각은 안드네요."

"고맙군.  모피상인인 바얀이라고 한다네. 뒤에 더 이름이 많지만 사람들에게는 바얀이라고 불리지."
중년 상인분은 점잖게 말씀 하셨다.

"저는 벨라라고 해요 여행객이죠. 그리고... 놀라워요. 이렇게 점잖은 상인 분은 처음이거든요."

"하하. 점잖은 상인이 가진 이점을 아직 모르는 것 같군."
칭찬에 웃음으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바얀 씨였다.

"저 그리고... 제가 잘 모르는데 바얀이라는 이름은 몽골쪽 이름인가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몽골 초원 이야기에서 비슷한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맞네, 몽골계 이름이네. 중국에 모피를 팔고 물건을 사서 돌아가는 상행을 종종하지만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모피가 많이 팔리지 않았다네."
아쉬워 하는 말투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피들이 바얀 씨가 말씀하신 팔지 못한 모피들로 보였다.


이 열차는 신의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하바롭스크를 가는 철도였다.
신의주는 중국과 접경지역이니 그곳에서 타신 것 같았다.

"모피가 다 안 팔려서 어떻게 해요?"
나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법이니까. 팔리지 않는 것도 받아 들여야 한다네."
바얀 씨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손해를 보신 것이 아닌가요?"

"지나간 것을 붙잡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네. 다음 상행 때 가져올 모피의 숫자를 더 잘생각해야겠지. 그리고 아직 기회도 남아있다네. 열차 내에서 구매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으니까."
그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에요. 제 머릿속에 있는 몽골 상인 분이라고 하면..."

"대부분 괄괄하거나 호쾌한 성격이지."

"죄송해요."

"아닐세. 상인이란 그런 존재들이니까."

"네?"

"물건을 팔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도 같이 판다. 그러니까... 물건을 구매할 사람을 보고 적당한 감정도 같이 파는 것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나는 어느새 노련한 상인 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하. 그저 미천한 상인의 잔재주라네. 그래도 들어 보겠는가?"

"모피보다 더 값진 것을 제게 주려고 하고 계시는데요?"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중년의 상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감정을 파는 것이라 말했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네. 그러니까 감정을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표현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근접한 표현이라 생각한다네."

"어렵네요."

"미안하군. 내가 그렇게 배운 사람은 아니 거든."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고 나는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떠한 사람들은 감정을 무기처럼 휘두르곤 한다네. 그걸 나와 같은 상인들에게도 사용하지. 겁박해서 물건 값을 깎거나 아니면 사정을 해서 가격을 깎거나 같은 일 말이네."

"흥정 말씀 하시는 거죠?"

"맞네. 흥정."

"흥정은 거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건가요?"

"유구한 상업의 역사와 함께 한 흥정이지. 내 조상들의 조상들도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그렇게 했었을 거라네. 다만... 칼도 사용했겠지."
바얀 씨는 장난을 섞어 말씀 하셨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간단하다네.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미리 알고 그걸 건네는 거지. 물건이든 감정이든."

"그럼 제게 친절함을 주시는 이유는요?"

"같은 이유라네. 자네는 친절함을 나에게 바랐으니까.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니 보여줘야지."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선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간다는 것을 상인의 눈으로 바라본 것처럼 느껴졌다.

"선량함. 가끔 상인들은 이것을 잊고 만다네. 이익에 눈이 멀어 이것을 숨기고 상대에게 건네지 않아."

"어렵네요."

"미안하네. 내가 더 배운 사람이었으면 간단하게 설명했을 텐데 말이야."

"아니에요. 사람마다 살아온 모습이 다르니까요."

"자네의 선량함에 이끌리듯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네."

통역기의 문제인가 아니면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난해한 말들과 전혀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말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근본 적인 선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게 모피를 파시겠어요?"

"한국인 여행객으로 보이는데 모피가 필요한가?"

"상인에게 지혜를 얻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을 하고 싶어요."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닐세."

"네?"

"내가 모피 상인이라 자네가 필요 없는 모피를 사서 나를 기쁘게 할 필요는 없다네."

"제가 환심을 사는 것인가요?"
나는 조심스레 이 알 수 없는 선문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좋은 거래는 나도 상대도 모두 이익이 되는 것이여야 하네. 물론 꿈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말이라네 생각하네."

"어렵네요..."

"그러면 내가 질문을 하지. 내가 지금 자네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절한 상인 분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 카드 게임을 하거나 보드카에 취해 기대 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인 분은 흥미롭게 나를 바라보셨는데 나는 이것을 종종 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야기할 상대를 찾고 계셨군요."

"맞네. 정답이야. 이미 자네가 내게 그것을 주었으니 나는 값을 치룬 것뿐이야."

"거래란 이런 건가요?"

"맞네.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근본 적인 건 서로 바라는 것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하지."

"원래 상인 분들은 이렇게 철학적이신가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특이한 거지. 내 이름이 그 증거라네."

"바얀이 무슨 뜻인가요?"

"풍부한 일세."

"단순히 풍부한이라는 뜻인가요?"

"바얀이라는 뜻은 그런 뜻이라네. 하지만 내 이름인 바얀바야르라는 뜻은 풍부한 즐거움이라는 뜻이지."

"몽골어는 어렵네요."

"그게 즐거움 아니겠는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말들이 이어지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끌림에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카페 열차칸으로 가보게나."
그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때 본 것이지만 카페 칸에서 수 많은 인파가 3 등석을 가로 질러 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까 갔다면 자리가 없어서 서 있어야 했을 거야."

"그럼 저를 잡아두신 이유도 이것인가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내게 먼저 아무런 이유 없이 인사를 해 주고 내가 바라던 '대화할 상대'로 있어 주었으니까."
바얀 씨는 빙긋 웃으셨다.

"자 이제 가보게나. 러시아산 홍차는 꽤 맛있다네."

"고마워요. 바얀 씨."

"나중에 심심하면 또 와 주게나. 나는 언제나 환영일세."
그는 내게 손 인사를 하고는 침대에 누워 가죽 모자로 얼굴을 가리셨다.

나는 이 기이한 만남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바얀 씨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는 카페 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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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얀이라는 캐릭터를 일부러 난해하기 위해서 그럴싸한 문장을 마구 넣었는데

중간에 잘못썼나 생각이 들어서 뇌정지가 잠깐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