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가 교태를 부린다. 그녀가 새참이라고 들고 온 탁주에 쌀밥과 김치를 먹으며 마을 남정네들은 좋다고 보고 있었다. 그들이 겸상이며 예법이며 툴툴대는 통에 예정은 아직도 논에 벼를 심고 있었다. 볏짚으로 만든 모자도 뜨거운 열기를 전부 막아줄 순 없었다. 줄줄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유쾌한 식사판을 흘겨보았다. 계집년이 고운 옷도 입고 애교를 부리는 것이 퍽 즐겁지만은 않다.
두레랍시고 마을 주민들 모아서 커다란 논을 채워가는 것은 괜찮았다. 곰보에 커다란 점까지 있는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것도 예정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예쁜 것만 믿는 선화가 일도 안 하고 탱자탱자 노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 남자들이 선화는 몸이 약하지요, 암요 쉬어야죠. 따위의 말들로 변호하는 것이 어찌나 아니꼽던지. 저놈의 계집애는 항상 살맛 나는구나, 라는 것이 마을 여자들의 공통된 한탄이었다.
"여자들 한 명만 와 봐!"
남자 중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 가면 남자들이 마음속으로 저 여우 같은 년이랑 비교할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도 선뜻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예정아 네가 가지 그래?"
저들끼리 눈치만 슬슬 보다가 결국 예정에게 손가락이 돌아갔다. 그래 이 년들아. 만만한 게 나구나. 예정이 불쑥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현덕 아저씨가 일렀다.
"을녀 할매가 전 부쳐놓는다고 아까 그랬는데 선화가 안 가지고 왔다. 네가 가서 좀 가져와다오."
밥 많이 줄 테니까 라는 뒷말까지는 들을 것도 없이 예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걸 본 누군가가 또 얼굴 펴라, 못생겨질라, 라고 말하며 속을 들들 볶았다. 예정은 어쩔 수 없이 "알았어요. 다녀오지요." 라고 말하고 길을 걸었다.
10분은 걸었을 것이다. 떠들썩한 마을 남정네들 소리도 잦아들었다. 발걸음을 한 걸음 뗄 때마다 설움을 하나씩 날려 보냈다. 그래도 뚱한 표정은 가실 곳 없었다. 자박자박 걷고 있던 그때 누가 예정을 불렀다.
"어디 가는 길이야?"
맞은 편에서 오는 규장이라는 남자가 예정에게 물었다. 예정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을년 할머니네 집에서 전 만든 거 가져가려고 왔어요.”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어르신들 안주인가 보지? 너무 많이 드시지 말라고 해라.”
“네. 근데 오라버니는 여긴 무슨 일로…?”
예정의 물음에 오라버니란 남자는 대충 얼버무렸다. 예정은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곧 인사를 하고 둘은 헤어졌다.
몸은 멀어졌지만, 예정의 머릿속엔 아직 규장이 남아있었다. 한숨을 쉬어도 떠나가지 않는다. 친절해 보이지만 또렷한 눈을 마주친 것이 계속 생각이 났다. 조각한 듯 반듯한 코와 입이 생각이 났다. 슬쩍 땀이 목덜미 밑으로 흐르는 것이 떠오른다. 저고리 사이로 숨어들어 간 그 땀이 싫지 않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붕 뜨는 것 같고 가슴이 요란해진다. 어느덧 그 안으로 상상이 미친다.
문득 모래 밟는 소리가 저벅저벅 나는 것이 들렸다.
예정은 자신의 뺨을 가렸다.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이람. 망측하기도 하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선화네 집이 보였다.
'고 계집애는 무슨 조화를 부려서 항상 그렇게 예쁘다냐?'
예정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 모두가 일을 나갔으니 당연하게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정이 안채의 문을 열었다. 거울과 조그만 상자 둘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스스럼없이 안에 들어가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연지와 색분이었다.
'이것들이 다 뭣이여?'
예정은 시장 장사치가 권했던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두 눈을 떼지 못하며 언젠가 봤던 그것들을 신기해했다. 조물조물 만지다가 누가 볼까 싶어 그것들을 얼른 챙겨나왔다.
'선화 고 년이 이런 걸 바르는 거라 이 말이지?'
을년 할매네서 전을 가지고 길을 내려가는 동안 예정은 품에 있는 화장품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이 선화를 이쁘게 만들어 준 것이구나. 누가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것만 없으면 선화 그년도 사실 별거 아닐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거짓된 사실을 무너뜨린 느낌이 들었다. 악령이라도 퇴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걸 바르면 예쁘게 보일 수 있는 거 아냐?’
선화만큼은 아니어도 보기 흉한 곰보 자국이라도 조금 가린다면 나도 예쁨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일 정도로 많은 무시 속에서 벗어나 조금은 대우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벌써 규장이 자신을 달리 보는 것을 떠올렸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쉬려고 해요.”
예정은 한창 식사 중인 곳에 도착해서 그 말부터 꺼냈다. 현덕은 물끄러미 예정을 훑어봤다.
"어디가 아파서 그런 것이야?"
"배가 아파서 그러지요."
현덕이 한숨을 쉬었다. "전 몇 개 집어먹고 체한 거 아냐?"
"뭘 집어 먹어요? 곧바로 왔구만."
"밥이라도 먹고 가지 그래?"
예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도저히 먹을 배가 아니에요. 내 몫은 딴 사람 주세요."
현덕이 안타까운 듯이 혀를 찼다. 평소에 군소리 않고 열심히 했던 예정이었기에 찝찝하면서도 믿어주기로 했다. 그래 알았다, 조심해라, 라며 짐짓 걱정하는 듯한 태도를 내비쳤다. 예정은 발걸음을 다시 집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판에 떠드는 소리가 다시 잦아들 만큼 멀리 떨어졌다. 예정은 괜히 뒤를 보며 따라오는 이가 있는지 살폈다.
집으로 돌아간 예정이 품에 있던 화장품들을 꺼내 보았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손에 연지를 묻혀 입술에 발라보았다.
'분은 얼마나 칠하면 되지?'
예정의 집엔 거울이 없었다. 고운 가루 적당량을 얼추 손끝에 묻혀 비벼보았다. 바르다 보니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손가락으로 가루를 조금 더 잡았다.
"에라 이 정도면 됐겠지."
예정은 불현듯 마음 한구석이 쿡쿡 걸린다는 걸 알았다. 꾀병을 부려 집에 갔고 화장품을 훔쳤다. 그걸로 얼굴을 칠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본래 예정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예정이 곧 상자들을 닫고 챙겨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로 덜어진 화장품을 꼭 품고 밖으로 밖으로 나갔다. 품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면서도 종종걸음으로 선화의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얼마 안 가서 도착한 예정은 선화네 안채 문을 열어젖혔다.
"에그머니나!"
이불 위에서 놀란 선화와 규장이 놀란 채로 옷을 벗고 있었다. 누가 뺏을세라 이불을 부여잡고 치부를 가린 그들을 본 예정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셋은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정은 화장품을 주지도 못하고 안채 문을 닫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뒤를 돌아 선화의 집을 나갔다. 머릿속이 텅 빈 채로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다.
"예정이 아녀?"
집 앞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왔던 을년 할매가 예정을 불렀다. 예정은 멍하니 할매를 바라보았다.
"아니 얼굴 꼴이 왜 그런다냐? 허여멀건 게 귀신인 줄 알았네."
할매는 물을 길은 두레박을 예정의 앞에 들이대었다. 그 안을 예정에게 보여줬다.
"이거 좀 봐라.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것이야?"
예정은 물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되었다. 입술은 주변까지 새빨갛고 얼굴은 허여멀건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 귀신같다는 할매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정이 울음을 터뜨렸다. 일찍 오기까지 해서 못 볼 걸 보다니. 남의 걸 훔쳐서 이런 얼굴이나 보여주다니. 몹시 안타깝고 서러웠다. 예정은 울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