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 트레이너 군, 안녕. 잘 잤어?"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하루 일과를 빼고 데이트를 했다. 도착한 트레이너에게 팔을 흔들어 인사하는 마루젠스키는, 딱 보기에도 평소와 많이 달랐다. 웨이라니, 곱씹어보며 트레이너는 속으로 웃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고 느꼈다.


"안녕, 마루젠스키. 해피 발렌타인."


그가 뒤에 숨겨 든 것을 내밀었다. 장미와 튤립이 섞인 꽃다발을 받아 그녀는 놀라움에 활짝 웃었다.


"아직 초코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야 주위에서는 여자쪽에서 주는 날인 인식이 많지만..."


트레이너는 꽃다발 위에 메시지 카드를 올려두면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원래 남녀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선물을 주는 날이니까."


"흐응..."


콧소리를 내면서 입가에 검지를 두고 마루젠스키는 얼굴을 붉혀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펼쳐진 양쪽 엄지를 조용히 접어넣는 모습은 트레이너가 보기에 퍽 사랑스러웠다. 보나마나 "따봉"같은 말을 하려다가 삼킨 모양이다. 대신에 그녀는 짧게 발돋움해 트레이너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 츗, 소리를 내고 웃었다.


"그런 태도, 아주 보기 좋은걸. 나한테만 그렇게 해준다면 말야."


"다른 애인이 있지는 않아."


"그런 말은 쵸베리ㅂ...좋지 않은걸. 트레이너 군. 오해하지는 않겠지만,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


"좀 더 신경쓸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신경을 더 쓴 쪽은 마루젠스키였다. 데이트 내내 그녀는 평소에 쓰던 철지난 유행어를 쓰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쓰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요즘 말투를 쓰는 것은 금방 포기해버렸지만.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쇼와시대의 자아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지쳤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마루젠스키는 조용했다. 탓짱이 아니라 트레이너가 모는 차에 타고, 규정속도대로 달리고 있다는 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조수석에 앉아있다는 점. 모두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말수가 적었다.


"괜찮아? 피곤해?"


"응...아니?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조수석에 거의 늘어지다시피 한 마루젠스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가, 바로 붕붕 좌우로 저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트레이너가 핸드폰을 꺼내 연결하면서 물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유로비트 들을래?"


"그게 문제인 거야. 트레이너 군."


그녀가 볼을 잠깐 부풀렸다가, 온 몸에서 공기를 빼내는 것처럼 한숨을 쉰다.


"오늘 나 어땠어?"


"예쁘고 귀여웠는데."


"그런거 말구..."


생각지도 못한 역공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살 올리면서도, 끈질기게 물어본다. 자기 말투라거나, 행동이라거나...


"나우해 보였어?"


"방금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꽤."


"아으...삐, 삐엥.(ぴえん, 가볍고 애교스럽게 슬퍼하는 모양)"


손가락을 말아쥐고 엄지를 서로 맞부딪히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녀에게 트레이너가 묻는다.


"왜? 나우해 보여야만 하는 거야?"


"트레이너 군은, 내가 가끔씩 옛날말 할 때, 확 깨거나 하지 않아? 엄청 유감스럽다거나 그런 말 들었거든. 인터넷에서."


"가끔씩이라고...?"


"그쪽이야? 나 혹시 엄청 자주 그래?"


"응. 이제와서 뭘 새삼스럽게."


"...그러게. 새삼스럽지...?"


헤헤, 웃으면서도 어쩐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가 잠시 머뭇댔다.


"원래 이런 걱정이라거나, 남의 생각이라거나. 크게 신경쓴 적 없었는데..."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출발한 차, 핸들을 쥔 그의 손가락에서부터 옆얼굴을 초조하게 바라본다.


"트레이너 군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엄청나게 신경쓰여."


"그야 그렇겠지. 나도 그러니까."


"응?"


"나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청 신경쓰인다고."


트레이너가 픽 웃었다. 그런 목소리와는 다르게 어쩐지 앞을 바라보는 표정은 굳어있다. 입이 좀 마르는지 몇 번 입술을 오므려 물어본다.


"그럴 때는 조금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 머리가 성게가 되면...(頭がウニになる,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음)"


다시 신호에 걸린다. 차가 몇 번이나 멈추는게 답답해서인지, 아니면 방금 꺼낸 말 때문인지 그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 의견을 다 쳐내는 거야. 그러면 너랑 나만 남으니까..."


"음..."


그의 손이 생각에 빠진 마루젠스키의 양손에 와 닿는다. 차 안의 공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손, 손가락으로 맞이해 잡아보자 신호가 다시 바뀐다. 굳이 핸들로 돌아가게 두지 않으면서, 그녀가 그 손을 쫙 펴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물었다.


"머리가 왜 성게가 돼?"


"아...그게. 유행어야. 1983년도의."


트레이너가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그 말을 모를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는지, 호흡에 당혹감이 잔뜩 배어 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보였는지 마루젠스키는 웃었다.


"어디서 배웠대, 그런 말."


"파머가 말야. 친구한테 배운 갸루어는 꼭 일기장에 적어둔대. 나도 나대로 공부하고 있단 거지."


"근데 좀... 올드하네."


자신이 그런 말을 해볼 수 있단 것이 기쁜지, 혹은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그가 기쁜 건지, 핀잔을 주는 투인데도 공격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을 소중하게 끌어당겨 안으면서, 마루젠스키가 살짝 수줍은 미소를 띄웠다. 여러모로 빨간 색이 잘 어울리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매력을 더한다.


"그러니까 굳이 미래로 가지 마. 거기 그대로 있어야 내가 너무 과거로 안가고 널 찾을 수 있지."


"바보 커플이네. 연호가 두 번이나 바뀌었는데 아직도 과거에 있다니."


쇄골 살짝 아래, 고동이 들리는 곳에 그의 손을 두면서 작게 말했다. 그녀의 말소리가, 심장 소리가 손가락을 섬세하게 울린다. 트레이너는 대답 없이 이정표를 체크하며 운전해나가면서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웃었다.


"커플이 아니고, 아베크."


지금은 커플이라는 단어에 완전히 밀려버린 단어, 연인을 말하지만 원래는 '동행'을 이르는 프랑스어 전치사. 때로는 자동차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을 가리키는 신조어. 마루젠스키도 그 정정에는 불만이 없다. 눈을 감아 온 얼굴로 웃으면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보 아베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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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very night 계속해서 삼키고 있는 당신의 외로움을 느꼈어 Oh...loving you


Ah uh... 56709...>


풍성한 성량의, 딕션이 또렷한 이전 시대의 노래를 어느새 함께 들으면서 아베크가 집에 도착했다. 트레이너의 팔을 꼭 끌어안고 집으로 걸어가던 마루젠스키의 표정이 갑자기 확 굳었다. 중요한 것을 집에 두고 나왔을 때 짓는 표정이다. 단지 이번에는 집에 두고 나온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 뿐이었단 게 다르다.


"트, 트레이너 군?"


그녀가 그의 팔을 더 강하게 끌어안아 걸음을 멈추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좁은 일본, 그렇게 서둘러서 어디로 가는가?"

(1969년 경찰 교통안전 표어이자 유행어)


"아아, 우리 아내가 말이지..."

(1973년, 형사 콜롬보의 대사, 유행어)


트레이너가 지지않고 맞받아치면서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내가 맞춰볼까? 청소 안했지?"


"했어...했는데... 아직 안된 부분이 남아있는 거야."


"얼마나?"


"그... 부엌에서부터 거실까지...?"


집이 원룸인 걸 아는 시점에서 사실상 안했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늘상 있는 일이니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트레이너는 그녀를 천천히 잡아당겨, 집으로 향해간다. 어떻게든 바깥에서, 모텔에서, 호텔에서 같이 있자고 필사적으로 말려봐도 소용이 없다.


"그럼 그냥 돌아갈게."


도저히 마루젠스키는 트레이너가 꺼낸 치트키를 분쇄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 문을 열자 대충 뜯어 모아둔 상자, 배달음식 용기, 일회용 식기, 맥주캔 따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으으..."


스위치가 켜지면서 더욱 적나라해진 풍경을 트레이너의 눈이 부지런히 훑었다. 부엌 쪽에도 쌓여있는 설거지거리와 함께 반쯤 굳은 크림, 초콜릿, 아무데나 패대기쳐진 젤라틴 따위가 인사하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아까 함께 나눠먹은 판나코타를 떠올리고 살짝 웃었다.


"오늘은 정말 집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오늘은 집에 안 온다고 생각했던 거야?"


신발을 벗고 들어와 웃으면서 트레이너는 그녀를 적당히 앉히고 청소를 시작한다.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분류해두고, 적당한 병을 하나 추려 마루젠스키에게 내밀었다.


"아침에 준 장미랑 튤립, 여기 꽂아두면 되겠다. 꽃병을 따로 준비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여기다가. 청소는 내가 할 테니까. 알았지?"


"으응... 미안."


자주 트레이너가 청소를 해 주지만 미안한 마음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약간 어깨가 쳐져서 꽃다발을 풀자, 아까 올려준 메시지 카드와 함께 작은 책같은 물건이 나온다. 얇고 작은, 주머니에 들어갈 법한 사이즈의 책. 아마 좀 더 나이들면 눈이 침침해서 못 읽을 지도 모를 것이었다.


"꽃다발 사이에 이런 걸 숨겨놨어? 트레이너 군?"


그는 판나코타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 흔적들을 정리하고, 그릇을 닦기 위해 물을 틀고 있었다. 그녀의 물음은 물소리에 묻혀버렸는지, 그는 대답 없이 세제를 짜 물에 풀면서 수세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마루젠스키는 메시지 카드와 책을 살짝 열어본다. 함께 정리할 만한 건 끝나기도 했고, 또 그가 쓴 편지를 옆에서 큰 소리로 읽으면서 그를 부끄럽게 만들 수도 있겠단 장난기도 발동했다. 그릇을 닦는 그의 옆에서 마루젠스키가 메시지 카드를 펼쳤다.


<Leubh, Lubet, Libet, Lubo, Liube, Liebe, Lob, Lufu.>


"트레이너 군? 이건 뭐야?"


낯간지러운 내용이라도 써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트레이너가 대답했다.


"응. 아주 오래된 유행어야. 기원전 6500년 쯤부터,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어."


"헤에..."


유행어라는 말에 마루젠스키가 조금 귀를 늘어트린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놀라게 하려는 걸까, 그의 의도를 모르겠다. 애초에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떻게 반응할 지도 몰랐다. 트레이너는 담담하게 말했다.


"원시 인도유럽어, 그러니까 기원전 6500년 쯤부터 2000년 쯤까지 쓰이던 Leubh에서 시작된 말이야. 그 뒤로 라틴어로, 독일어로, 고대 영어, 그리고 현대 영어로 이어졌지."


"흠...어. 아아..."


힌트를 받고 나자 무의미한 알파벳의 나열이 소리를 갖고, 소리를 가진 낱말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쓰인 유행어, 모든 사람들이 찾아 헤매고 원해온 유행어, 형태는 달라도 결국 다시 돌아오는 낡지 않는 유행어.


아주 오래됐지만 언제나 새 것같은 그 말이 마루젠스키의 머릿속을 맴돌고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오늘같은 날, 듣기 좋은 말이네."


"...그렇지?"


마지막 접시를 건조용 선반에 올려두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옆에 놓인 수건에 손을 닦고 그녀에게 다가와 팔을 벌려 안았다.


"사랑해. 마루젠스키."


그녀는 대답 대신 팔을 그의 허리 뒤로 감아 안았다. 몸을 기대 편히 쉬는 것처럼 안겨, 조용히 이 순간의 여운을 만끽했다. 감긴 눈 위로 그녀의 두 귀가 얌전히 쫑긋거렸다.


"더 말해줘."


"사랑해."


"한 번 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질리지 않는다. 한 번 더, 앙코르를 외치게 되는 달콤함이 거기 있다. 그녀의 손에 힘이 살짝 풀려, 들고 있던 메시지 카드와 책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녀의 귓가에 그의 소리 없는 미소가 들렸다. 그녀도 따라 입술을 위로 올렸다.


그가 팔을 풀고 몸을 숙여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한 무릎을 꿇고, 책과 메시지 카드를 내밀었다. 받아든 그녀의 손에서 책의 첫 문장이 조명을 받아 드러난다.


<꽤 재산을 가진 미혼남이 틀림없이 아내를 원하리라는 것은 널리 인정받는 진리다...>


"트레이너 군...?"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때 쓰인 소설이거든. 그저 그런 가문의 여성이 상류층 남자를 만나 역경과 오해를 딛고 결혼하는 이야기..."


트레이너가 조금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눈을 올려다 본다. 그녀의 머리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종을 울린다. 겪어본 적은 없지만 익숙하다. 이것 역시 어디에나 있는 풍경, 전세계적인 유행.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치면서, 저 소설이 가진 생각이 전세계적인 유행이 되었어. 사랑한다는 게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나도 그 유행을 따라보려고 해."


그가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 그녀의 앞에 바치듯 내밀었다. 상자에서 고개를 내미는 또 하나의 유행, 누군가는 족쇄에서 유래했다 하고, 누군가는 영원을 상징하는 원형에서 나왔다고 하는 유행. 1477년 처음 제시되어 1940년대 초반에 정립된 유행, 다이아몬드 반지가 원룸의 조명을 눈부신 것으로 만들며 마루젠스키의 눈 안에서 빛났다.


"...사랑해. 그러니까 나와 결혼해줘. 마루젠스키."



마루젠스키는 눈 앞의 남자와 그가 말하는 유행어를 사랑했다. 그래서 유행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바닥에 흘렸다.


"네... 기꺼이!"


지금 한 쌍의 유행이 다시 고전이 되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 어떤 유행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어떤 유행은 고전으로 분류되어 시대를 초월한다. 낡은 유행이 시대를 초월하게 하는 마법의 주문, 언제나 그건 사랑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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