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트레센 교직원의 편의를 위한 단축 수업이 있는 날.


오후에 진행하는 트레이닝도 오늘은 하지 않는다. 덕분에 트레이너인 나도 오후부터는 완전히 쉰다. 어차피 쉴 거라면 기숙사 방보다는 넓은 곳에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트레이너실 소파에 누워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트레이너 선생님!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어제 엄청난 일이 있었거든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들어온 사람은 담당 우마무스메인 키타산 블랙. 사실 오늘 같은 날에도 트레이닝을 하고 싶다면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단순히 수다를 떨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번에 제가 오페라 오 씨한테 연기 지도를 받았었잖아요? 실은 그거 촬영이 어제였었거든요?"


내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금세 다가온 키타산이 즐겁게 조잘거렸다. 키타산의 말대로 나는 며칠 전에 키타산과 티엠 오페라 오가 천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호기심에 다가가서 말을 걸었었는데, 듣자하니 키타산이 좋아하는 드라마에 엑스트라 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에 자작 뮤지컬을 공연하고 다니는 오페라 오에게 특별히 연기 지도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촬영은 어떻게든 마쳤는데요... 끝나고 나서 무려 이럴 수가! 스태프 분께서 저보고 혹시 다른 프로그램에 주연으로 출연해볼 생각은 없냐고 하시는 거 있죠! 제가 연기를 엄청 잘 한대요! 감독님한테도 여러 번 칭찬받았고요! 헤헤..."


그래서 칭찬받은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반인이 프로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니 확실히 자랑스러울 만도 했다. 무엇보다 키타산 본인이 진지하게 준비했으니, 좋은 결과를 얻어서 더욱 기뻤을 것이다.


"대단하네.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 너는 한 번 하려고 마음먹은 건 뚝심 있게 잘 해내니까 잘 될 줄 알았지."


나도 키타산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해 주었다. 어깨에 손이 닿자 키타산의 귀가 쫑긋 섰다. 이내 키타산도 조금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에... 헤헤헤. 감사합니다. 물론 트레이너 선생님하고 트윙클 시리즈에 나가야 하니까 주연은 결국 거절했지만요. 그래도 진짜로 기뻤어요. 지금도 엄청 기뻐요."


키타산의 꼬리가 다리 사이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살랑거린다. 고개도 살짝 숙인 채 귀도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어서 혹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건가 싶었는데, 내가 미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키타산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내게 물었다.


"사실 그래서 말인데요... 트레이너 선생님! 저한테 연기 지도, 받아보지 않으실래요?"


"뭐?"


쓰다듬기 취소에 더해 의외의 제안까지 듣자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애초에 워낙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키타산이었다. 가르치는 것도 돕는 것의 연장선상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정말 키타산다운 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노닥거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담당의 귀여운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키타산의 대응이 나보다 빨라서, 내 첫 반응을 보고 거절당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인지 키타산은 얼른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음... 물론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드리니까 놀라셨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트레이너 선생님한테는 꼭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실은... 오페라 오 씨한테 같이 연습해주신 거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오페라 오 씨한테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운을 떼더니 키타산은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이윽고 소리를 내며 목까지 푸는 모습에 대체 뭘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하-핫핫하! 그렇다면 크리스틴! 이 패왕의 가르침을 너의 손으로 백성들에게 친히 전파하는 거다! 이몸이 직접 나섰다간 너무 눈이 부셔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하-하하하!"


순간적으로 내 눈앞에 있는 우마무스메가 정말로 키타산 블랙이 맞는지 의심했다. 스파이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실리콘 마스크를 벗어던지더니 짜잔, 사실은 세기말 패왕! 티엠 오페라 오였다! 하는 것은 아닌지 잠깐이나마 진지하게 걱정했다. 티엠 오페라 오라면 진짜로 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키타산의 연기는 오페라 오와 정말 똑같았다.


"그, 그러니까 결국 네가 오페라 오한테서 배운 걸 나한테 알려주는 게 결과적으로 오페라 오한테도 보답이 된다... 그런 이야기인 거지?"


오페라 오 특유의 해괴망측한 말투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일단 말의 의도를 파악해보자면 그랬다. 한편 내가 받은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타산은 그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그래서 점심시간에 다이아짱한테도 알려줬어요. 에헤헤... 그러니까 다음은 트레이너 선생님인 거죠!"


키타산 블랙은 받은 은혜는 확실하게 갚는 우마무스메다. 오페라 오의 자의식 과잉인 발언도 그대로 믿고 따를만큼 순진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며 도움을 받으면 착실하게 보답하고 싶어하는 순진함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나도 키타산의 선량한 마음가짐은 가능한 한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면 알겠어. 어디 한 번 해볼까... 연기 연습."


"와!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 바로 해봐요! 우선은 저를 봐주세요!"


자신이 앞서 연기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지켜보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키타산은 나와 눈을 맞추더니 잠시 그대로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니 나도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였고, 한편으로는 키타산의 영문 모를 귀여운 행동이 그리 싫지만은 않아서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내 눈을 바라보던 키타산의 눈동자가 갑자기 흔들린다. 이윽고 키타산의 얼굴에도 미묘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결국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거둔 채 물러나고 말았다. 키타산이 내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아... 하하하... 지금 건 없던 일로 해주세요...? 그, 그럼 이제 진짜로 시작할게요! 웃으시면 안 돼요!"


그러고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추었다. 뺨이 발개진 채로 애쓰면서 그렇게 말해봤자 이쪽에서 웃음이 나오지 않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요구하는 키타산의 열의에 나도 부응해주기로 했다. 키타산은 트레이닝을 할 때만큼이나 집중해서 내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 눈을 서로 맞추고 상대방의 표정을 집중해서 읽으면서, 이제부터 설정대로 행동하시는 거예요. 트레이너 선생님은 남자 주인공... 설정은 어느 재벌가 딸의 소꿉친구입니다."


재벌가 딸의 소꿉친구? 그거 너 본인 아니야? 하고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키타산의 실제 소꿉친구인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바로 유명 재벌인 사토노 그룹의 영애였기 때문이다. 웃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여기서 웃어버리면 키타산을 놀리는 것처럼 되어 버리니까, 혹시라도 키타산이 삐질까 봐 최대한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 재벌 가문의 딸은... 부모님의 뜻대로 정략결혼을 해야만 하는 운명이지요. 선생님은 비록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만, 소꿉친구의 행복을 위해! 친구가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바라고 있어요."


흔하다면 정말로 흔한 설정이었다. 그리고 키타산이 출연했다는 그 드라마처럼 가족이 다 같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폭넓은 시청자층을 망라하는 드라마에 어울리는 설정이기도 했다.


"제가 바로 그 재벌 가문의 딸. 부모님이 멋대로 정한 상대와 결혼하는 건 물론 싫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를 부흥시킬 수 없어요. 결혼에 실패하면...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저를 챙겨주던 직원들이 해고당할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직원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는 고향에서 키타산을 챙겨주던 키타산 아버지의 제자들이나, 상점가 사람들이 연상되는 설정이 등장하는 바람에 나는 또 웃음을 참아야 했다. 게다가 결혼과 해고는 대체 무슨 상관인데? 하지만 어차피 급조한 설정이니까, 쓸데없이 걸고 넘어지기보다는 그냥 분위기를 타서 즐기는 편이 좋겠지. 키타산은 연기 지도라고 주장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냥 상황극을 하면서 키타산과 놀아주는 것에 가까웠다. 결국 군말 없이 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면 선생님부터 대사를 해주세요... 자, 시작!"


키타산이 스타트를 끊었고, 그렇게 상황극이 시작되었다.


"아, 21세기에 정략결혼이라니. 난 인정할 수 없지만 이건 현실이야. 그 녀석과 나는 사는 세계가 달라.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결혼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걸려 있어! 그래도 자기 탓도 아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한 사랑의 기회를 포기해야만 하다니... 이건 너무 가혹하군."


나는 키타산의 표정을 살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독백을 했다. 말하면서도 솔직히 매우 싸구려 독백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스스로의 연기력에 실망하는 와중에도 키타산은 조금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웃거나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굉장히 몰입한 듯 입술을 살짝 씹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키타산이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니 얼굴에서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그녀는 말했다.


"확실히 가혹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이제와서 네가 걱정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고. 진정한 사랑이라니... 그게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걸까? 어차피 다들 주어진 환경에 맞게 적당히 살아가. 나한테는 이게 적당한 거야.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해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부모님도, 직원들도..."


활발하고 순진해서 보고 있자면 늘상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키타산이 갑자기 체념한 표정으로 무기력한 인생론을 읊고 있으니 그 갭이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정말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감독과 스태프의 칭찬도 이해가 갔다. 정말로 프로 연기자처럼 각이 잡힌 키타산의 모습을 보니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왠지 내가 키운 것 같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키타산의 연기력 덕분에 나도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고, 저 사랑과 현실 사이의 수렁에서 어떻게든 키타산을 꺼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네가 행복하지 않잖아? 다른 사람이 다 행복해도 정작 네가 행복하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지금 네 표정... 아무리 봐도 너무 괴로워 보여. 이성으로는 받아들였지만 역시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거지?"


과몰입해서 열심히 연기했다. 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키타산의 표정이 계속해서 변했다. 흔들리는 듯, 희망을 떠올리는 듯, 놀라는가 싶었더니 이내 깊은 물 속으로 침몰하듯 냉정하게 변했다. 키타산이 싸늘하게 말했다.


"납득할 수 없다면 뭐가 달라지는데. 네가 날 구해줄 수 있어? 부모님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는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면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척 말하는 쓸데없는 희망이... 나한테는 더 고문이니까."


어떡하지? 남자 주인공 미움받고 있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절호의 기회였다. 진심으로 꼴도 보기 싫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바라는 것이 있는데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서러워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키타산을 구해줘야 해. 고백을 하자. 그래, 이건 고백 각이다. 역시 드라마에서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고백이야. 여기서 고백 박고 마지막에 둘이 결혼하면 된다. 부모님의 반대나 직원들의 해고 같은 것도 어차피 장르 특성상 다 좋게좋게 해결될 거다. 그러니까 고백을 박자.


"...널 좋아해."


키타산의 어깨를 붙잡고 질렀다.


최대한 그윽한 시선 처리, 우수에 찬 눈빛.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불안을 안고서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 솔직히 스스로의 연기에 만족했다. 실제로 당하면 기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드라마 남주의 행동양식으로는 합격점 아닌가? 장난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기 지도라고 진지하게 주장했던 키타산에게 제대로 부응해준 것 같아 나름 뿌듯했다.


'...?'


그런데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키타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눈에 확 띌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나와 눈을 계속 마주치려다가 금세 시선을 피해 눈동자가 도망가고, 그러다가도 다시 눈을 맞추려고 하는 것의 반복. 입은 마치 웃다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어색하게 헤 벌리고 있었다. 키타산의 꼬리가 매우 빠르게 파닥이며 다리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얼굴이 가까운 가운데 애매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저, 저도... 실은, 트, 트레이너 선생님이, 조, 조, 좋..."


고장난 키타산의 모습이 연기가 아님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대응할 수 없었다.


키타산이 역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흔들리던 불꽃 같은 눈동자가 어느새 초점을 고정하고 당장이라도 덮쳐올 듯 불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