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중천에 떴건만 구름에 가리어 그림자와 빛을 구분할 수 없는 옅은 잿빛만이 도시에 드리웠다.

신호등에 붉은 불이 켜지자 수많은 차가 거대한 뱀과 지네같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머리는 싸구려 은색으로 색칠된 경차가 맡았으며신호가 초록색으로 점멸하고 5초가 채 지나지 않아 뒤따라 줄지은 몸통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노란도색에 알록달록한 글자로 코흘리개를 천재로 만들 수 있다 광고하는 승합차가 도로에 멈추었고오색찬란한 어린아이를 삼키었다정원은 8명이라 하지만 아이들은 어림잡아 열다섯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을 태워 보낸 어미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왔다유모차에 담긴 젖먹이는 어미의 가르침 대신 새되다 할만치 높은 목소리로 움직이는 3D 만화영화를 배우고 있었다.

녹색그리고 파란색 버스가 지나간다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그들은 제 손안에서 명멸하는 작은 세상에 잠겨있었다.

종이 찻잔에 들어있고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마신다찻잔엔 환경을 위한 에코페이퍼 사용이란 글자가 적혀있었다.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바람막이를 바라본다바람막이에 비친 사람은 어느샌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더라도 사회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사람이었다애석하게도 버스정류장에 앉아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차도 너머를 흐리멍덩한 눈으로 바라본다수많은 사람이 지나갔다한국인,러시아인,동남아인,북미인,남미인,중동인,월급쟁이,비정규직,학생,대학원생,불법체류자… 그리고 그중엔 사람이되 인간이 아닌 무언가도 섞여들었다.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울려온다문자가 들어와 있다재난문자였다우리가 알고 있듯 오늘 태풍이 올 것이다.

그리고 SNS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인간베스트란 닉네임을 쓰는 녀석이었다저번 폭설 때 인간의70%는물이 죽고 난 뒤 놈은 강박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그는 오늘 모일 지점을 알려주었다.

내가 문자를 확인하고 응답이 없자 그는 내 닉네임을 적어 호출하였다. ‘오스트랄로사피엔스란 이름과 함께 지겹도록 휴대전화가 울리면 나는 마지못해 답하였다.

[]

그는 나를 부른 이유를 적어 보냈다.

[물건 챙겨오라고]

나는 대충 알겠다는 뜻이 담긴 문자를 보내었다가방을 고쳐매었다가방 속에선 탄창이 부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재난이 불어닥칠 때 제 잇속을 챙긴다대부분은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일이고모두 위험천만한 일이다헬기도 띄우지 못할 상황에서 누군가가 직업 정신과 윤리를 위해 생명을 구할 때 우리는 생명을 버리고 돈을 집어온다그게 우리 직업이다.

신이 있다면 대자연은 신의 뜻이고신이 우리의 원죄를 숨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