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에서 빨간 머리는 흔치 않았다.

너의 머리는 타는 노을처럼 붉었다.


어릴 적, 우리는 사람간의 다툼이란 것을 마냥 남얘기로만 생각 할 정도로 사이좋게 지냈다고 나는 기억한다. 너야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 우리가 심하게 다툰 적은 없었다. 그런 순수함 때문인지 우리는 어른들이 말하는 전쟁도 그저 그들이 하는 이해하지 못할 말 중 하나로 생각했다. 가끔 식탁에서 너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가 그런 어려운 말들로 흥분하면서도 교양있게 언쟁하실때면, 우리는 디저트만 빨리 먹어치우고 집을 나서서 언덕에 올라 하늘을 구경했던 것도 내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너는 늘 하늘이 잘 보이는 잔디밭에 누워 내게 재잘거렸고 나는 햇볕이 따가워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대고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몰랐지만 그것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순수함을 유지시켜준 우리의 부모님에게 나는 아직까지도 감사함을 느낀다만, 그 감정에는 약간의 원망도 섞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순수했다.


너는 피어오르는 구름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을 관찰하거나 하지 않았다. 너는 하늘을 보며 내게 멀리서 비행기소리가 들린다고, 은색이랑 붉은색 비행기가 보인다고, 서로 다가가고 있다고, 둘이 뒤엉키기 시작했고 비행운이 멋지다고 말했다. 함께 추는 긴 왈츠와 같은 공중전 끝에 기어코 펼쳐지고야 마는 낙하산조차, 검은 연기를 내며 추락하다 낙하산을 뱉어내고 붉게 타오르는 비행기조차 우리 눈에는 마냥 아름답게만 보였나보다. 그러나, 너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너와 내가 비로소 죽음이란 것을 오감으로 인지한 이후부터 나는 싸움의 결과가 나기 전에 너를 데리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럴 때 마다 너는 영문도 모른채 툴툴댔지만 나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너는 하늘에서 얽히는 비행운을 사랑했다. 네가 붉은색 비행기를 응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아마 머리색깔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믿고있다. 나도 붉은색을 응원했다. 그것도 너의 머리색 때문이었다. 나는 공중전을 보면서 즐겁다거나 멋있다거나 하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네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같이 우리는 언덕을 올랐다. 영원했으면 싶은 나날이었다.


언젠가, 아마 중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으리라. 내가 아버지를 따라 숙부님을 뵈러 갔다 저녁 늦게 돌아온 날. 거의 처음으로 너와 함께 언덕을 오르지 못한 그 날. 울상이 된채 내 방 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너의 모습을 기억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물이 망울진 그 두 눈을 잊어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네가 울면서 내게 털어놓았던 말에 -빨간 비행기가 왜 적을 아주 부숴버렸는지 왜 예전처럼 가게 놔두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이제 조종사가 되면 다 저래야 하는 것이냐는 말에- 아는게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무력감과 쉬이 가라앉지 않던 울먹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때 내가 포장을 뜯어 물려준 다과가 무엇이었는지까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내가 그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이었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울음은 그 세기에 비해서 꽤 단순한 방법으로 그쳤다. 그러나 네가 받은 충격은 여러모로 복합적이고 또 깊었나보다. 너는 한동안 언덕을 오르지도 않고 축 쳐져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 꽃을 잔뜩 따다가 바구니에 담아 너에게 쥐어주기도 하고 며칠간 너의 손을 잡고 숲이며 계곡이며 꽃핀 들판이며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을 극복해낸 것은 온전히 너 스스로의 힘이었다. 나는 네가 무슨 깨달음을 얻어서 하룻밤 사이에 거짓말같이 활기를 되찾고 또 언덕에 오르자고 하는지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다시 밝아진 네 모습에 마냥 기쁠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안좋은 꼴을 보아 실의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 언덕을 오르지 말고 다른 것을 해보자 말할까 생각도 해보았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다.- 너도 기꺼이 따라주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말하디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붉은 기체의 기동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새로운 전투기가 얼마나 빠르고 날렵한지, 하늘을 날면 얼마나 자유로운 기분이 들지 환희에 차서 조잘대는 너를 보면서, 하늘을 구경하며 어느때보다 기뻐하고 비행운과 푸른 하늘이 맑게 비치는 너의 눈동자에 감동과 꿈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입 밖에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나로서는 한참 지나서야 알게된 것이지만, 십여년 된 그때까지만 해도 하늘에는 일종의 기사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귀한 신분과 돈 많은 사람만이 전투기에 올라 하늘을 누비는 만큼, 마치 귀족간의 결투처럼 전투에서도 '매너'를 챙겨서, 완전히 후미를 물면 날개만 쏘아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해주거나 혹은 아예 놓아주거나 했었다. 그러면 또 패배한 조종사는 그 뜻에 따라 저항하지 않고 탈출하거나 기지로 돌아가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때야 확실히 귀족들만 조종석에 오르기도 했고, 한 번 후미를 물리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에 그런 것들이 가능했겠지만은, 오늘날의 조종사들은 대부분 징집되고 기동도 격해져서 전투가 벌어졌다하면 모두 자기 살기 바쁠 뿐이다. 너는 그걸 알았기에 그날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니가 다시 마음을 추스린데에도 그 '기사도'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여느 다른 날과 같이 함께 언덕에 올랐던 그 날, 너는 너의 머리색을 꼭 닮은 붉은 노을을 등지고선 내게 말했다. 나는 조종사가 될거라고, 너도 조종석에 앉아서 같이 노을 속을, 별빛 틈을 비행하자고, 이제 비행기는 아주 빠르고 멀리 날 수 있어서, 우리가 어디 있든 어디에 속하든 하늘에서 만나 함께 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나는 뜻을 알 수 없는 말과 처음 보는 너의 진지하고 차분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너의 등 뒤에서 타오르는 태양과 붉게 물든 세상, 바람에 휘날리는 너의 머리칼, 번지는 햇빛 앞에서 어둡고 흐릿하게 비치는 네 얼굴과, 슬퍼보이는 눈, 입술, 부드러운 목소리에 홀려서, 너의 마지막 인사마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는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려 했으나,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너는 서둘러 언덕을 내려가버렸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너의 우는 얼굴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때, 그때 너를 다시 불렀어야 했다. 달려가서 붙잡았어야 했다. 네가 가는 방향으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서있기만 하던 내가 너무도 후회스럽다.


그날 이후로 나는 너를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곱씹으며 너의 집에 여러번 찾아가보았지만 그곳엔 너의 가족도 너도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학교에서 돌아오면 너의 행방을 수소문하는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날 아버지는 식탁에서 크게 흥분하시며 너의 부모님을 욕했다. 조국의 배신자, 매국노, 은혜를 모르는 버러지, 정돈되지 않은 단어의 집합속에 나는 겨우 너의 가족이 우리 조국의 국익에 큰 해가되는 일을 했으며 전쟁중인 적국으로 도피했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정찬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듣고있기가 힘들어 집을 나서서 언덕을 올랐다.


해가 쨍했다. 나는 홀로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눈을 감았다. 먼 발치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붉은기가 날아온다고 한다. 엔진소리가 들린다. 나는 눈을 떴다. 너는 없었다. 그늘을 벗어나 하늘을 보았다. 너는 없었지만 하늘이 있었다. 비행운이 얽힌다. 너는 여기 없지만 언젠가, 하늘에는. 나는 너의 마지막 말을 되뇌여보았다.


그날부로 나는 조종사가 되기로 했다. 성적은 충분했고, 신체도 건강했고, 집에 돈도 많았고, 부모님도 기뻐하셨다. 비행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참 쉽게 조종석에 올랐다. 조종은 생각보다 쉬웠고. 나는 생각보다 재능이 있었다. 나는 동기중에 가장 먼저 나의 기체를 받고 가장 먼저 배치되었다.


내가 처음 예속된 154비행단의 11편대는 주로 초계임무를 맡았다. 우리는 항상 적들과 모든 아군기보다도 높게 날았고 따라서 적기와 교차하거나 싸울일은 없었다. 비행은 언제나 즐거웠다. 구름을 뚫고 상승하는 것도, 가끔 곡예비행을 하거나 그것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가 내가 사랑했던 것은 지평선으로 넘어가려는 해를 쫓으며 오랫동안 계속되는 노을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쩐지 떠나던 날 네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기쁨과 함께 슬픔과 먹먹함을 주었다. 나는 우리 편대에서 가장 우수한 항법사였고 그에 따라 초계경로와 일정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기에 꽤나 자주 먼 하늘에서 오래도록 남아있는 일몰과 회상을 즐길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소소한 재미중 하나는 멀리서 발견한 적기를 망원경으로 구경하는 것이었는데-역시나 초계임무였기에 가능했다- 나는 그럴때마다 적기의 조종석을 유심히 살펴 조종사의 머리색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너는 분명히 흔치않은 붉은머리였고 그러기만 한다면 너를 특정해낼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았다. 나는 세상 모든 붉은 것과 너의 머리색을 구분할 수 있었다. 나는 초계비행에 나설 때마다 언젠가 정말로 네가 붉은기를 타고 나타난다면 너와 함께 중립국의 하늘로 도망칠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망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늘상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연료를 넣고 이륙했으며 봉급을 받으면 더 좋은 망원경이나 쌍안경을 샀다. 또 남는 시간이면 내가 너를 발견했을때 어떻게 하면 너도 나를 발견하고 나임을 알아채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하면 도망가버리자는 뜻을 전하고 안전하게 그 뜻을 행할 수 있을지 연구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늘 네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사실을 이미 마음속으로 깨달았음에도 계획을 멈추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아무런 진전도 없이 시간은 흘러만 갔다. 그동안 몇 번의 성공적인 초계비행으로 적의 공세징후를 관측해낸 공로를 인정받아 나는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수여식이 있고 얼마 가지않아 나는 처음으로 적기를 쏘았다.


그날. 우리는 매번 하던 것 처럼 우리는 높은 고도에서 적기를 탐지했고, 나는 그들 기체의 조종석을 살폈다. 의미없이 지나간 꽤 긴 시간 아래 이제 붉은머리를 찾는다는 목적은 거의 상실한채 약간의 습관성과 자세한 정찰을 주목표로 하는 행위였지만 저 멀리 있는 조종석에 초점을 맞출때마다 가슴에 차오르는 설렘과 혹시나 하는 마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이륙할때마다 연료를 많이 넣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날은 나를 조금은 방해했다. 우리가 낮은 고도에 집중하여 위쪽은 신경쓰지 못하는 동안 적기가 우리의 9시방향에서 강하하며 덮쳐왔고 우리 편대는 와해되어 각자 회피기동을 하기에 바빴다. 나는 더 많이 넣은 연료때문에 기체가 둔해져서 동시에 적기 두 기의 사선에 들어가 거의 죽을뻔했다. 나는 이것이 결코 내 실력 부족에 대한 자기위로가 아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배웠던 대로, 훈련했던 대로 기동했다. 거울을 보며 적기의 기동을 예측하고, 최적의 각도로 속도를 유지하면서 선회하고, 적기를 추월시켜 다시 후미를 잡고, 정확하게 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날 3기의 적기를 떨궜다.


마지막 남은 적기가 불꽃을 내며 추락할때가 되어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떨어져버린 적기 조종사의 머리색을 보지 못했다. 나는 나풀거리는 낙하산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5개, 적 조종사들은 모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 만약 하나라도 잘못되었다면 나는 불안장애로 앓다가 얼마 안가 정신병원에 갇혀버렸으리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망원경을 들었다. 금발 셋과 흑발 둘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제공임무를 수행하는 편대에 재배치되었다. 사람이 타고있는 비행기를 쏘는 것도 생각보다 큰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게 좋은 사격술을 주신 신에게 감사했다. 내가 먼저 후미를 잡고 조종사를 확인하고 그들의 날개만 골라서 쏠 수 있다는 것에 그 무엇보다 감사했다. 나는 마치 구세대의 조종사처럼 행동했고 그것은 과거의 낭만을 그리워하던 나의 상관에게 퍽 좋아보였나보다. 나는 또다시 진급했고 편대장이 되었다. 나는 내가 지휘하게된 편대를 이끌고 자주 출격해 꽤 훌륭한 실적을 내었다. 또 시간이 흐르자 내 가슴팍에는 훈장이 몇개 달렸고 나는 그것을 좋아했다. 내 조종석 유리 아래 킬마크를 새길때마다 묘한 흥분감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조종사의 머리색을 확인하는 것은 여전했으나 어느새 도피의 망상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야간비행은 아니었지만 구름이 두껍고 빗줄기가 굵어 시계가 안좋았던 그날. 여러 편대와 함께 비행장을 옮기던 중에 적 대규모 편대의 급습을 받았다. 구름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적기들에게 참 많은 전우가 당했고 그만큼 우리도 적기를 많이 떨어뜨렸다. 나는 내 기체에 가해진 하나의 손상도 없이 5대를 잡고 살아남았지만, 난전속에서 나는 내가 떨어뜨린, 아군이 떨어뜨린 적 조종사의 머리색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는 괴로워했다. 그날 떨어진 적기만 해도 30기가 넘었다. 탈출한 비행사는 폭풍우에 휩쓸려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갔을 것이다. 나는 너의 붉은 머리가 피와 빗물에 젖어가는 것이 떠올라 몹시 불안해졌다. 비행장으로 귀환할때에 랜딩기어를 내리는 기본적인 것마저 잊을 정도였다.


한동안 나는 조종석에 앉지 못했다. 나를 어여삐여기는 나의 상관에게는 몸이 안좋다고 변명하였으나, 그것이 그저 변명일 뿐인 것은 아니었고 실제로 나는 몹시 앓았다. 나는 걱정과 불안때문에 고열에 시달리면서 계속해서 너의 꿈을 꾸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이었다. 너는 그날과 똑같이 석양을 등지고 나에게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손에는 조종간이 쥐어지고 나는 네가 타고있는 비행기를 쏘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는 나를 탓하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웃으며 내게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고는 눈을 감을 뿐이었다.


보름을 앓고, 마침내 나는 포기했다. 소식을 듣지 못하기를 7년이고 내가 관측해온 적기만 해도 수백 기가 넘는다. 너는 아마 폭격기에 타거나 수송기를 운전하거나 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뛰어나지 않다면 죽어야하고 뛰어나다면 죽여야하는 조종사의 슬픈 숙명을 깨닫고 꿈을 접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너를 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언젠가 그날이 오면 조종석에서 내려와 걸어서 너를 찾아다니면 되는 것이다. 비겁하고 말도안되는 자기합리화였으나 그것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또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로 적의 조종석을 유심히 살피거나 날개만 쏘아버리거나 하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전황이 치열해지고 한 번에 더 많은 전투기가 공중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내게도 전투중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졌다는 것이 내가 품고있던 이유였으나, 다시보면 그것또한 핑계이고 자기합리화였다. 나는 그저 내가 또 적기가 네가 아님을 확인함으로써 그날 내가 떨어트린 적기중에 네가 있었을 가능성을 높이고, 그것때문에 다시 불안에 떨고 또 너의 꿈을 꾸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확인하지 않은 적기를 아주 떨궈버리는 것에 불안하여 매일 밤마다 잠에 들지 못하였다.


그렇게 자초한 광증에 시달리면서도 자기합리화로 불이 붙은 방아쇠는 참 쉽게도 적기를 격추해냈다. 그러다 보니 절대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던 불안도 점점 더 무뎌져갔다. 나는 훈장을 하나 더 받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기뻐하셨고 나는 그것이 기뻤다. 가장 높은 등급에서 한단계 낮은 훈장을 받랐을 때 마침내 나는 방아쇠를 당기는데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될 수 있었다. 나는 비행단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1번 편대의 편대장이 되었다. 나를 향한 신뢰와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은 너에 대한 기억과 불안감을 아주 꽉 짓눌렀고, 그덕에 여태껏 무엇이 불안했고 무엇을 바래왔는지 망각한채로 편안하게 이륙하고 착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비행은 설렘 없는 의무가 되었고 이뤄지는 전투마저 일상이 되었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노을을 기억하고 내심 보고싶어했으나, 야간비행은 위험했고 나는 가치가 높은 자산이었기에 오직 해가 중천에 떠있던 낮시간에만 비행하였다. 그러나 아쉬움은 느끼지 않았다. 나는 당장 주어지고 처한 것들에-적기와 킬마크, 동료애 같은 것들- 대응하고 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문득 든 네 생각마저 기계적으로 떠오르게 되어서는, 내가 조종사로 아주 유명해지면 너도 내 이름을 듣게될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또 무감각적인 전투과 격추를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뎌지고 나는 결국 아무런 목적을 가지지 않은 채로 그저, 더이상 조종사가 아닌 비행기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처럼 작동할 뿐이었다. 기계는 변심하거나 무뎌지거나 혹은 예민하거나 슬퍼하거나 하지 않아서, 나는 마치 내가 모든것의 방관자라도 된 양 수백번이 넘는 비행과 전투에서 언제나 무덤덤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이번 비행은 내 2000번째 이륙이었다. 나는 세지 않았는데 이제는 비행단장이 된 나의 상관이 오늘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편대원들에게 복귀 후 디브리핑 없이 모두가 먹고도 남을 고기와 술을 약속하였다. 본래 나는 무언가 성과를 기록하고 내가 몇번째로 무엇을 했네 하는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그 이유는 잊었다-나는 편대원들의 상기된 분위기에 덩달아 조금 들떴다. 순조로운 이륙. 순조로운 비행이었다. 어느새 초계임무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무전에서는 오늘 할 파티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편대원들이 떠드는 것을 들어보았다. 익숙한 기분이었으나 왜 익숙했는지 기억하기는 여러모로 힘들었다. 나는 눈을 조금 더 감고있었다. 앞에서 비추는 햇빛이 따스하다. 엔진소리가 들린다. 눈을 떴다. 계기가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슬플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석양이었다. 붉은 하늘과 구름이 나를 휘감았고 나는 그 안에서 비행하며, 오랫동안 잊고있던 완전한 평안을 느꼈다. 그리고 그 그것이 어쩌다 마음에 불을 지펴버려서는, 그 평안의 감정을 촉발시킨 근원을 생각해보자면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다시 너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노을을 보았다. 붉다. 나는 내가 절실히 원했던 것을 모두 잊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가 조종석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끊이지 않는 일몰을 즐기던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비행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그리고 너를 닮아가는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왜 비행해왔는지, 무엇을 찾아헤매왔고 무엇으로 괴로워했는지 온전히 기억할 수 있었다.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뻔 했으나, 그때, 타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5대의 적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야 다시 깨달으려 했는데, 또 목적을 잃어버린 부품으로서 방아쇠를 당겨야만 한다는 것에 나는 큰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편대원들에게 무전을 보내 고도를 높히고 전투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적기의 속도는 무척 빨라서 우세한 조건에서 전투를 시작하기에는 교차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대응을 고민하는 동안에도 적기는 다가오고있었다. 하강가속하여 후퇴할까도 싶었지만 역시 그러기엔 적기 편대의 속도와 고도가 훨씬 우위였다.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곧 교차했다.


편대가 교차하면서 아군기 두대가 떨어지고 적기가 한대 떨어졌다. 나는 교차후 곧바로 수직으로 빠르게 선회해서 적의 가장 후미에 있는 기체를 노렸고, 격추시켰다. 하지만 그새 적기도 나의 윙맨을 떨어트렸다. 나는 떨어져가는 아군을 곁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모두 낙하산을 폈고 나는 안도했다. 적기 한대가 후미에서 접근하고 한대는 2시 방향에서 나를 곧바로 노리고 강하하였기에 나는 우선회 하여 2시방향 적기를 쏘아서 떨어트렸다. 이때 후미에 붙은 적기를 우리 편대 3번기가 공격하였으나 적의 편대장기로 보이는 기체에게 당해 곧 낙하산을 폈다.


나는 하강선회해서 편대장기를 노렸으나 적기도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상당히 노련했다. 적기는 잠시 눈을 돌리면 어느새 부드러운 기동으로 나의 사선에서 벗어나고 금세 대등한 위치를 가져갔다. 게다가 다른 하나의 적기가 호시탐탐 나를 노려서 기동이 상당히 제약되었다. 그렇다고 그 나머지 적기를 먼저 처리하려고 하니 편대장기가 너무나도 쉽게 나를 사선에 두는 것이었다. 승부가 날 듯 말듯 하면서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아무리 속도를 유지하면서 선회하여도 이정도로 오래 선회전을 돌면 고도와 속도를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구름의 한참 위에서 싸우다가 이제는 옅은 구름의 바로 아래에서 싸우고있다. 발 아래에는 숲이 깔려있고 내가 날고있는 하늘은 붉게 물들어있다. 적기가 치솟고 나도 치솟고, 선회를 따라하고 기동에 맞대응하고, 붉은 하늘 아래서. 나는 또다시 가슴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의 머리색을 닮은 그 하늘, 니가 나에게 함께하기를 부탁했던, 약속했던, 그때와 꼭 닮은 그 석양 아래서. 나는 그제서야 니가, 니가 말했던 함께하자고 하던 비행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비행이 네가 말했던 것일까?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맹목적인 증오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서로를 죽이려 애쓰는 것이었을까? 나는 무엇때문에 조종간을 움직이고 러더를 차는 것일까? 내가 처음부터 바라왔던 것은 그저 너와 함께 하는 것뿐이지 않았는가? 이제서야, 이렇게 한참 늦어서야 내가 머리색을 모르고 떨어뜨려버린 조종사들이 마음을 쑤신다. 그중에 너도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왜 비행해야하나... 그리고 그 순간, 속도를 다 잃어버린 적 편대장기가 드디어 사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나는 얼떨결에 조종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붉은 노을빛이 머리칼에 흐트러져 산란하고 있었다. 너의 머리칼은 따스한 봄의 노을처럼 빛났다. 나는 조종간을 놓았다.


나는 피격되었다. 사수는 너의 2번기였다. 후회는 없다. 이제 더이상 남은 울분도 불안도 미안함도 없다. 다만 내가 울음을 참을 수 없는 것은, 또다른 후회가 생기는 것은, 무섭고록 서글픈 것은, 이제야 모든걸 다시 깨닫고 드디어 너를 만나 함께 비행했건만, 그 비행이 다시 내가 너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되었으며, 너는 기어코 나를 돌아보지 못하였고,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알려주지도 못한, 그러한 찰나의 일방적인 만남 이후에 또다시 찾아올, 망각마저 없는 그 오랜 기다림이 너무도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다시 찾아오지 못할 우연이었을 것이라는 무서운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보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그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 너무나도 한순간이었고, 단면적이었고, 그러나 그마저도 내가 잊었던 모든 갈망을 되찾을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는 추락하고 있다. 너는 멀리로, 다시, 지는 태양을 향해 날아간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하늘에 남기 위해, 탈출 레버를 당긴다.


석양은 절정에 달했는데, 나는 낙하하고있다. 낙하산을 타고 바라보는 노을이 참 아름다웠다. 나는 작아지는 엔진소리를 듣고있다. 사라져가는 너의 붉은 비행기를 보고있다. 내게 다시 날개와 엔진이 생기고 조종간을 당길 수 있다면 다시 너와 비행할텐데, 나는 낙하산을 타고 발을 굴러서라도 너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전투기의 부품으로 그렇게나 오래 살아왔으면서 혼자 힘으로는 조금도 비행할 수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너의 뒷모습을 보고싶었지만 눈 앞이 뿌옇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추락했다. 그리고 결국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잔디가 깔린 언덕이었다. 낙하산을 걷어야했지만 대충 옆에 치워뒀다. 하늘이 붉다. 네가 날아간 방향으로 걷다보면 네가 머무는 비행장이 나올까.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언덕의 뒤편은 이미 그림자가 짙다.  떨리는 다리를 이끌어 언덕에 올라섰다. 저물어가던 해가 언덕 너머의 지평선과 함께 다시 솟았다. 먼 하늘에 노을이 붉게 피어있다. 꼭 그때와 같다. 하지만 나는 홀로 서있다. 석양이 너무 밝다. 나는 이것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이곳은 언덕의 꼭대기였다. 그리운 언덕이었다. 그리운 노을이었다. 언덕의 중턱,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니가 나를 부르고, 빨간 비행기가 날아온다고 알린다. 재잘대는 소리가 듣기 좋다. 나는 너의 목소리와 함께 고향의 바람, 따스한 햇빛과, 주홍빛 노을에 너의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눈을 떠보면 꼭 니가 나를 보며 웃고있을 것 같다. 멀리서 엔진소리가 들린다.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떠본다. 붉은색이다. 타는 노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