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브란트 글쓰다 열이 뻗쳐서 걍 암말 시리즈로 바꾼다.

이번껀 스크롤 꽤 있다.




(무패삼관마(웃음)과 아몬드아이 덕에 좀 더 와닿는 그런게 있기야 하다만...)


'암말이 숫말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경마의 세계와 승마의 세계에서 이것 만큼 잔혹한 문장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가능에 가까울뿐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른쪽 눈이 멀어버린 말마장마술을 재패하고,

늙은 조랑말다리다친 퇴역경주마장애물 비월 최정상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뤘는데,

암말이라고 불가능할게 뭔가? 애당초 불가능 했다면 제니 캠프(Jenny Camp)의 이야기를 쓰지도 않았다.










(스탠다드브레드. 주로 하니스 경마에 쓰이는 품종이다.)

제니 캠프의 혈통은...일단 편의상 아메리칸 스포츠호스로 분류되고 기록상으론 3/4 서러브레드로 되어있다.

사실 빈마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나마 기병대 기록상 서러브레드/스탠다드브레드 정도 뿐이다.








.....진짜 빈마에 대한 정보가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당시 기병대 기록에 따르면 고든 러셀과 이 이름없는 씨암말을 여러번 교배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찍은 사진인데, 기수인 토미피셜로 크기가 작으면 가오가 안사니 뒷자리 올리자고 했단다..)

아무튼 1926년

미국 버지니아주 군마 보충대에서 제니 캠프가 태어났다.

(현재는 스미소니언 보존 생물학 연구소가 들어섰다)


기대를 품고 교배를 한 결과였음에도 15.3h라는 작은 체구의 암말이었던 만큼 사람들의 실망이 컸다.


그래서 처음엔 폴로에 쓰일 말로 훈련을 받았는데,

정작 훈련시키고 보니 놀라운 점프력을 자랑하는데다 굉장한 지구력과 민첩함, 더군다나 영특하고 용감하기까지 했다.


그덕에 종합마술을 종목으로 바꿨고 1929년에 제니 캠프는 고등마술학교로 보내졌다.

거기서 자신과 같이하게 될 기수 얼 포스터 톰슨(Earl Foster Thomson, 1900~1971)을 만나게 된다.





얼 포스터 톰슨 혹은 토미는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미국 군 기병장교중 한명으로,

가이 헨리의 수제자 해리 체엄벌린의 교육을 받던 기수들 중 한명이었다.




잠깐 그럼 얘네 군마랑 기병장교 아님? 님 승마는 어디가고 갑자기 도랐? 이러고 싶을텐데,

왜 군인이 나오는지에 대해선 승마의 역사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승마대표팀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이 개최되기 6개월 전에 구색맞추기 용도로 미군 기병대에서 선수를 차출해 결성되었다.

...예상이 되겠지만 당연히 쳐발렸다. 그나마 종합마술 단체 동메달을 따긴 했는데....그날 미군 기병대는 뒤집혔다.

마장마술이나 장애물 비월은 그러려니 했는데, 종합마술에서 개처발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예전에 네로 글에서 전문적인 승마선수는 드물고 승마기수 대다수는 집안 좋은 신사거나 혹은 군에 소속된 기병장교라고 한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종합마술은 지금보면 괴랄하게도 기병장교와 군마가 출전하는 대회였다.

종합마술에서 종합적인 기수와 말의 수준이 나타난다는 평가를 받는 만큼 종합마술은 각 국 기병대의 수준을 선전하는 일종의 모의전이었다.


그런데 종합마술에서 처발렸단건 자국의 기병대가 타국의 기병대에 쳐발렸단 소리므로.....당연히 미군 기병대는 쪼인트가 까일 수 밖에 없었다.

단체 동메달도 당시 프랑스 기병학교에서 유학하다 온 가이 헨리의 멱살 캐리로 얻어낸 성과였으니 더더욱 까였다.


그 결과 미군에서는 고등마술학교를 설립하여 가이 헨리의 가르침을 받을 기병장교들을 차출하여 승마기수를 양성하는 동시에,

군 보급대에서는 본격적인 군마 개량에 착수한다.(케이닉스 떠오르면 기분탓이다. 그나마 여긴 성과는 거뒀거든.)





아무튼 토미랑 제니 캠프는 생각외로 궁합이 좋았다.

특유의 거부나 낙마도 없었고, 제니는 평소라면 귀를 내릴 상황에도 토미가 있을때 만큼은 귀를 세웠다고 한다.


아무튼 스승인 헤리 체엄벌린은 토미가 좀 더 작고 저지 액트(뭔 뜻인지 모르겠으니 아는사람 설명좀.)만 아녔으면 둘을 경마에 보내 돈을 걸었을꺼라며 극찬했다.
















1932년

LA 하계올림픽.


이 대회는 여러모로 말할거리가 있다.

일본의 유일한 승마 메달이 여기서 나온것과 장애물 비월의 난이도로 단체전은 아무도 완주를 못해서 메달이 없었단거.

(이 난이도는 나중에 멕시코시티 올림픽이 갱신해준다)


아무튼 토미와 제니 캠프 둘의 성과를 확인할 순간이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개인 은메달, 단체 금메달로 성공적이었다.


보통 마장마술이나 장애물 비월만 하더라도 7세 데뷔는 이례적으로 취급한다.

종합마술의 경우 규정상 7세 데뷔가 가능할 뿐 실제론 본격적인 몸이 완성되고 훈련을 받은 9세쯤은 되어야 성과를 거둔다고 본다.

근데 당시의 3일 내로 총 35km를 뛰는 무자비한 크로스 컨트리를 6세의 암말이 최고득점으로 완주했단 점은 경이로울만 했다.


그렇지만 당시엔 그렇게까지 고평가를 받지 못했다.


우선 홈그라운드 였다는 문제가 있었다.

현재 경마만 하더라도 원정을 가는 말이 불리한데 미국의 군마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크로스 컨트리 경기장이었다.

당연히 다른 말들에게 불리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경제불황이었던 대공황이었다.

이 시국에 뭔 올림픽이냐며 참가하지 않는 국가들도 대다수였고 관중들도 더 적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유럽국가에서 치뤄진 올림픽과 달리 이번 올림픽은 장거리를 이동하며 배를 타고 다시 기차를 타야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예전부터 꼬박꼬박 참가했던 미국과 달리,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승마팀을 보내지 않았고 프랑스도 마장마술만 참가했다.

24, 28년의 챔피언들인 스웨덴, 네덜란드가 참가했어도 제니 캠프는 사실상 오페라오와 같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물론 진짜 빈집털이인 몬체리가 있는데 제니 캠프, 티 엠 오페라오를 빈집털이 취급하는 것은 매우 큰 실례다.)









(맨 좌측이 헤리 체엄벌린이고 오른쪽이 토미와 제니 캠프)


최고참인 가이와 헤리가 달랬음에도 토미는 제니 캠프를 향한 세간의 평가가 부당하다 여겼다.

토미는 제니 캠프와 가이, 헤리 그리고 동료 기수들 앞에서 다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서 제니 캠프를 세계 최고의 여왕으로 인정받도록 만들거라 맹세했다.


동료기수들은 토미의 맹세에 응원을 보냈고 그들은 다음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해 군대 훈련과 대회연습을 병행하는 빡빡한 스케쥴을 소화해 냈다.

하지만 다음 올림픽은 미국 아니 여러나라의 승마기수들에게 비극이 될 올림픽이었다.







1936년

베를린 하계올림픽.


의무교육 시간에 다들 배웠듯이 이 올림픽은 상당히 기념비적이자 정치적 목적을 가진 올림픽이었다.

나치 독일의 국력을 과시할 의도는 당연히 승마에서도 나타났다.


이 당시 나치에 대한 우려로 여러 국가가 불참을 염두하고 있었지만,

정작 미국에서 정치와 예술을 구별하자는 관점에서 반대국들을 설득한 덕에 참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승마에서 가장 권위 있던 베를린 올림픽은 가장 수치스러운 대회로 남게 되었다.


이 당시 금메달 6부문은 죄다 독일이 가져갔다. 이게 순수 실력이었다고 하면 뭐라 안하는데 논란이 꽤 있다.

(지금도 독일 승마에서 쉬쉬하는 부분이다.)






우선 첫날에 열린 마장마술에서 그 조짐이 드러났는데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일부 자세들도 체점에 포함시켰다.

그덕에 타국의 기수들 중 알로이스와 네로를 제외하면 이에 대한 대응이 어려웠다.


여기까진 괜찮을지 모르는데 마지막 날 열린 장애물 비월은 LA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니시 타케이치가 중간에 낙마하고 기권했다.

근데 낙마한게 장애물을 넘던 순간도 아니었다. 이럴경우 고의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쯤 되면 나치가 금메달을 독식하기 위한 수작질을 벌였다는 심증은 누구나 가질텐데,

마장마술 다음에 열린 종합마술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제니 캠프와 토미)


제니 캠프와 토미를 비롯한 기수와 말들은 처음엔 자신들의 실력을 뽐냈다

비록 어려운 장애물들이었지만 이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마 상상 못했을것이다.




크로스 컨트리의 장애물중 연못(pond)란게 있다.




(마크 토드와 카리스마)

보통 이정도 깊이를 설정해두고 물아래 땅도 단단하게 다져두는게 일반적인데 베를린 올림픽은 선을 넘고야 만다.

승마기수들이 확인 했을때보다 연못이 깊어져 있었고 발판이 되어야할 지면의 흙은 미끄러지기 좋게 부드럽고 칙칙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대충 이 지랄이 났다. 씨바 말 다리 잠기는거 보이는가?


연못 높이와 점프의 높이 총 5피트의 낙차로 미끄러운 지면에 착지해야 했고 이 덕에 대부분의 말은 부상을 입거나 혹은 골절을 당해 죽어야 했다.

심지어 이 당시는 연락수단도 없어서 앞서 간 기수들이 뒤의 기수들에게 위험을 알릴 방도가 없었다.








이 비극은 미국 대표팀에게도 닥쳤다.


그나마 칼 루그스가 탔던 트레일 올카는 어깨벼가 금이 간 정도로 끝났지만,

토미와 절친했던 기수 존 윌렘스와 8년간 동고동락해온 말인 슬리퍼리 슬림은 다리가 골절되었다.

존은 결국 슬리퍼리 슬림을 안락사 시키고 통곡해야 했다.







(3분 1초가 제니 캠프와 토미, 그리고 4분까지의 독일 팀 착지를 봐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둘의 시작 순서는 뒤로 밀려있었다는 것이다.

토미는 확인 되지 않은 연못이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확신을 못하던 차에 제니 캠프가 무언가 불안했는지 평소라면 (더 길기 때문에)피했을 왼쪽으로 뛰었다고 한다.


토미는 제니까지 불안해 하는 만큼 그 소문이 사실이다 확신하고 일부러 왼쪽의 좀 더 긴 경로를 택해 점프를 했다.

비록 몇초가 늘었지만 제니 캠프와 토미는 부상을 피하고 완주를 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친구였던 존의 통곡과 슬리퍼리 슬림의 죽음을 알게되었다.


결과 48마리의 말들 중 28마리와 그 기수들은 부상을 입었고, 3마리는 운명을 달리해서 15마리의 말과 기수만이 남았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종합마술 단체전 메달은 물건너 갔다.







이 지랄이 터졌는데도 어디까지나 논란인 이유는...진상을 알만한 기수들은 2차대전때 대부분 뒤졌다.

니시 타케이치는 아오지마에서 전사했고, 독일 기수들도 마장마술 하던 놈들 제외하면 말들의 원한인지 독일 종합마술 기수들은 죄다 뒤졌다.

(몇몇 기수들의 증언이긴 한데 독일 종합마술 기수들은 제니 캠프와 토미가 온전하게 들어온 것을 알고 당혹해 했다고 한다. 일단 마장마술 기수들의 증언으론 빈집털이가 아니었다는 놀라움이라고 하는데 진실은 모른다.)







아무튼 크로스 컨트리를 완주했다 한들 아직 산은 남아 있었다.

외국에 와서 36km나 되는 익숙치 않은 무자비한 코스를 뛰었다제니 캠프, 토미 둘다 온전치 못하다.

메달을 따지 못하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거나 최악의 경우 장애물을 못넘고 둘 다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 대표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고 과거에 맹세까지 했다.

토미는 맹세를 지키는 것을 택했고 제니 캠프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로 했다.


결과는 개인 은메달이었다.

암말의 몸으로 악의 가득한 대회에 원정을 와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LA의 은메달은 결코 빈집이 아님을 증명하고 맹세를 지킨 것이다.


은메달 2번 딴게 대수냐 싶을텐데 종합마술에서 뛰는 말의 활동기는 길지언정 그 전성기는 상당히 짧다.

그래서 CCIO를 6번 이상 뛰는 것조차 5~6마리고, 종합마술 부문에서 메달을 연속으로 딴 말은 카리스마를 포함한 단 4 마리다.

여기서 암말은 오직 제니 캠프 1마리인데, 비록 6세 데뷔라는 이례적 사례인 것을 감안해도 당시의 무자비한 크로스컨트리를 견딘것부터 대단하다.


아무튼 이 덕에 일약 스타가 된건 자명했다.

그래서 별명이 스타(Star)이었다. 대놓고 제너럴 이라고 부를 순 없었기도 하니까 중의적 의미였다고 한다.


그렇게 편하게 사나 싶었는데....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빡칠대로 빡친 미국은 1941년 참전을 선언한다.

기병대도 당연히 참전을 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순수하게 군마로만 있던 애들만 참전하는게 아니었단거다.

기병대에 있는 말들중 나름 경마나 승마에서 활약하고 퇴역한 수상실적도 있는 말들이 있었다.

대공황의 여파로 마주들이 도축대신 그나마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군 기병대에 종마 혹은 교육용도로 파는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들까지 2차 대전에 참전할 위기 상황이었고, 이 말들중엔 토미와 올림픽을 나갔던 말 제니 캠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고등마술학교의 기병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2차대전 직전까지 기수로 활동하고 정까지 들었던 기병장교들은 

'얘네 원래 훈련 받은 군마도 아니고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될 애들은 아니잖아?' 였다.


특히 토미는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제니 캠프가 사지로 가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슬리퍼리 슬림을 잃어야 했던 존 역시 반대했다. 나치따위에게 죽을 말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와 헤리가 총대를 매고 항명했음에도 기병대 윗 상관께선 장교들의 부탁을 씹었다. 꼬우면 계급 높던가 이거였다.

동서고금할것 없이 자고로 미친놈을 상대할땐 미친놈이 답이다.


스승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미와 존 그리고 장교들이 고른 최후의 선택지는.......

부하든 상관이든 적군이든 모두 상종하느니 군대 때려치운다는 선택을 택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렇다 기병도 아니면서 평소에 기병복장 한다고 아니꼽게 보였던 조지 패튼이었다.


일단 토미처럼 올림픽도 참가했던 적도 있거니와 제니 캠프를 진짜 금메달리스트라 극찬했기도 했다.

패튼은 '뭐 씨발? 얘네를 전쟁터에 보낸다고?! 그 새끼 이름이랑 계급대라.' 이런 반응을 보이며 

계급빨로 군소속 퇴역 승용-경주마들의 전쟁터 참전을 막았다.

당연히 이 지랄은 월권이었다 씨바. 이 애정을 병사들한테 보였으면 좋았는데 참...



그렇게 패튼덕에 퇴역 승용-경주마들은 군마 개량이라는 목적하에 보급대에서 번식을 하게 되었다.

물론 제니 캠프도 브루드메어로 활약을...하긴 했는데 실제론 암말 2마리 낳고 끝이었다.


일단 명분은 그럴듯해보이지만 이 결정은 오마 브래들리가 했더라도 욕먹을 조치였다.

1차 대전 이후 점차 기병을 역할을 대체할 무전기나, 전차, 오토바이가 나오면서 축소되어가는 와중이었고, 이미 보급대에서 번식하는 말은 충분했다.

더군다나 전쟁통에 개량을 하는 것도 헛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일단 명분이 있었으니 제니 캠프는 번식을 잠시 해야 했다.

문젠 혈통서적에도 없고, 누구랑 교배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작은데다 연습시킬 생각도 없어서 그냥 제니 캠프랑 같이 살게 냅뒀기고 하고.

어차피 얘 전형제라는 리틀 부, 돈 알이 충분히 브루드메어로 활약했기 때문에 의미도 없긴 했다.







아무튼 전쟁이 시작되니 당연히 낙찌들의 간계도 이겨낸 제니 캠프는 영웅이었고,

나름 여러 군시설을 다니며 기념행사 등에 참가하는 슈퍼스타가 되어있었다.

(이때 토미는 이탈리아 전선의 10사단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에 군대에서 퇴역 후 지인의 도움으로 토미는 제니 캠프와 그 자마 2마리를 사들여 캘리포니아의 목장에서 살게 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경주-승용마들도 다시 돈벌어온 마주들 곁으로 돌아갔다.


일단 토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을 끝으로 군 기병대의 올림픽 참가는 끝났지만 

1952년 민간인 팀 결성을 도왔고 다른 기병장교들 역시 대표팀 선수들을 가르쳤다.

(윌리엄을 비롯한 기수들을 초빙한 것도 그다.)


아무튼 제니 캠프는 자마들과 목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8년 32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더이상 군 소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퇴역 군 장교들 및 대표팀 승마선수들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춰 장례를 치뤄주었다고 한다.


사후 제니 캠프는 종합마술 명예의 전당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그리고 현재 승마연맹의 한 부서는 제니 캠프의 이름을 붙혔고, 제니 캠프의 이름을 딴 제니 캠프 호스 트라이얼이 열리고 있다.

밝은 별이 남긴 빛은 잊혀지지 않고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다.










ps. 다른 기병장교들도 미국 대표팀의 감독 겸 코치같은 스태프로 전환했는데 존은 독일에게 별로 좋은 감정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1952년~68년까지 독일 선수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과 말을 섞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도쿄 올림픽때는 미국 대표팀에 라이너 클림케가 먼저 악수를 권했음에도 침을 뱉고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마이클 페이지와 윌리엄 스테인크라우스가 독일 팀을 칭찬하자 토미의 중재가 아녔으면 싸움으로 번질뻔 했다고 한다.


ps2. 아무튼 이들 기병장교들은 적어도 말이 다칠거 같다면 대회를 포기하는 것이 맞다고 선수들에게 조언했다. 그런데 이들의 조언이 무색하게 도쿄와 멕시코시티에서 부상 ㅈ까! 이러는 그래스호퍼와 스노우바운드가 나타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