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관하고 나서 첫 자대는 철원이였다.

흔히들 와수베가스로 부르는, 적어도 시가지의 모양 비슷한게 있는 곳이 아니라 구 철원이라고 부르는 곳.

사방을 둘러보면 논밭과 펜션밖에 없는 곳. 짜장면 한그릇 사먹기 위해서는 차를 타야 하는곳.


그곳에 있는 한 독립 기갑대대. 그것도 독립 중대가 내 첫 자대였다.


첫 지휘실습 날, 시외버스 터미널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나와 내 동기들을 태운 건 미니버스.

카운티라고 흔히들 부르던 25인승 미니버스였다.


무미건조하게 타라는 선탑자 중위 말 한마디에 우르르 몰려탄 넷의 다이아몬드들은 서스펜션이 나갔나 끊임없이 의심될 정도로 미친듯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얼어붙은 채 말 한마디 없이 각자의 의류대를 껴안고 그렇게 부대로 흘러들어갔다.


셋 중 하나는, 대대의 인사과장. 둘은 대대와 함께있는 각 중대의 소대장.

나만이 유일하게 독립중대.

다 함께 대대에 내려 대대장에게 지휘실습 신고를 하고 나자, 어느 새인가 선탑자 중위가 다가와 연병장 한 가운데의 버스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너 때문에 내가 거기까지 가야하냐는 선탑자의 짜증섞인 핀잔과 불평이 끝나갈 무렵에, 창문 너머로 경고간판들이 드문 드문 박힌 인삼천 울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출입자 확인과 의지없는 경례소리를 뒤로하고 위병소 입구에서 미니버스는 나를 내려주고 그대로 사라졌다.

오갈곳 없이 잠시 가만히 있는 나. 그리고 그걸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위병.

그렇게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 있는 하얀 1층 막사에서 허둥지둥 하사 한명이 뛰어나왔다.


어서 들어오시라는 말과 함께 행정반에 들어가자, 행정보급관과 함께 빤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있던 중위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내리며 행정반 구석, 중대장실이라고 쓰인 문을 가리켰다.

중대장실을 열고 들어가자 중대장이 어깨를 구부리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의자를 죽 밀고 일어나 나를 기쁜 목소리로 맞이했다.

와서 반갑다. 일주일간 잘 지내보자.

그러고는 행정반으로 나와 어느새인가 모인 중대 간부들을 소개시켜줬다.

이쪽은 행정보급관. 이쪽은 3소대장. 너 오기 직전에 전역할거야. 이쪽은 단차장...

그렇게 소개가 끝나고 앞으로 있을 일주일간의 지휘실습 동안 지켜야 할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었다.

애들한테 먹히지 마라. 부사관들한테 예의 갖춰라. 차장들 따라다니면서 전차 배워라...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마디 하고 다시 중대장실로 들어갔다.

나중에 훈련나가면 조심해야할게 있긴 한데 그때 말해주겠다.


그 다음 일주일은 평범했다. 얼추 기갑학교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기초적인 차량 정비나 운행에 대한 부분은 그렇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몰 전차가 K-1이 아니라 M48전차라는것만 제외하면.

그렇게 일주일간 털털거리는 전차의 엔진오일도 찍어보고, 유류도 채워보고, 탄도 날라보고, 궤도도 정비해보고.

그러고 마지막 가는 날, 나를 처음 맞이해주며 친해진 3호차 전차장의 배웅을 맞으며 지휘실습 첫날 마주했던 선탑자 중위의 미니버스를 타고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갔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2개월간 더 계속된 교육을 마치고 짧은 휴가를 지나 나는 다시 세명의 동기들과 함께 와수 시외버스터미널에 서 있었다. 부릉거리는 시외버스가 차고지로 들어가고 나자, 우리는 사전에 대대 군기강담당관에게 연락받은 대로 택시를 타고 대대로 향했다.

뒤에 탄 세명의 동기가 대대에 내리고 난 후로도, 한참을 더 빙글빙글 돌아 가자 2개월 전의 모습 그대로인 부대가 눈 앞에 보였다.


부대 앞에 내려준 택시기사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위병소를 지나자 저번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번에는 어깨에 두줄 당직사관 완장을 찬 3호차 전차장이 손을 흔들며 막사에서 나오는게 보였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3호차 전차장의 안내를 받아 독신자 숙소에 들어서자 반쯤 기울어진 천장과 세탁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인 바닥이 보였다.

제일 끝쪽 방문을 가리키며, 3호차 전차장은 씨익 웃어보였다.


낑낑거리며 방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한껏 올라왔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방바닥. 그리고 낡은 2층침대.

대강 방을 치우며 짐을 정리하고 있자, 하나, 둘. 독신자숙소의 거주민들이 나타나 말을 걸며 도와주기 시작했다.

소댐. 여기 그래도 전에 살던 3소대장이 좀 깨끗하게 치우고 가긴 했습니다. 저번에는 좀 무뚝뚝하게 굴었어도 좋은 사람입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냉장고 안은 성에가 녹으면서 생긴 물 하나 없이 깨끗했고 서랍장 안은 그마저도 걸레질 한듯 살짝 올라앉은 먼지 말고는 얼룩 하나 없었다.

신발장을 열자 낡았지만, 아직은 쓸만한 삼선슬리퍼 하나와 구두약 새 것 몇개, 그리고 새 솔이 들어가있었다.


여름의 매미가 울창하게 울고 낙엽이 흘러가는 시간 만큼, 자대에서의 내 생활도 빠르게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 식당에서 밥 먹고, 출근하고. 점심먹고, 애들과 공차고. 그리고 저녁먹고, 들어가고.

내리는 비로 유격조차 취소되고 독립중대라 잊혀졌는지 훈련도 겨우 두어번.

이게 내 반년동안의 생활이였다.


그리고 어느 눈내리던 날. 아니, 진눈깨비 내리던 1월.

3사출신의 중대장은 어느때처럼 아침에 출근해 담배를 뻑뻑 피우다가 들어와 중대의 모든 간부를 생활관 끝에 있는 북카페로 불러모았다. 모두가 모이고 나자, 중대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우리 혹한기 훈련 나간다. 진지 점령하면 돼.

혹시 미군진지 말씀하시는겁니까?

행정보급관이 얼굴을 살짝 이그러트리면서 말했다.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이 길게 탄식을 내뱉었고, 10년차 중사는 욕설까지 내뱉었다.


영문을 모른 채 있는 나의 어깨에 중대장은 손을 탁 얹고는 1소대장한테 설명 좀 해줘. 한마디 하고 북카페 밖으로 나갔다. 

다른 간부들과 함께, 2소대장의 따라오는 손짓과 함께 중대 흡연장으로 나가자 2소대장이 담배 갑을 내밀었다.

선배님. 저 담배 안 피우시는거 알지 않습니까.

알아. 그냥 혼자 피우긴 좀 그래서 그랬지.

내 거절에 2소대장은 살짝 변명하며 담뱃갑을 다시 물렀다. 그러고는 한 개피 뽑아 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뭉쳐진 하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다가 바람에 휩쓸려 내쪽으로 날아왔다. 매캐한 담배연기에 켈록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멋쩍은 표정으로 2소대장은 담배연기를 휘휘 저어 흩어냈다.

우리 훈련가면 점령하는 곳이 있어. 원래 안쓰는 곳인데, 훈련때만 가서 점령해. 거길 미군진지라고 불러.

근데 왜 다들 싫어하시는 겁니까?


2소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피우던 담배를 흡연통에 비벼 끄고는 다음 담배를 꺼내들었다. 두번째 개피가 반쯤 타들어가고 나서야 2소대장은 입을 열었다.

거기 가면 이상한 소리가 나거든.

고라니 소리입니까?

고라니 아니야. 그 소리, 절대로 따라가지마. 절대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2소대장이 어떤 소리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마지막 담배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나자 2소대장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내 말 기억해. 절대로 소리. 그 소리 따라가면 안돼.


훈련 준비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동안 별 일 없던 탓인지, 기동이 안돼는 전차도 없었고, 기름이 부족한 차도 없었다.

행보관의 금방 따라가겠다는 말과 위병의 경례를 뒤로 한 채, 나는 6개월만에 전차를 타고 처음으로 부대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전차장 해치 위에서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달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는 도로 끝 옆으로 반쯤 녹슬고 무너져가는 위병소를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들어갔던 차량의 탄약수와 포수의 유도를 받아서 우리는 주둔지로 들어갔다.

차량을 차량호에 유도하고, 반쯤 무너지고 녹슨 위병소에 초병을 몇 뽑아 투입시키고 나자, 두돈반을 끌고 행정보급관이 군장과 함께 덜덜거리며 나타났다.

식사는 추진이랍니다. 차라리 현물로 주지.

행정보급관은 두돈반 위에서 나에게 그렇게 불만을 토해내고 주둔지의 한 가운데에 틀어박힌 막사로 두돈반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행보관을 뒤로한 채, 우리는 해야할 일들을 했다. 전차를 다시 점검하고, 울타리를 한바퀴 돌았다.

그렇게 울타리를 돌다가 이름모를 고지쪽 아래를 빙글 도는 울타리를 점검하기 위해 나서려 할 때, 나는 다른 간부들이 이제 주둔지로 되돌아가려는 것을 보았다.

이쪽은 안가십니까?

아. 안가도 돼. 아니다. 가지 마. 절대 가지 마.

훈련 출발하기 전과 똑같은 반응이였다. 2소대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10년차 유 중사와 함께 주둔지로 발걸음을 질질 옮겼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하는 생각에 다시 울타리 쪽으로 발을 떼려는 순간, 3호차장이 내 어깨를 당기며 말했다.

저기 가면 안되는 곳입니다. 돌아갑시다.

3호차장의 완고한 표정과 어깨를 당기는 강한 힘 탓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끌려 주둔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끝없는 대기가 지나고 달과 별이 높게 뜨고, 잘 시간이 다가워져 왔다. 행보관이 구막사 한켠에 따로 커튼을 쳐 마련해준 간부들의 공간에서 나는 첫 야외훈련에 오지 않는 잠을 얘써 자려 노력하다가 결국 일어나 행정반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행정반에는 네 명의 병사와 한명의 간부가 있었다. 2소대장.

나는 2소대장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책상 위에 널부러진 근무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23시 30분.

내 눈앞에 있는 네 명의 병사 중 두명은 지금 여기 있으면 안되었다. 근무표에는 분명 22시부터 24시까지 2-5초소 근무를 투입하게 되어 있는 인원들이였다.

너희 왜 여기있어?

됐어. 원래 2-5초소는 근무투입 안해. 그거 누구 보여주기 식으로 짜놓은거야.

내 질문에 2소대장이 대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는 무의미한 대답밖에 나는 할 것이 없었다. 나는 남는 의자를 찾아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첫날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훈련은 셋째날 오전이 되어야 끝날 테니, 이 밤이 지나고서도 한 밤을 더 지내야만 했다.


담배 한대 피고올게. 전화만 잘 받아.

2소대장은 전술전화기를 가리키고는 행정반에 모여있던 병사 넷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홀로 행정반을 지키며 나는 살짝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걱정했던 훈련은 별 것 아니였다.

그저 버려진 주둔지 하나를 점령하고 이틀 밤을 지새우는 것. 그마저도 이제 1/3이 지나가고 있었다.

엉덩이를 빼고 의자 위에 기대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 새벽부터 쌓여온 피로가 스멀스멀 몰려드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나자 마치 의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였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나는 밑으로 주욱 꺼져 내려갔다.

그렇게 의식의 몽롱함 속으로 젖어들어가고 있을 즈음에 멀리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테---리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 끌어올려진 목소리와 같은 절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테---리---리


알 수 없는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밖에는 어느샌가 약한 눈이 살포시 내리고 있었다. 갈길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날 보고, 2소대장이 흡연장에서 나를 크게 불렀다.

1소대장! 이쪽으로 와.

2소대장의 말에 흡연장으로 가는 동안,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는 귀신같이 들리지 않았다.

행정반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뭔데.

테...뭐 그런 소리였습니다.

2소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가 말했지? 그 소리 절대로 따라가지마. 2-5초소쪽으로는 더더욱 가지 말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행정반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2소대장을 따라 들어간 후에 물을 한잔 마시고는 간부 공간으로 돌아와 침낭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방금 들었던 이상한 소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말짱한 정신으로 마치 어제 겪었던 이상한 일이 없던 일인 것 마냥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식사추진을 다녀오는 보급관 말고는 그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도 밖으로 나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차가 혹시나 고장이 났나, 엔진오일을 찍어보고 시동을 걸어보고 내려오는 게 훈련 일과의 끝이였다. 

그렇게 또 낮이, 저녁이, 해가 지나고 밤이 왔다.

밤에 달은 뜨지 않았다.

희미한 별빛조차 구름에 가려진 날이였다.

전날부터 오던 눈은 반쯤 녹아 진눈깨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제설 걱정은 없겠네.

같이 행정반에 앉아있던 3호차 차장이 말했다. 나는 씩 웃으며 그에 동조했다.

들어가십쇼. 제가 있겠습니다.

됐어. 오늘은 내가 있을게. 어차피 전화도 안오더만 하루종일. 내일 보급관 도와서 할 일도 많잖아.

내 말에 3호차 차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몇번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는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3호차 차장이 가자 낡은 행정반은 조용해졌다. 행정반에 오가는 불침번들, 그리고 2-5초소 경계병들이 오가며 내는 발걸음 소리를 제외하고는 낡아빠진 라디에이터가 내는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행정반을 채우고 있을 뿐이였다.

한 것은 없었지만 밤이 깊어져오자 졸음이 오는건 참을 수 없었다. 한시. 두시. 그렇게 초침이 흘러가는걸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눈을 떴다.

시게는 새벽 두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엇때문에 눈을 떴는지 휘휘 둘러보는 내 시야에는 오직 의자에 앉아 졸고있는 네명의 병사들과 딱딱거리는 라디에이터만 보일 뿐이였다.


테켈----리


병사들을 깨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고 잠시 눈을 감자마자 어제 들려왔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눈이 벌쩍 뜨여졌다.


테--리-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병사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테켈-리---


소리는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병사를 깨우는 걸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달없는 밤은 그 무엇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


테켈리----


나는 그 소리를 좆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것만 같았다. 자다 깨서인지, 아니면 소리에 말려들은건지.

그 때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소리를 좆아 간 곳은 2소대장이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2-5초소였다. 구멍뚫린 모래사대와 찢어진 인삼천으로 세워진 초소에는 2-5라고 적힌 갈색-한떄는 하얬을 팻말만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거기서 들려오는 게 아니였다.

나는 초소를 지나 울타리쪽으로 향했다. 최소, 지난 몇년간 그 누구도 오지 않았을 울타리에는 사람이 허리를 굽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테켈리---리


왜 그 개구멍을 내가 지났는지는 모르곘다. 하지만 철조망을 비집고 들어가자 눈 앞에는 희미한, 풀이 자라 없어졌지만 나무들 틈으로 흔적만 남아있는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는 순간, 차가운 진눈깨비의 물방울이 내 눈썹위를 타고 볼을 흐른 순간, 나는 그제서야 2소대장의 경고가 떠올랐다.


소리를 절대 따라가지마.

하지만 이미 따라와버렸는 걸.

여기까지 온 이상, 소리의 원인이라도 확인해봐야만 했다. 나는 허리까지 자란 풀숲을 헤치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내가 정신이 든 다음부터, 소리는 묘하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기억하는게 아니라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올라가 진눈깨비가 눈이 되어 내 견장에 쌓이고 내쉬던 숨은 하얀 연기로 턱 끝에 매달려갈 때, 드디어 눈 앞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하얀 진눈깨비로 덮인, 그리고 그 밑에 초록 이끼가 낀 콘크리트 건물이였다. 이미 세월의 흐름에 맡겨 이곳 저곳이 부스러져 떨어져있는 건물이였다. 1층 건물. 그 건물 앞에 서자, 다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테켈리-리


이번에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였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테켈리-리


나는 곧장 들어가는 대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건물을 쳐다보았다. 건물은 커다란 암반에 박혀있듯이 세워져 있었다. 거대한 바위를 콘크리트가 지지하는 형상으로, 길다란 직사각형의 틀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을 켰다. 핸드폰의 배터리는 15퍼센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핸드폰의 전등이 밝혀주는 빛을 따라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들려오는 소리는 지하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테켈리-리


소리가 들려오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나는 축축한 벽을 짚어가며 손전등의 불빛에만 의존한 채 계속 걸어내려갔다.


테켈리- 리


그렇게 걸어내려간 끝에는 길고, 좁다란 복도가 있었다. 그 좁은 복도 끝으로는 철창이 있었다. 크고 깊어, 휴대폰의 손전등 정도로는 그 안이 보이지 않는 철창이.

소리는 그 철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테켈리-리


나는 철창으로 다가갔다. 철창에는 온통 쇠사슬이 감겨있었다. 그리고 문이 없었다.

무언가를 영원히 가둬놓기 위한 것마냥.


테켈리-리


소리가 이번엔 코 앞에서 들려왔다. 마치 철창 바로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휴대폰의 손전등은 그 무엇도 비추지 못했다.


테켈리-리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곧바로 뒷걸음질 쳤다. 저 너머에는 내 이해 밖을 벗어난 게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따라올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테켈리-리


저건 인간의 소리가.

아니, 우리가 알고있는 것의 소리가 아니였다.


테켈리-리


이번에는 소리가 폭풍우같이 몰아쳤다. 느닷없이 크게 울려들어오는 소리에 나는 놀라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핸드폰을 다시 주워들었을 때에는 손전등이 꺼진 후였다. 핸드폰의 화면에는 배터리 부족이라는 글씨와 함께 5퍼센트만 남은 배터리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핸드폰 화면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의존해 더듬거리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 들어온건 실수였다.


테켈리-리


저런 소리를 듣고 이런 지하까지 내려올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아니.

저런 소리를 듣고 울타리 밖 개구멍을 지나올 생각을 한 것이, 아니.

처음에 저런 소리를 듣고 행정반을 나와 따라온 것 자체가 실수였다.


테켈리-리


비틀거리며 좁은 복도를 지나오다가 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틈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행히도 벽에 돌출되어있는 무언가를 잡을 수 있었다.

돌출되어있는 무언가를 잡고 몸을 일으킨 순간, 그 무언가가 내 몸무게에 밀려 밑으로 내려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무엇을 잡아당겼는지 알 수 있었다.

손잡이. 무엇의?


끼이익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철창을 감았던 사슬이 풀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철창이 들어올려지는 소리였다.


희미한 빛이 뒤에서부터 나와 내 앞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건드렸는지 알 수 있었다.

철창을 여는 손잡이를.


테켈리-리


하지만 나는 내 뒤에서 울부짖는-소리치는-비명지르는 저 생물체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저 스멀거리고, 끈적하고, 끓어오르는 거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볼 수 조차 없었으니까.


테켈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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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는 좀 짧게 쓰도록 노력해볼게요.

모티브는 크툴루신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