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첩이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넓지막한 저수궁 한 구석.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의자가 주르륵 깔려 있고, 그 의자 옆에는 화려하게 머리를 틀어올린 비빈들이 청아한 목소리를 합쳐 한 여인에게 도만복의 인사(대충 큰절)를 올렸다.


“일어나게.”


상석에 앉은 여인, 황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후궁들을 보며 미소를 짓는 황후. 그에 맞춰 후궁들도 그녀에게 엷은 미소를 전해 주었다. 


‘오늘도 황후마마 분량 득템! 아, 이거 진짜. 오늘도 조회수 10만회 각이다.’


후궁들의 인사를 받은 황후가 귀비를 시작해 비빈들에게 덕담을 해주고 있을 때, 말석에 앉은 후궁 한 명만이 고개를 숙인 채 저속하게 키득대고 있었다. 


“완귀인?”

“예, 황후마마.”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 왜 그리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겐가.”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그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야말로 폐하께 눈에 띄길 바라네. 몇년 동안 시침 한 번 들지 않았으니. 얼마나 적적하겠는가.”


황후의 말 한마디에 후궁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고, 그중 몇몇은 대놓고 그녀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래. 총애 못 받는다고 놀려먹는 거 안다. 근데 시침이라도 들어서 인간이 아니란걸 들키면 니들이 책임져 줄거냐?’


완귀인, 아니 YUNE-08124는 자신을 비웃는 후궁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황후에게 감사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신경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그래. 오늘은 이쯤 하겠네. 다들 처소로 돌아가도 좋네.”

“성은에 감사드리옵니다, 황후마마.”


*


“아, 진짜 개빡쳐. 진짜 황후마마만 아니었으면 이짓 때려치운다.”


그녀는 저수궁에서 자신을 비웃은 후궁들에게 마음속으로 법규를 세워준 뒤, 반지 안에 숨겨 놓은 리모컨의 버튼을 눌렸다. 


슈욱-


그와 함께, 모니터가 켜졌다.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영상들이 모니터를 꽉 채우고 있었다. 


“흐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뺄 장면이 없잖아.”


그녀는 오늘 업로드할 영상을 위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썸네일을 만들고 자막을 추가했다. 참으로 부조화한 모습이었다. 몇백년 전 중국에 안드로이드가 모 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을 올리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모습. 이 시대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안드로이드 유네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눈에 장착된 카메라로 황후를 찍고, 영상을 편집하며, 매일밤 조회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쯤되면 영리한 독자님들은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그렇다. 유네의 시대에는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시간을 뛰어넘은 스트리밍이 유행하고 있었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자, 언론과 예능업계가 후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항상 그림이나 기록으로만 봐오던 사극 드라마의 주연들을 UHD 화질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나, 시간여행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타임 패러독스. 한 인간이 과거 또는 미래로 가서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현재에 돌아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설령, 그것이 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일이라고 해도.


그래서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던 인간들은 한가지 꼼수를 떠올렸다. 


[인간이 갈 수없다면, 그에 준하는 지성체가 가면 되잖아? 지능은 갖추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그것들’말이야.]


그렇게 안드로이드들은 과거로 보내졌다. 물론, 유네도 그들 중 한 개체였다. 그녀가 맡은 역사속의 유명한 인물은, 황후 휘발나랍씨. 이름보다는 ‘계황후’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황후로써 황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만,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이유로 유폐되어 쓸쓸한 말년을 맞이한 황후.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로, 만화로, 드라마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왔고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어째서 황제에게 저항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유네는 머나먼 과거로 보내졌다.


보금자리와 자신의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시대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폐기될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 이곳에서 겪은 모든 일. 어느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이 있었다.


유네 또한 황후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것. 그 팬심 하나로 그녀는 후궁들의 멸시를 참아내고 있었다. 


“오케이, 다 했다! 그럼, 영상을 올려 보실까?”

유네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엔터키를 두드렸다. 그 순간, 굳게 잠궈놓았을 터였던 영상 편집 전용 방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침입에, 유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양 손을 버둥거릴 뿐이었다.


‘잠깐, 일단 모니터를…… 그보다 문을 닫아야 하는 거 아냐?’

“완귀인, 저 해괴한 것들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문을 닫으러 간 유네보다 편집실 안으로 들어온 황후가 빨랐다. 유네는 헤드셋을 쓰고 있었던 데다가 그녀의 시대에서 유행하고 있는 수면잠옷을 입은 상태라, 황후 입장에서는 그녀가 미쳤나 싶었을 것이다.


“화, 황후마마. 이곳에는 어인 일로……”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왜 지엄한 황궁에 저런 이상망측한 물건들이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황후는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며 유네를 추궁했고, 그녀는 뒷걸음치며 변명을 빙자한 아무말 대잔치를 하고 있었다. 


결국, 유네는 모든 진실을 황후에게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했더니, 역시 그랬군. 그대가 미래에서 온 존재라니.”


봉건시대의 여성답지 않게 황후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낱낱이 이야기한 뒤, 유네는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벌하셔도 좋습니다. 허나 제발 이 일을 퍼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신첩이 이렇게 비옵니다.”


황후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유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에 유네는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좋아. 알리지는 않겠네. 허나 조건이 있어.”

“그게 무엇인지요, 황후마마?”

“나도 이 일에 끼워 주시게. 내가 주인공인 활동화(活動画)니, 응당 내가 신경써야 겠지.”

“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유네는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순간 그녀의 전자두뇌가 가열되기 시작했다. 과거인, 그것도 유명한 인물을 본인이 나오는 영상 만들기에 참여시킨다? 어떤 타임 패러독스가 생겨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허나, 황후마마.”

“걱정 말게. 이 일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니.”


말투는 단호했지만 어린아이의 것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유네는 할 말을 일었다.


‘이런 황후마마도 멋있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셔!’


거절이고 뭐고, 그녀의 인공심장 속 팬심만 점점 커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타임패러독스고 뭐고 엿먹으라지. 나에게는 팬심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


그렇게 유네와 황후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유네는 유네대로 영상을 찍고 편집했고, 황후는 때때로 그녀에게 조언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얼굴이 돋보인다, 저렇게 하면 사건이 더 흥미로워 보인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흐-음. 어째 영상 퀄리티가 날이 가면 갈수록 올라가는 것 같은걸. 하긴, 황후마마께서 친히 도움을 주시고 계시니……’


오늘도 편집실에서 즐겁게 영상을 보는 황후를 보며, 유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참 아까운 재능이야. 우리 시대에 태어나셨으면 영상 편집자 같은 걸로 이름을 날렸을 텐데.’


이름. 그러고 보니 유네는 황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역사사서에 적힌 것은 그녀의 성씨 뿐. 이름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름 없이 기록만 남긴 여인.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황궁 안에, 더 나아가 역사 안에 속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유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인간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과거에 속박되어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완귀인. 뭘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가?”

“네? 제가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것 같이 보이셨습니까?”

“그렇네.”


황후의 대답에 유네는 볼을 부풀리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황후마마, 지금 하고 있는 게 즐거우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미래의 문명을 이렇게나마 체험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럼, 그곳으로, 미래로 가고 싶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순간, 황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와 동시에 유네의 분석 기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표정은 ‘당황’이다. 황후는 지금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고 있다. 또한, 황후라는 자리의 있는 입장에서 두 표정을 교차해 지었을지도.


“그런 생각은 없네. 귀족가에서, 황궁에서 곱게만 살아온 내가 어찌 갑작스러운 미래에 대처해겠는가.”

“황후마마……”

“이만 가보겠네.”


황후는 잘 보던 영상을 끈 뒤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편집실을 나섰다. 뮤니의 전자두뇌가 급속도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속박. 자신과 황후를 묶고 있는 속박이 너무나도 미웠다. 이렇게 꽁꽁 묶어둘 것이라면, 왜 자신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을 부여했는지, 왜 황후에게 그런 재능을 선사했는지 알고 싶었다. 


‘타임 패러독스고 뭐고 다 부숴 버릴까?’


유네의 전자두뇌와 인공심장 양쪽에서 똑같은 결심을 한 순간이었다.


*


황후가 도주를 결심하게 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녀의 미래를 줄줄 불면 되는 일이었다. 그 전에 유네는 꼭 해야 할 일을 마무리짓기로 했다.


끼익-


그녀는 거침없이 편집실의 문을 들었다.


“후우-”


그리고, 심호흡을 한 유네는 황궁 어딘가에서 가져온 짱돌을 손에 꽉 쥔 뒤 인공 근육 섬유에 힘을 실었다. 짱돌이 모니터 한가운데에 박혔다.  


쨍그랑!


모니터 박살나는 소리가 몇 미터쯤 떨어진 유네의 귀까지 들렸다. 물론 방음 기능이 완비되어 있는 방이니 들킬 일은 없었다. 


“죽어라!”


유네는 짱돌의 공격이 들어가 중간 부분이 산산조각난 모니터의 가장자리 부분을 가격했다. 듣기만 해도 시원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그녀는 더 이상 방송을 할 생각이 없었다. 미래의 인간들이 바라는 것은 황후의 아름다운 얼굴과, 그녀의 불행이었다. 유네는 그 무엇도 모니터 뒤의 인간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보고 싶다면 직접 와서 보라지. 아, 타임 패러독스가 무서워서 못하려나?


어쨌든 그 뒤로도 파괴는 계속되었다. 겉으로는 모니터를 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향한 파괴. 중앙의 거대 모니터는 산산조각이 났고, 주변의 중간 크기 모니터들도 유네의 스냅에 바닥에 내리쳐졌다. 


파각! 빠악! 쨍그랑!


시원한 소리가 유네의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유네가 만족했을 무렵, 누군가가 유네에게 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완귀인.”

“......황후마마.”


다시한 번 자신의 치부를 황후에게 들키고 만 유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쳐졌고, 유네는 손을 내밀었다. 황후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망가요. 이제 아무것도 우릴 막을 수 없어요.”

“허나 나는.”

“당신, 버림받아요. 이유는 모르지만, 당신이 평생 사랑해왔던 남자에게 버림받는 거라고요. 그런 미래를 원하세요?”


황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강렬하게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유네의 손을 잡지도 않았다.


“제발요. 저와 함께 미래로 가요.”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황후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둘의 간격이 좁아지자, 황후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후로 황궁에서 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


“윽. 수배지가 여기까지 퍼졌을 줄이야.”


유네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수배지를 구겼다. 그새 현상금이 올라 있었다. 안드로이드와 과거인의 기묘한 조합. 눈에 띄기 쉬운 특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용케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럼 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