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게 취미인 제임스는..

이라는 진부한 글로 인물을 표현하고 마인드 맵처럼 가지치기를 해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플룻을 만들어 이야기를 기승전결로 만들어라


라는 책을 덮은 채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나를 표현하려면 대충 창작동아리에서 하라는 창작은 안하고 멀뚱히 밖을 바라보는 의미 심장한 고등학생 정도로 표현할 것이다.


중2병이라고 나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멀리왔고 우등생이나 준수한 외모를 가진 등의 말로 표현하기에는 대척점에 위치했다.


열심히 소설이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대중적이면서도 독자들을 휘어 잡을 플롯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담당 선생님의 목에 선 핏줄은 파랗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앞에서 수다 떠는 여자 세명 그룹과


멀뚱이 딴짓하는 나 


그리고 수더분한 여자애 하나 이렇게 극과극인 성격들이 한 반에 있었다. 그나마 듣는 척이라도 하는 수더분한 여자애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시는 선생님이 애처롭다.


최근에 결혼 하셨다는데 아직도 팔팔하시다.

인터넷 보니까 신혼이면 남편이 죽어난다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역시나 인터넷을 다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만 확실해졌다.


강제로 가입한 이 동아리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은 망상 뿐인데 내 머릿속에 있는 망상들이 꽤나 저급하고 저렴한 것들이라 그런지 금새 동이나서 이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맥빠진 선생님이 나가자 이때를 노린 앞에 세명의 여자들은 금새 빠져나갔고 나와 수더분한 여자애만 남아서 느긋하게 짐을 싸고 있었다.


지금 집에 가면 아직 부모님 안오셨을테니... 딴짓을 하고 공부하는 척해도 티는 안날거라 생각이 들었다.


뻔한 클리셰처럼 그 수더분한 여자아이가 다가와서 이상한 중2병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구 저쩌구 하고는 서로에게 흥미를 갖는 그런 이야기는 존재할 수 가 없다.


수더분한 여자아이와 여드름 범벅에 덥수룩한 머리를 가진 나는 서로에게 악영향을 줄 것이 자명했으니까.


나는 내 위치를 중학교때 반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자애에게 고백한 뒤 공개처형을 당한 뒤로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보통 남자애들처럼 나 정도면 괜찮지라는 착각에서 못헤어나오기에는 그 때의 기억이 첫 고추냉이 경험보다 더 지독해서 말이다. 


저 수더분한 아이는 나 보다 사회적 위치가 더 높다. 내가 쳐다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다.


학교는 꽤나 잔인해서 이걸 어기면 그때처럼 나에게 강한 패널티를 주었다. 예를 들어 '쟤가 그 주제도 모르고 걔한테 고백한 애야?' 라던가 '으 더러워' 같은 것들.


이걸 학교 폭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른들은 꽤나 관대해서 쉬쉬하는 편이다. 애초에 부모님도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드라마에 나오는 부모들처럼 학교를 뒤집어 놨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속으로 삼키는 말이 많다 못해 넘치다보니 이제는 내 세상을 만들게 되었다. 혼자서 내뱉고 혼자서 망상하고 혼자서 관계를 구축하며 혼자서 세상을 내 방식대로 이해하려는 그런 것 말이다.


선생님의 말이 맞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내 세상을 창조해낸 사람이었다. 이 못생긴 외모와 여드름 그리고 낮은 성적, 작은 키등이 말이다.


이게 가끔 내가 만든 세계가 맞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내 세계인가 아니면 온전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해서 만든 것인가 모호했다. 이게 중학교 때 이후로 쌓여서 그런지 둘의 경계도 섞여서 엉망진창이었다.


가령, 반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만한 거리가 아니지만 지레 짐작해서 유추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걸 낮은 자존감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니 그냥 자기 방어기제라고 하고 싶다.


날 보호하기 위해서, 이미 보호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나마 뭐라도 막으려고 만든 내 세계처럼 말이다.


내 정신세계는 비좁고 작은데 내 물질세계도 비슷했다. 날 빛나게 해주었던 피아노는 먼지가 쌓여서 형의 문제집을 보관하는 자리가 되었고 내 피아노 상들은 어딘가 쳐박혀 있고 그 자리에는 형의 트로피와 빛나는 형의 모습만 있었다.


형의 흔적은 집안 곳곳에 있어서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었고 내가 겨우 얻어낸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는 내 물질세계 마저 침범했다.


이미 부모님은 형에 대한 기대가 크신 나머지 안방도 내어주시고 작은 집에 거실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주무셨다. 형은 넓은 안방을 형의 트로피로 가득 채웠고 이따금씩 스트레스를 풀러 내 방에 들어와 한 껏 스트레스를 풀고 나갔다.


이미 반항조차 할 수 없는 나는 으깨지고 망가져 구석에 쳐박혀있는 휴지보다 못했다.


형은 부모님보다 무서웠고 강했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목소리마저 훔치며 소리 마저 살기 위해 죽였다.


그런 형이 대학진학에 실패해서 강제로 해외로 유학 보내질때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셨지만 나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미친놈처럼 웃었고 결국 공항에서 주먹을 든 형이 내 얼굴을 평소처럼 으깨려고 했지만 나는 일그러진 이에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맞았고 그때도 어머니가 몸을 날려 잘못했다고 빌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저 웃음을 흐느낌으로 포장해 거짓으로 빌었다.


그래서 다행히 내 세상을 지켜냈다.


소중한 내 세상.


그 세상에서 형의 흔적을 열심히 지워냈고 애초에 내게 일말의 기대를 걸지 않았던 부모님은 내 지속된 거짓말과 낮은 성적을 걸고 넘어지지 않으셨다. 


그분들은 내 형에게 배신당한 기분에 찌들어 가실테니까.

나는 그걸 생각할때마다 웃음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웃음. 내 세상을 지켜냈다! 봤냐 이 개같은 것들아


집에 들어와 부모님이 야근으로 늦는 다는 걸 알고는 오랜만에 피아노의 먼지를 걷어냈다.


천천히 건반을 두들긴다. 


옆집에서 이내 벽을 두드리며 쾅쾅거렸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부모님도 형도 아무것도 없는 이 세계를 온전히 즐겨야하니까. 이 작은 15평 남짓한 집에서 다닥다닥 붙은 새터민이 거주하는 낙후된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평수로 사람을 재단하는 이 도시에서, 내 존재가 있는지 모르는 이 나라에서 지켜야할 것은


내 세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