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오, 왔나, 트레이너."


심야의 벤치, 루돌프와 트레이너는 그곳에서 만났다. 학생과 제자로 만나는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루돌프도 학생회장 자리를 사실상 내려온 상태였고 트레이너도 슬슬 본격화를 맞이할 학생을 찾아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기숙사를 나오고 나니 이 시간에 만날 수도 있군."

"뭔가 기분이 이상해. 루돌프는 졸업해도 학생회장일 것 같았어."

"이사장님이나 협회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보니 아마 비슷한 일을 또 하게될 것 같기도 하다만."

"굉장하네. 그래, 언제나 루돌프는 굉장했었지!"

"당신이 우쭐대는건가 크큽..."

"내 담당 우마무스메가 대단한거니까!"

"알았으니 커피나 받게."


루돌프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넸다. 


"언제나 먹던 초코 시럽 두 번 추가한 모카, 근데 이걸 먹을 바엔 그냥 핫초코가 더 나은게 아닌가?"

"원래는 핫초코를 먹긴 했지. 근데 어른이 되면서 카페인이 필요해지더라고."


트레이너는 뚜껑을 열고 커피를 마시려했지만 루돌프가 막았다.


"아직 뜨거워, 2주 전에도 한 번 데였는데 벌써 잊었나?"

"아... 루돌프는 용케 그걸 기억하고 있네..."

"대개 2주 전이면 무언갈 잊을 만큼 오래전은 아니지 않나?


트레이너는 멋쩍게 웃었다. 커피에선 아직도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루돌프는 커피스틱를 건넸다. 트레이너는 커피스틱을 받고 천천히 커피를 저었다.


"가끔 느끼지만, 루돌프 앞에선 내가 트레이너가 아니라 아들이 된 것 같아."

"아들?"

"매번 챙겨주는 엄마같아. 막상 챙겨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인데 말이지."

"...싫은가?"

"싫다기보단... 새삼 다시 물어보지만, 나는 루돌프한테 도움이 되었어?"


트레이너의 표정은 진지했다. 루돌프는 커피만큼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그냥... 매번 내가 배웠는데, 내가 트레이너로서 한 일은 루돌프를 졸졸 따라다닌게 고작인 것 같아서."

"그 말, 내 트윙클 시즌 마지막에도 했던 말이었지."


루돌프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구름에 살짝 가려지긴 했어도 달이 꽤 밝았다.


"그렇다면 내 대답도 똑같네. 도움이 되었어. 아니, 의지가 되었어."


루돌프는 손에 든 커피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커피 또한 뜨거운 김이 나오고 있었다. 그 일렁임에 눈을 맞추고 말을 이어갔다.


"어느 때나 옆에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가족 외엔 찾기가 어렵지. 나는 보다시피 동료는 있어도 친구는 없어서, 내 옆에 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넘어야할 산이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지."


루돌프는 커피를 후후 불며 입으로 가져다대었다. 입술만 살짝 대었다가 도로 컵을 내렸다.


"아직 뜨겁군."

"천천히 마셔, 루돌프."

"속에 있는 말을 하려니 아무래도 무안해서 말이지."


루돌프는 이내 쉼호흡을 크게 했다. 침묵이 길어져도 트레이너는 가만히 앉아서 그녀가 다음 말을 뱉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래, 이런거."

"어?"

"이렇게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 방금 전처럼 만나자마자 나눴던 대화 같은 것, 우천 레이스가 끝나고 직접 머리를 털어주던 것, 그런 사소한 것들, 그런 것들이 좋았어."

"어..."

"내 옆에 있지만, 내가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상대라서 좋았어."

"...나도 루돌프한테 많이 기댔는데?"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루돌프는 트레이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렇게 물리적으로도 말이지."


트레이너는 루돌프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자세를 고쳐 루돌프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좀 더 다가갔다.


"트레이너는 눈치가 좋아."

"아니, 이 상황에선 이러지 않는게 눈치가 없는거지."


루돌프는 미소를 지었고 트레이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좀 식었나?"

"그런 것 같아."

"맛은 어때?"

"똑같지. 내가 좋아하는 초콜렛과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커피가 섞인 묘한 맛."

"아이같군. 테이오도 쓴 커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데."


루돌프는 머리를 떼고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몸은 여전히 붙어있어서 서로의 얼굴이 꽤나 가까웠지만 루돌프의 진지한 표정에 트레이너 또한 당황하지 않고 루돌프를 응시했다.


"다소 두서없이 꺼내는 말이지만 트레이너, 혹시 씨수말이란 말을 들어봤나?"

"...좀 이상한 말이네."

"어떤 부분에서?"

"말(馬)은 우마무스메를 뜻하는데 우마무스메는 생물학적으로 여성밖에 없잖아."

"트레이너는 역시 눈치가 빨라.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게 아니라 바로 의문점을 도출해내니까."


트레이너는 루돌프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내가 방금 전 눈치가 빠르다는 말은 괜히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거지. 조금 자신감이 생겼나?"

"루돌프..."

"물론 그것만을 위해 꺼낸 이야기는 아니지만."


루돌프는 진지하고,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종마라고도 표현되었으며, 예전에 있었던 어떤 연구에서 나온 단어다. 우마무스메의 2세가 다음 혈통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연구였고 지금은 사장된 연구이기도 하지."

"사장되었다는 거는... 큰 영향이 없다?"

"이미 우마무스메가 존재한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와서 그런 것을 따져 무엇하나, 간단히 요약하면 그런 반론이었지.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격화가 그 이상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 그 영향도 체격적인 부분에선 오히려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이 두 경우가 결정적이었어. 또한 사람을 가축처럼 교배할 것이냐고 연구윤리적으로도 반발을 사기도 했었으니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

"하긴... 자기 아들이 가축처럼 대해지는 걸... 쓰읍... 좋아하진 않겠지, 정상적인 부모라면..."

"근데 이게 최근엔 다른 용어, 정확히는 은어로 쓰이고 있더군."


루돌프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방금 전엔 쉼호흡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이번엔 근심이 들어나는 그런 한숨이었다.


"...트레이너를 연애나 결혼 상대로서 고르는 행위, 그 행위로 선택된 남성 트레이너를 일컫는 말이 되어있더군."

"으엑..."


트레이너는 속으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사냥감으로 보는 것이 결혼전선에 뛰어들어 좋은 남자를 낚아채려 필사적인 결혼정보회사의 회원들이 떠올랐다.


"나도 이걸 알게된 것이 그리 오래되질 않아서... 내가 아는 일들은 내 손에서 끝내놓고 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다음 학생회한테는 조금 미안한 느낌이 없지않아."

"뭐... 그거야... 어쩔 수..."


트레이너는 말을 이어가질 못 하고 크게 하품을 했다.


"아우... 추워서 그런가 많이 졸립네..."

"그럼 한숨 잘텐가?"

"여기서?"

"뭐, 어떤가. 제작년 가을에 술에취한 자네를 직접 업고선 집에 바래다 준 적도 있지 않나?"

"어우... 그 때는 생각만 해도..."


트레이너는 다시 크게 하품을 했다.


"트레이너라면 나를 더 의지해도 된다는 말이니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합이 잘 맞는 파트너는 서로 의지하고 지탱해주는 것이니."

"그래... 쩝... 그럼 부탁 좀 할게 루돌프... 나중에... 밥 한 번..."

"그나저나 나중에 와이프한테도 이러면 안 될텐데, 우마무스메면 몰라도 인간이면 꽤 버거울 거라고?"

"지금... 여친도 없는데... 무슨... 와이... 프..."


트레이너는 그대로 루돌프의 품에서 골아 떨어졌다. 쥐고 있던 커피는 어느새 루돌프가 받아든 상태였다. 루돌프는 그대로 트레이너를 업었다. 커피는 벤치 뒤 화단에 따라버렸다.


"트레이너?"

"들리진 않겠지만,"

"요즘 테이오가 많이 귀엽더군."

"난 그런 딸이 있었으면 좋겠어."


루돌프는 그대로 본인이 왔던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독점력

용의주도

제목 후보군들(였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