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능>


오늘, 당신을 닮은 분을 하나 보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닮을 리가 없는 것을.



*




유배 생활도 벌써 몇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과의 나날을 아직 가슴에 품은 가운데,

저는 충실히 저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일은 몸이 힘들지는 않습니다.

체력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거든요.

저 같은 아녀자도 문제없이 해낼 정도죠.

문제가 되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정신만큼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거든요.


오늘도 당신이 죽더군요.

137번째입니다.

이곳은 모든 것이 너무도 잘 보여요.

당신의 생로병사 모든 것이 보여요.

심지어는 밤 중에 변소를 가는 일도 전부 적나라하게 보이죠.


아내에게 하루 종일 감시 당하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후후.

제가 아는 당신이라면 부끄럽다면서 손을 내저었을 거 같군요.

부부간에도 도리가 있다면서.

보여도 되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면서.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죠.

겉으론 냉철하면서도 자주 부끄러움에 귀를 붉히는.

그 순박한 모습이 은근히 또 설렜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죠.

그래요.

그랬죠.

그랬었죠...

그랬... 었죠...





200번째네요.

오늘이 딱 200번째 당신의 탄생입니다.

오늘로 200번째 환생이시라고요.


그러니까, 당신은 처음 죽은 후로 200번이나 환생을 하신 거죠.

... 아니, 저랑 처음 만난 때는 빼야하니 199번째인가요?

모르겠네요. 숫자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숫자에 강한 건 당신이었는데.


당신 생전 둘이서 장사하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제가 호객을 하고, 당신이 계산을 하고.


이제 와 하는 이야기지만, 당신 계산 한번 똑부러지더군요.

기대수익이 어쩌고할 때는 솔직히 저는 못 알아들었거든요.

그래도 눈을 빛내는 당신을 보니 차마 모른다 말할 수가 없더군요.

참 즐거웠었는데.

한데...


한데 숫자엔 그렇게 강하시면서

어째서 사람 마음은 그리 모르시던 건가요.


제 자식을 죽이게 하고 싶은 아비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적당히 겁만 주라는 의미였던 것을 어찌 모르셨습니까.

그것만 아니었으면 저나 당신이나 지금처럼...

... 이런, 손이 놀 뻔 했군요.

이럼 안 되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이 떨어지니까요.

다음에 다시 편지 하겠습니다.

어차피 닿지도 않을 편지겠지만.

안녕.





254번째 당신의 탄생이네요.

이제서야 기분이 풀어졌습니다.

물론 아직 전부 풀린 것은 아닙니다.


무슨 환생을 50번이나 할 동안 삐쳐있냐고요?

어쩌겠어요 제 성미가 원래 이런데.

당신이 고른 색시에요. 악으로 깡으로 버티세요.


각설하고 마음을 누그러 뜨렸으니 저번에 쓰다만 이야기나 하려고 합니다.

뭐였더라... 일 이야기였나요?

말이 편지지, 혼자만 주절거리고 마는 혼잣말이니 기억이 두리뭉실하네요.

그래요 일 이야기 였을 거에요. 틀림없어요.


당신 떡 좋아하셨죠.

이곳에서의 일은 당신이 들으면 썩 기뻐할 만한 일입니다.

떡을 찧는 일이에요.


떡방아를 찧으면서 손이 놀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게 일의 전부에요.

끝.

간단하죠?

그외에는 자유입니다.

춤을 추면서 해도 되고, 술을 먹으면서 해도 됩니다.

어찌 보면 당신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에게 더 어울릴 만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이게 말이 쉬워서 그렇지, 생각보다 유혹이 많아요.

애초에 제가 있는 이곳에선 당신의 반평생이 보인단 말이에요?

한데 당신을 보면서도 저는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하거든요.


어린 당신의 귀여운 모습도, 건장한 당신의 늠름한 모습도, 늙은 당신의 지혜로운 모습도

그 어떤 것을 보아도 흔들림없이 떡방아를 찧어야 한다는 거죠.

조금이라도 박자가 흔들리면 떡 맛이 별로라면서 혼나거든요.

저는 눈으로는 당신을 좇으면서도 손으론 바지런히 일해야 하는 거랍니다.

당신에게 손을 뻗는 것이나, 하다못해 속앓이를 하는 것조차 힘든 거죠.

가혹하죠?


이게 달나라에서의 일이랍니다.

아차, 말해버렸네요. 옥황상제님한테 말하지 말라고 들었는데.

... 뭐,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거니까 괜찮겠지요.


앗, 주무시려고요?

하긴 피곤하실 만도 하죠. 이번 생의 당신은 아직 어린 몸이니까요.

잘자요. 좋은 꿈 꾸시고.

저는 이곳, 달나라에서 떡이나 계속 만들렵니다.





289번째 당신의 성인식이 보이네요.

제가 달로 유배와서 떡 찧은 지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습니다.

당신이 천벌받고 죽은 지도 이렇게나 시간이 지난 거죠.

거꾸로 당신의 환생을 봐 온 지도 이렇게 시간이 오래 지난 거고요.


요새 점점 편지를 쓰는 주기가 짧아지는 것 같네요.

이해하세요. 이곳은 심심하고 지루합니다.

주위에는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가 전부거든요.


가끔 서왕모라는 분이 왔다가곤 하지만 그뿐이에요.

정말 마음이 놓이거나 하는 누군가는 없거든요.


맞다, 어젯밤에는 비가 왔더군요.

그것도 지독히.

당신, 비 올 것도 모르고 나들이를 갔었죠?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가는 모습 너무 안타까웠어요.

오들오들 떨다가 결국 오늘 아침에는 몸살까지 났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사흘 전에 달무리를 보여줬잖아요.

왜 비가 온다는 제 말을 안 들은 거에요.

설마 저의 은밀한 신호를 못 알아들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달무리가 보이면 비가 내린다. 아예 속담으로 유명하지 않던가요.


돌이켜보면 예전부터 그랬네요.

예전부터 제 말이라곤 죽어라 안 듣더니, 환생을 몇번을 해도 그 성격만큼은 못 고치시는군요.

'그날' 도 저는 분명히 함께하고 싶다고 은연 중에 뜻을 내비쳤는데

당신은 그 몹쓸 고집으로 저를 속이셨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품고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만 남고도 정말로 행복해 하실 거라고 믿으신 건가요?

당신은 정녕 그렇게 생각하신 건가요?

'그날',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내일은 330번째 당신의 과거시험이네요.

요 며칠, 밤 중에 당신이 연습하시는 걸 봤습니다.

활쏘기 실력은 역시 일품이시더군요.

신궁이라고 불린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단하셨습니다.


오늘따라 옛날 생각이 나네요.

당신의 궁술 솜씨는 이미 천계에도 명성이 자자했었죠.

인간계를 구할 신으로 당신이 선택된 것도 그런 명목이었고요.

... 아니면 단순히 미운 털이 많이 박혀서 그런 것 뿐이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인간계에 가서 수행해야 했던 그 임무는 파탄이 예정되어 있던 길이었으니까.


"본래 인간계의 태양을 열이나 둔 것은 수고로운 그들의 노고를 염려해 행한 조치였거늘

지금은 짓궂게도 열 태양이 다 같이 떠올랐다가 지기를 반복하니 인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허니 궁신 예와 그 아내 항아는 지상에 내려가서 열 태양 가운데 하나를 남긴 아홉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려라."


... 분명 이런 내용이었죠.

저 아직 연기 잘하지 않나요?

방금 건 옥황상제님 연기였는데.

나름 자신작이랍니다.


여하간 당신은 고개만 한번 까딱하곤 그 길로 인간계로 내려갔죠.

쏘려면 인간계에서 쏘는 게 맞다면서.


별 힘도 안 들이고 떨어뜨리시더군요.

시위만 몇번 당기더니 끝났다고 내려가자 하고.

해라는 게 이렇게 허접했나 싶었답니다.

물론 당신이 한 것이기에 그렇게 보인 것 뿐이었겠지만요.


그 며칠 후 였을까요?

옥황상제님께서 노발대발하셨죠.

쏘란다고 진짜로 쏘는 바보가 어디 있냐며.

당연하죠. 당신이 쏴죽인 9개 태양은 전부 옥황상제님의 아들들이었는데.

제 자식을 죽이고 싶어하는 바보가 어디 있을라고요.

겁만 주라는 뜻이었겠죠.


그 길로 우린 인간계로 추방당했죠.

우린 그때부터 장사를 했었고요.

힘든 시기이긴 했지만 그때가 그리워요. 그리워져요.

당신은 내 곁에 있었고, 나는 당신 곁에 있었으니까.


지금처럼 기댈 곳도 없고

울 곳도 없을 때야말로.

그리워요.





359번째 당신의 죽음이 보입니다.

또 홀몸으로 사셨더군요.

환생한 당신은 저 같은 건 기억도 못하면서 무엇을 그렇게 그리워하며 홀몸으로 사는 건가요.

저는 신이고 당신은 인간입니다. 다신 만날 수 없어요.

그냥 그럴 듯한 배우자 하나 잡으세요.

당신의 행복이 저의 행복입니다.

괜히 고집 부리다가 이번에도 고독사하신 것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바라볼 때면 그게 어떤 순간이라도 행복해요. 낯부끄러운 장면을 봐도, 남부끄러운 장면을 봐도.

하지만 고독하게 쓸쓸히 죽는 순간만큼은 봐 줄 수가 없어요.

제발 쓸데없는 고집 좀 꺾으세요. 죽을 때 눈이라도 누군가 감겨줘야 할 것이 아닌가요.

제발.

제발...





390번째 당신의 죽음이 보이네요.

항상 후회했어요.

그때 적어도 제 뜻을 먼저 표현했다면 얘기가 조금 달랐을까.

그러다 최근에 깨달았네요.

당신은 제 마음을 짐작하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구나.

정녕 제가 슬퍼할 것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저질렀구나.

정말 나쁜 분이셨구나.


적어도 둘이 함께 하는 그 길을 택했더라면

조금 험난하더라도 같이 먹고 같이 마시고 할 수 있었을텐데요.

잔인한 분이시네요.

정말 잔인한 분이시네요.





430번째 당신의 과거 시험이 보입니다.

과거 시험 돌아가는 길에 만난 그 사람, 평범한 노인은 아니니 조심하세요.

... 아이 참!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그 노인, 도사에요. 최근에 제자를 들일까 고민하고 있던.

도술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요. 당신은 안 가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군요 기어이 따라가시는군요.


뭐 지금 생각해보니 아예 도사를 따라 신선이 되는 길을 물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하급이라도 되기만 하면 영생을 노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당신의 외로운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겠네요.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적의 이야기지만요.





벌써 80년째 수련 중이시네요.

그 동안 당신은 하나도 안 늙은 것은 보면 그 도사, 교육 하나는 똑부러지는 것 같네요.

반 정도는 선인의 경지에 이른 셈이니.


도사하니 하는 얘기지만 요새 들어 그 도사가 자주 떠오르더군요.

그 왜 있잖아요. 지금 당신을 가르치시는 스승님 말고 그...

당신이 해를 쏘아떨군 후에, 둘이 함께 천계에서 파직당하고 인간계에서 살 때 말이에요.

나름 인간계로 떨어져 버렸다고는 해도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그런 저희에게 찾아온 도사가 있었죠.

그 밉상스러운 도사 말이에요. 기억 나시나요?

단약 두 개를 내밀어주던 도사.


단약 한알 먹으면 불로장생이요 두알 먹으면 신이 되어 천계로 날아간다면서 저희에게 팔았죠.

딱 두알짜리 단약, 둘이서 하나씩 먹으면 딱 들어맞는 숫자.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사기치지 말라며 소금을 뿌렸겠지만 어쩐지 그 영험함은 무시할 수가 없었죠.


그 날 밤에

온갖 아양을 다 떨었던 것 같네요.

조금은 부끄러운 아양부터 많이 부끄러운 아양까지.

아마 당신도 눈치챘겠지요.

제가 뭘 말하고 싶은지 눈치챘겠지요.


그야 굳이 지아비를 놔두고 혼자서만 천계에 올라가 편하게 살고 싶을 여자는 없을 테니까요.

몰랐을 리가 없죠.


한데...

한데 어찌 자는 사이에 그런 짓을 하셨는지요...

당신과 함께 평생을 살겠다는 여인네의 꿈은 박살을 내시고

혼자만 폼을 잡으셨는지요.

그런다고 고마워할 리가 없지 않나요.

다 잊고 새로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턱이 없지 않나요.


두고 보세요.

당신이 언젠가 승천해서 환생체가 이곳에 올 때까지

저도 악으로 깡으로 버틸테니까.


어차피 지금도 고지가 멀지는 않은 것 같으니 기대 좀 해도 되겠지요.





전번의 편지 아닌 편지에서 벌써 200년이 지났군요.

기어코 승천해 신이 되었다는 소문 들었습니다.

서왕모님께 꼬치꼬치 캐물었죠.


천계 수군 대장이라. 높이도 올라가셨더군요.

원체 물을 무서워하던 당신인데 걱정부터 들더군요.

뱃멀미나 안할지, 부하들이 놀리지나 않을지.


그래도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기쁨이었습니다.

정말 기뻤거든요.

당신과 다시 손을 맞잡을 수 있고 다시 얼굴을 마주볼 수 있다니.

이전처럼 당신을 나지막히 불러도 메아리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니.


그 다음은 기대였습니다.

제일 먼저 뭘 할까. 맛난 거라도 먹을까?

옥황상제님도 슬슬 휴가 보내주신댔으니까 길게 여행을 갈까?

아니면 오랜만에 아내의 손맛이란 걸 좀 발휘해볼까?

이 콩닥이는 가슴이란 게 인간 시절 당신과 살던 때를 연상케 하더군요.


그러나 세상만사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안 된다더군요.

안 된다 하시더군요.


밖을 나도는 것도 허락하고

일을 쉬는 것도 허락해 주겠지만

당신과 만나는 것 만큼은 안 된다시더군요.


그렇죠.

잊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고 벌이었죠.


그때 당신이 해를 쏘아 죽일 때 거들었던 벌.

그후에 환생으로 죄를 씻지도 않은 벌.

당신을 놔두고 저 홀로 신이 돼 천계에 올라온 벌.

그랬는데 당신과 만나는 일이 허락될 리가 없죠.


안된다 하신 것은 옥황상제님인데

서왕모님은 단지 정보전달만 해주셨을 뿐인데

저는 서왕모님의 치맛자락을 잡고 온갖 추태를 다 부리고 말았습니다.


바닥을 기며서 눈물이란 눈물은 다 흘렸던 거 같네요.


결국 서왕모님도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구시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때에서야 겨우 상황이 이해됐고요.


저는 여기에서, 달에서 영원히 떡만 찧어야 하는 운명.

그런 운명.

그런 벌.


그러니 만나는 것은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 괜찮아요. 벌써 몇백 년이나 혼자서 살아왔는걸요.

지금까지랑 똑같은 생활이 다시 이어질 뿐이에요.

무언가 새로운 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니까 안녕.

안녕. 잘 지내요.

안녕.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