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되게 오랜만이죠? 사실 직접 찾아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라도 남겨 봐요. 아, 근데 왜 굳이 편지냐고요? 물론 저도 요즘은 편지보다 나은 수단이 많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편지는 특유의 묘한 감성이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굳이 양피지 같은 종이에 써서 보낸다거나 하는 거요. 비록 이 편지지는 흔한 A4이지만요.
 그렇다고 해서 막 성의 없는 편지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제가 정말 성의가 없었다면 굳이 제가 직접 볼펜을 잡고 쓰는 일도 없이, 적당히 타자를 두드린 다음에 적당한 종이에 인쇄해서 보냈겠죠. 이게 지금은 제 최대한의 성의에요.
 하튼, 제가 당신과 결별 한지도 벌써 반년 가까이 되어가네요. 전 아직도 당신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그리고 이별을 고한 순간도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게 흠이지만요. 혹시 제가 이 편지로 당신이 묻어 버리고 싶은 기억을 깨웠다면, 일단 미안하다고 해줄게요. 그러므로 미안해요. 
 자, 여기 사과도 했으니 마저 말을 이어가 볼게요. 전 요즘 나름 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어요.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가 중3, 그리고 한 3년 정도 교제하고 헤어졌으니 지금 전 고3이겠죠? 요즘 공부에 짓눌려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전부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힘들진 않아요.
 오히려 감사하다고 해야겠죠. 지금까지 당신이 제 곁에 있었다면 전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테고, 지금은 당신과 함께했던 기억 하나로 자신을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깐요. 그래서 당신에겐 정말 감사해야 하겠죠.
 참, 당신도 잘 지내고 있죠? 물질주의적인 관점 말고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요. 그러니깐 제가 당신에게 묻는 건 몸 상태는 어떤가, 요즘 기분은 어떤가. 그런 것들이겠네요. 아, 물론 저런 것들은 그냥 미사여구고 제가 정말로 묻고 싶은 건 그거에요.
 저하고 헤어져서 행복하세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지금까진 서론이었고, 이제부턴 본론으로 들어가 볼게요. 일단 제가 편지를 쓰는 시점은 주말이에요. 학생들에게는 정말 천국 같은 시간이죠, 제게도 천국 같은 시간이고요. 마음 같아선 집 한편에 앉아서 공부도 안 하고 게임이나 하고 싶지만,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와봤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이유는 묻지 마시고요. 그건 어차피 이 편지를 쭉 읽다 보면 자연스레 나올 거에요. 그러니깐 이건 편지를 끝까지 읽으라는 일종의 협박이에요. 아마 당신이라면 꽤 귀여운 협박이라고 해줬겠죠. 그래요, 이건 그런 협박이에요.
 당신이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할 예정이냐고 묻고 싶겠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편지로 보낸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당신은 제가 보낸 편지를 읽을 수만 있을 뿐, 여타 SNS처럼 답장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깐요.
 생각해 보면 그것도 문제네요. 당신이 그냥 이대로 편지지를 접어 버리면 제가 당신에게 이야기할 소재는 아예 없어져 버리는 셈이죠. 그러고 보면 이건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냐에 대한 질문이자 대답이 될 거에요.
 당신이 정말로 절 사랑했다면 아마 이 편지를 단 한 번쯤은 읽어주겠죠, 아니면 말고요. 일단 전 꾸준히 편지를 보낼 것이고, 그걸 무시하고 말고는 당신의 선택이에요.
 다만 당신이 내 편지를 무시한다면 난 꽤, 아주, 많이 슬퍼할 거에요. 안 그래도 최근 처방받은 우울증약을 전부 버려 버린 참이거든요. 물론 협박이에요.
 여기까지 읽었으니 말해주는 거지만, 이건 유서거든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일단 집을 나온 경위부터 설명해야겠죠. 생각보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막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왔을 뿐이죠. 거기에 적당히 합당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날따라 유독 날씨가 좋았을 뿐이에요. 자, 한 번 생각해 봐요.
 열린 창문 사이로 솔솔 불어와 마음을 간지럽히는 바람, 기분 좋게 내리쬐며 그만 일어날 것을 권유하는 햇살. 이불 밖은 위험하다지만 그날은 그냥 일어나고 싶었어요. 비록 세 시간? 아, 세 시간 반이죠. 그 정도밖에 못 잤지만요.
 그래서 이 편지를 쓰는 와중에 피곤하냐면 그건 또 아니에요. 오히려 활기차다고 해야겠죠. 비록 광합성을 하는 동물은 거의 없다지만, 사람이 햇빛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런 원리에요. 이것도 나름의 이유겠네요.
 그렇게 전 외투를 걸치고, 적당히 챙길 건 챙기고 문밖으로 나섰죠. 웃기게도 따듯한 햇살을 맞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당신이었어요. 그리고 그다음은 없었어요. 이 대목에서 알아챘겠지만, 당신은 제게 그런 사람이었어요. 온정적이고 또.. 그저 사람이었죠.
 하여튼, 전 그대로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많아지고 오만가지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 생각들은 조금 나중에 제대로 정리해서 적어 보도록 하고, 일단은 다른 이야기부터 할게요.
 정처 없이 떠돌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걷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고 있듯이 전 그리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잖아요. 당연히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여러 가지 했죠. 그러다가 또 당신 생각이 떠오르고, 처음으로 목적지를 정했어요.
 혹시 당신과 제가 처음 만났던 곳은 아직 기억해요? 그리 크지는 않은 카페였죠. 당신은 그때 오히려 그 소소함이 맘에 든다고 했고, 전 그 의견에 동의를 표했죠. 그건 정말로 진심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집 커피는 정말 맛없었지만요.
 그래서 지금 거기로 가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땐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 커피를 마시러요. 물론 혼자 조각 케이크를 시켜서 먹기도 할 거고, 제 기억에 당신이 그리 깊이 각인되어 있지 않다면 라테나 쉐이크를 시킬 수도 있겠죠.
 물론 전부 저 혼자서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네, 예상대로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시켰고 그리 맛있진 않았어요. 사실 케이크는 괜찮았는데 커피가 지뢰였죠. 정말 한 모금 마시고 뱉고 싶어지더라고요.
 그것보단 여기선 당신에 대한 기억이 정말 세세하게 떠오르더라고요. 당신이 잔을 들던 아주 작은 습관과 커피 향, 그리고 그때 해봤던 작은 일탈까지도요.
 그래요, 일탈이에요. 제가 지나치게 윤리나 도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정말로 일탈이었죠. 당신도 그 점엔 동의 할거에요. 제 손을 먼저 잡아준 건 당신이었고, 절 이끌어 준 것도 당신이었으니깐요.
 당신의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않을게요. 배덕에 취해서 흔쾌히 동의한 것도 저였고, 당신이 정말로 괜찮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답한 것도 저였으니깐요. 결국, 이 모든 건 제 선택이 만들어낸 상황인 셈이겠죠.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을 이 한 일생을 바쳐 사랑하겠노라고 말한 건 정말 후회해요. 전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대로 영원했으면. 그렇게 자신을 속일 동안은 행복했죠.
 이젠 아니에요. 향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맛은 형편없는 커피처럼 정작 꺼내서 곱씹어보면 고통스러울 뿐이죠. 아니, 고통스럽다기보단 공허하다고 해야겠네요. 미치도록 공허해요. 약을 버린 걸 후회할 정도로요.
 그게 슬픈 점이죠.

 사랑하는 당신에게.

 역시 카페에서 끼니까지 때우는 건 좀 아니죠? 마음 같아선 조금 괜찮은 곳에서 먹고 싶지만, 그리 많은 돈을 챙겨오진 않아서 그냥 편의점에서 적당히 먹었어요. 당신이라면 잘 챙겨 먹고 다니라고 말했겠지만, 어차피 위장으로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물론 당신은 한 끼를 먹을 때도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겠죠.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언제나 날 위해줬고, 당신과 함께할 때는 그나마 잘 먹고 다닌 것 같아요. 물론 요즘은 아니죠. 음식은 역시 효율주의에요.
 참, 그다음에 제가 어디로 갔을지가 궁금하겠죠. 사실 별로 떠오르는 곳은 없었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니 돌아가서 할 것도 없고, 인생에서 이보다 좋은 날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날씨가 좋았거든요. 어찌 보면 당연한 거겠죠.
 그러다가 별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갈 곳을 정했어요. 제가 처음으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곳 말이죠. 제 기억상 거리가 꽤 되는 편이었을 텐데, 정작 지하철로 가니까 그리 멀진 않더라고요. 처음으로 갔을 때는 정말 길었던 것 같은데, 그랬는데.
 만약 편지의 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눈물 때문이라고 말할게요.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당신과 헤어진 후에 조금 살아보면서 느낀 점인데, 우울하다고 해서 막 먼저 눈물이 나고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피곤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감정적으로 피곤하다는 거겠죠. 하기야 자신이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는 감정을 쏟아내야 하니깐요. 아, 맞아요. 당신은 제가 우울증이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죠? 그러니 이 얘기들은 조금 생소하겠네요.
 그러므로 여기에 생소함 하나 더 투척. 최근에 조현병 판정까지 받았어요. 뭘 할 때 항상 누군가가 조언해준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조현병의 초기 증세였나 봐요. 그리고 그게 한 일 년 전의 일이니 지금쯤이면 조현병 말기거나 치료됐겠죠. 
 근데 편지에 쓸 문장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 같으니 이건 이미 말기겠죠? 하하, 환시가 안 보이는 게 신기할 지경이네요. 뭐, 사람마다 질병의 증세는 다른 법이니깐요. 저는 환청이 주력 증상인가 보죠.
 아, 내릴 곳에 도착해서 편지는 여기에서 끊을게요. 다음 편지에서 봐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랑해, 사랑하지 않아.
 이루기 위해 이르다 물러져 붉어.
 정답과 의문의 차이는 열두 개 꽃잎의,
 대충 귀에 들리는 것 중 인상적인 문장들만 모아 봤어요. 마지막 문장은 뭔가 되게 멋진 시구라도 나올 것 같은데 중간에 끊겨서 짜증 나더라고요. 
 하여튼, 당신도 이쯤 되면 제가 어디인지는 눈치챘겠죠. 그러니까 굳이 말하고 지나가진 않을게요. 이번 편지도 제 추억을 알외는 내용으로 도배될 테니깐요. 그중 몇 개는 당신이 기억할지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때가 아마 연휴였을 거에요. 언제 적 연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겠죠. 제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나들이나 가자고 그랬었죠? 그래서 그때 여기서 만났고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전 그걸 제멋대로 데이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심장이 아프게 뛰었었죠.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묻어 둬야 했던 말도 많았어요.
 사실, 사랑한다는 말도 묻어 둬야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그 말을 꺼내야 했나 싶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공허하지는 않았을 테고, 적어도 조금 더 가볍게 헤어질 수 있었겠죠. 제가 이미 말했던 대로 당신을 사랑한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사랑했다고 말한 것은 정말 후회해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당신에 대한 기억을 털어내고 적당히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겠죠. 아마 그게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였겠죠. 저는 지금 고3이고 공부가 중요할 나이니깐요.
 하지만 당신은 제가 무언가를 묻기 전에 그만 떠나 버렸죠. 제가 아직 당신을 잊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대답을 받은 건 두 개도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이번 편지에서 묻는 거지만, 당신은 절 사랑했던 거에요, 아니면 제 ㅁ
 아니에요, 이번 편지는 여기서 끝낼게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이 웃어 주던 게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요.
 당신은 제가 떠올라서 괴롭나요? 그럴 리가 없겠죠. 내가 당신을 사랑했지 당신이 날 사랑한 건 아니니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은 날 사랑하진 않았어요. 그저.. 모르겠네요.
 어쩌면 내가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멍청한 일이겠죠. 당신도 그렇게 말할 테고요. 그만 잊으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말할 거라면 왜 그때 그렇게 말했어요? 왜 아직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제가 좋다고. 쭉 함께하자고 말했던 거냐고요.
 당신이 아직이라는 말만 붙이지 않았다면 전 이러지 않았겠죠. 그런데 그다지도 상냥한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싱그럽게 미소지으며 날 안아줬냐고요. 차라리 당신이 그때 확실히 선을 그었더라면,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요, 이번만큼은 당신이 잘못했다고 말할게요. 당신을 사랑했던 내 잘못이고, 그걸 너무도 상냥하게 받아준 당신의 잘못이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미치도록 증오해요.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혹시 같이 여행 갔을 때 떠올라요? 그리 멀리 가진 않았지만 나름 처음으로 같이 간 여행이었죠. 당신은 제가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는 모를 거예요. 뭐, 그땐 조금 고민한 후에 동의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제안한 순간부터 바로 승낙할 준비가 되어 있었죠.
 누군가하고 여행을 떠나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것도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여행이라니, 기쁘다 못해 울고 싶을 수준이었죠. 
 그래서 출발하는 전날엔 잠들기 힘들 정도였어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죠. 나름 뭔가를 기대하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출발하는 날에 차에서 조금 많이 졸긴 했죠. 뭐, 대화할 기회를 날려 버리긴 했지만 전 나쁘지 않았어요. 당신이 휴게소에 도착했다고 절 쓰다듬어서 깨워줬잖아요? 그때 당신의 손길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몰라요. 그저 행복했다는 거 하난 확실하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전 그때 그리 배고프진 않았어요. 그것보단 애정에 굶주려 있었다고 해야겠죠. 그래도 당신이 뭣 좀 먹으라며 하다못해 핫도그 하나라도 챙겨주는 모습에 얼마나 감동했는지 아세요?
 그리고 또 심장이 뛰었어요. 그것도 아플 정도로 강하고 빠르게 뛰었죠. 당신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꿈결 같았어요. 하지만 소스가 묻었다며 휴지를 건네는 당신의 손도 현실, 배고프면 아무거나 더 먹지 않겠냐며 묻는 당신의 말도 현실.
 역시 귀엽다며 꼭 안아주는 당신도 전부 현실이었죠. 조금 엇나간 얘기지만.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말 알죠? 당신이 당신 나름의 밥을 먹는 걸 보면, 새삼 제가 다 배부른 것 같더라고요. 정말.. 행복했어요. 
 사실, 이 편지에서 여행 중의 부분도 전부 넣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이번 편지는 이쯤에서 끊고 다음 편지로 돌아올게요.
 언제나 좋은 날 되세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여행지에서 당신이 처음 보는 종류의 술이라며 막 들이키고 진탕 취했던 건 기억나죠? 떠오르지 않는다면 심히 유감이네요. 그때 조금 큰 일이 있었거든요.
 아마 이 부분에서 당신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걱정하겠죠. 마음 같아선 온갖 거짓말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그러면 당신이 여러모로 힘들어 할 것 같아서 그러진 않을 예정이에요. 사실 그리 큰일도 없었거든요.
 전 술에 취한 당신을 부축하며 숙소로 돌아왔죠. 그런 당신의 모습은 평소하곤 꽤 달랐어요. 제가 생각하기엔 나름 귀여워 보였죠. 귀엽다는 말은 당신이 제게 많이 했던 말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당신에게 귀엽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물론 정말로 그러진 않았죠. 당신을 침대에 누이고, 땀 때문에 찝찝해져서 씻을까 말까를 고민했어요. 결국엔 씻고 자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어요.
 어차피 당신은 잠든 것처럼 보였으니깐, 그냥 당신 방에서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목욕 도구를 전부 준비하고 딱 상의를 벗어 던진 순간. 참 기막힌 우연으로 당신이 깨어났어요. 
 당연히 아직 술에 취한 상태였고, 침대에서 내려와 절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죠. 그리곤 당신은 술에 취해서 살짝 흔들리는 걸음으로 제게 천천히 다가왔어요. 당연히 침대와 벽의 거리가 그렇게 멀진 않았죠, 다만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시간은 너무나 긴 것 같았어요.
 뭐, 당연히 길게 느낀 건 기분 탓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일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죠. 이쯤 되면 슬슬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가 궁금할 거예요. 저질렀다는 표현이 알맞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일이긴 했지만요.
 그때 당신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던지, 숨결 사이로 술 냄새까지 느껴질 정도였어요.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취기에 저까지 취할 것 같았죠. 
 전 나름 당신이 제게 무슨 일을 할까 기대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당신이 취중이라고 해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요. 
 뭐, 그리 큰일은 없었어요. 다르게 말하자면 제 기대에서 빗나갔다고 해야겠죠. 당신은 그저 절 바라보다가 목을 끌어안기만 했어요. 정확히는 그냥 절 껴안았다고 해야겠네요. 그걸로 끝났다면 전 그저 그런대로 만족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 당신은 옅게 흐느끼고 있었어요. 그리고 말했죠. 미안하다고, 못난 어른이라서 미안하다고. 당신은 그렇게만 말했고 다른 말은 없었어요. 
 당신은 너무도 상냥한 사람이었어요. 
 제게 어울리지 않을 만큼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애정 결핍이었어요. 아니, 애정에 굶주렸던 짐승이었죠. 
 그래요, 말 그대로 애정이 모자란 것 말이에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 이유였죠. 당신은 내게 애정을 준 유일한 인물이었어요. 하기야 부모의 목숨을 제 손으로 끊으려 시도한 아이까지 포용할 사람이 있을지나 모르겠지만요. 
 여기부터는 당신에게 하지 못했던, 하지 않았던 말로 가득 찰 예정이에요. 제 편지도 사실 그걸 위해서였어요. 정작 함께할 때는 말할 수 없었지만, 편지로나 말할 법한 것들. 
 전 사실 당신이 제 모든 것을 모르길 원했어요. 정확히는 당신이 사랑했던 저만 봐주길 원했죠. 아니, 사실 그것도 아니에요. 전 당신을 사랑했어요. 다만 당신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은 좋아하지 못했죠.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당신은 누구나 편히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상냥한 사람이었고, 전 그런 당신을 제 나름의 방식대로 사랑했죠. 그게 문제였어요. 
 전 목줄을 채워줄 사람을 원했죠. 웃기게도 누군가에게 소유되길 원했어요. 하지만 너무도 상냥한 당신은 절 정말 순수하게 사랑했죠. 오히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날개를 꺾어줄 사람이었는데, 난 당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당신은 내 모든 걸 사랑해놓고선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죠? 하다못해 내게 당신의 것이 되어달라고 말하기라도 했다면 난 정말 기뻐했을 텐데, 당신은 몇 마디 말만 남기고 날 떠나 버렸죠. 
 저도 알아요. 당신과 제 관계는 좋게 봐줘도 비정상이었죠. 저도 그 점에는 정말 동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정작 제 모든 걸 사랑한다고, 적어도 그렇게 느끼게 했으면서 그 비정상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죠.
 그건 정녕 절 위한 거였어요? 처음으로 만난 같은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도 생에 처음으로 애정을 느껴본 제게 그만 헤어지자고 말한 것 말이에요. 사실 이쯤 되면 당신이 아닌 저 자신이 증오스러울 수준이에요.
 난 왜 멀쩡한 남자로 태어난 주제에 남자를 좋아했고, 왜 난 당신보다 늦게 태어났을까요. 차라리 내가 당신보다 일찍 태어났더라면,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어도 평범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
 나는 어째서

 사랑하는 당신에게.

 최근 정말 오랜만에 울었어요. 당신이 이제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는데, 반년 만에 현실을 자각했는지 그제야 눈물이 나왔죠.
 그리고 한동안 멈추지조차 않았어요. 한 시간은 울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막 비명을 지르면서 운 건 아니고, 그냥 천천히 흐느끼면서 울었어요. 안길 사람조차 없어서 제 흔적밖에 없는 베개를 꽉 안고 울었죠. 
 당신이라면 이런 나를 안아주면서 울지 말라고 달래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다른 생각들도 몰려왔죠.
 오히려 그간 생각해 왔던 것들을 정리할 기회가 되긴 했지만, 기억을 되새길수록 아픈 건 매한가지였어요. 지금까지 마음이 아플 때 가슴팍까지 아린 건 전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슬플 땐 심장을 뜯어버리고 싶어지더라고요.
 하여튼, 너무 울어서 한 번 졸았다가 깨어났을 땐 이미 자정이었어요. 정확히는 자정 근처였죠. 아직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아서 생각을 정리할 겸 밖으로 나갔어요. 왜, 클리셰 범벅인 영화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밤공기 맞으면서 우는 거 있잖아요.
 저도 나름 그런 일이 벌어지길 기대했어요. 단번에 생각이 확 풀려선 제가 뭘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길 바랐죠. 하지만,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어요.
 돌아올 생각은 버리고 가보지 않은 길로 걸은 지도 어언 반 시간. 그리고 당신과 헤어진 지는 어느새 반년. 저는 과연 그 반년 동안 뭘 했는지가 자연스레 떠올랐죠.

 당신을 추억하고, 사랑하고, 원망하고. 자신을 망각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추억해서 더욱이 아파하고, 사랑해서 더욱이 슬퍼하고, 원망해서 더욱이 사랑하고. 
 망각해서 더욱이 혼란하고, 혐오해서 더욱이 미워하고, 증오해서 더욱이 자학하고.

 그리고 그중에 단 하나도 나아진 게 없었어요. 전 여전히 당신을 잊지 못해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 중 어떤 것도 답하지 못했죠.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짐승보다 못한 이유였고, 당신이 절 사랑했던 이유는 아직도 모르죠. 이젠 당신에게 편지를 써서 말한 것을 후회해요. 차라리 메시지나 이메일이었다면 답장을 받을 수는 있었겠죠?
 근데, 말이에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자, 그냥 시작하자마자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당신이 돌려준 편지들을 뜯어서 전부 한 글자씩 정독했어요.
 그리고 제 나름의 결론을 냈어요. 전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살아있는 한은 그러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어리석게도 죽으려 해요. 
 그렇다면 남은 건 어디서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 마침 가까운 곳에 적당히 몸을 던질 곳이 있더라고요. 강 위로 길게 난 그 다리 말이에요.
 걸어서 가기에도 짧고, 새벽 산책 나온 김에 바로 거기로 향했죠. 딱히 미련은 없었어요. 제 시체를 수습해 줄 사람도 없고, 세상과 저는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었죠. 
 그러니, 이제 당신 말곤 절 기억할 사람도 없어요. 제 가족은 이미 모두 죽었으니깐요. 저 혼자 남은 게 이제 3년 정도. 전 그렇게 어긋난 사람 따위였죠. 
 편지로 당신에게 모든 걸 털어놓기로 했지만, 나머지는 당신이 추론하도록 내버려 둘게요. 난 내 흔적을 이런 방식으로 남기기로 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제가 얼마나 추악한 인물이었는지 생각할 순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겠죠.
 슬슬 말이 길었죠? 이 편지만 부치고 그만 떨어져 내릴 생각이에요. 운이 좋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그렇게 고무적이지 않으리란 것이 너무 확실해서. 악착같이 살아남아도 이제 살아갈 이유조차 없으리란 확신이 있어서.
 안녕이에요, 사랑하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