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서 총성과 포성이 울려퍼지는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삼엄한 전운은 병사들을 무겁게 짓눌렀고 사방에서 죽어가는 전우들도 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보병부대도 없이 적진에 선 기계화중대는 이제 적군에게 사방으로 포위되어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이센그린 가드너 대위는 투항하라! 우리에게 투항하면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적의 지휘관이 전세의 우위를 틈타 이센그린 대위에게 투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센그린에게는 끝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다. 이센그린은 곧 죽을 운명임에도 큰 소리로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비추었다.
"그럴 수는 없다! 너희 레스톡 왕국은 우리들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고 국가의 전복을 꾀하였으며, 선제타격으로 우리 카그란 제국의 므네몬 마을의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그 중죄를 심판하지 않고 죽는다면 나의 원혼은 너희 나라의 모든 영토를 채우고도 넘칠 것이다. 우리는 항복하지 않는다!"
적의 지휘관 이숨브라스 뱅크스는 이 말을 듣고 '칫'하며 분을 삭였다.
"아직도 제국의 거짓에 속아 놀아나고 있는가! 그대, 이센그린 가드너 대위는 본래 우리의 국민의 일원.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이숨브라스 중령이 살짝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적군에 망설이지 말고 공격을 퍼부어라! 전군 발포하라!"
레스톡 왕국의 군인들이 발포를 준비했다. 그들이 기계에 대고 주문을 외우자 마법진과 함께 기계가 돌아가면서 포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고작 그런 것으로는 이센그린의 신념을 꺾을 수 없었다. 소총을 고쳐매는 이센그린의 눈은 오드아이였지만 적을 부수겠다는 열의는 똑같이 내비추었다.
"전군 발포하라!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카그란 제국의 병사들이 포를 장전하고 기계를 조작하여 발포하기 시작했다. 레스톡 왕국과는 달리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문 카그란 제국이었지만, 기술력과 자본의 힘은 그것을 어느정도 상쇄시키기에 충분했다.

레스톡 왕국과 카그란 제국 사이에서 교전이 오갔다. 그러나 전투가 지속될 수록 이센그린의 중대의 손실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레스톡 왕국에 피해를 지속적으로 주었지만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카그란 제국의 중대가 궤멸되었고, 일부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패닉에 빠져 아무것고 못 하는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 탈영하는 병사들도 속출했다.
상대방의 군대가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이숨브라스 중령은 다시 한 번 포위망을 좁히고 투항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센그린 대위가 항복하지 않자 이숨브라스 중령은 또다시 공격을 명령했다.
기계화중대의 피해는 더욱더 심각해져갔다. 원래대로라면 후퇴하여 편제를 재편성하였겠지만 포위된 상태라 그마저도 불가능하였다.
"모두 마지막까지 항전하여라!"
이센그린도 이제 가망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소총을 들어 마력을 덧씌워 사방에 갈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의 공세에 의한 부상은 피할 수 없었다. 적의 탄환이 그의 옆구리를 맞추고 스쳐지나갔다.
"대위님!"
프레드가 버로우스 중위가 대위의 부상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의 눈은 카그란 제국의 일반적인 눈동자 색인 갈색을 띄고 있었다.
이센그린은 타격의 고통에 신음했다. 사방은 죽어가는 군인들의 시체와 피와 가동할 사람이 없어 방치된 무기들로 가득했다. 살려달라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패배의 운명을 뇌리에 각인시켰다.

이센그린 대위가 분노에 이를 갈며 모두에게 명령했다.
"전군 퇴각! 우리들은 저들의 자랑스런 공적이 아닌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전력으로 남아야 한다! 도망갈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살아남아라!"
아까 결사항전하라고 했을 때의 말과 반대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센그린 대위였다. 모든 병사들은 이에 화색하며 무기를 버리고서라도 바로 줄행랑을 쳤다.
이센그린 대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날아오르자 이내 이센그린 대위는 마법으로 하늘을 날아 카그란 제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후퇴하였다. 프레드가 중위는 그를 따라 장갑차를 타고 지상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센그린 대위는 적군이 쏜 탄환에 중상을 입고 제 힘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이센그린 대위는 최선을 다하 죽음을 피하고자 고도를 조정하였지만, 바닥에 쳐박히는 운명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수풀에 고꾸라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데 이리 허무하게 죽는건가...'
이센그린 대위의 눈이 풀리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더 이상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잠에 빠지며 온 몸에 힘이 빠져갔다.


*

"대위님, 대위님! 정신 차리세요! 예? 정신 차리시라고요!"
이센그린 대위는 귓청을 찌르는 목소리에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프레드가 중위가 보였다. 이센그린 대위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옅은 미소를 띄었다.
"고맙네, 프레드가."
"살았군요. 살아있었군요!"
울고 있던 프레드가 중위의 얼굴에 생기가 빠르게 돌아왔다. 그는 이센그린 대위를 와락 껴안으며 몸을 파묻었다.
"왜 그래, 같은 남자끼리.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이센그린 대위가 그를 슬쩍 밀어서 떼어내며 질문했다.
"중상을 당해 수풀이 쳐박히셨길래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고 국가의 주요 인물이다보니 너무 놀라서, 흑, 대위님의 약으로 치료를 하긴 했는데, 흑..."
"잘 했어, 잘 했어. 울지 마."
기억을 살리다 다시 울컥해진 프레드가 중위를 이센그린 대위가 고맙고 기특해하며 달랬다. 그러나 아직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 질문을 계속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지?"
"예, 여기는 레스톡 왕국의 수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중소규모 도시인 폰토입니다."
프레드가 중위는 아직도 훌쩍이며 최대한 발음이 뭉개지지 않도록 설명했다. 이센그린 대위는 싸울 때 외에는 마음이 매우 약한 중위에게 미소지으며 일어났다. 약이 잘 먹혀들어 몸에 이상은 없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조국으로 귀환하자고. 저기 네가 타고 온 것같은 장갑차가 있는데 그거 타고 가면 되겠네."
이센그린 대위가 장갑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프레드가 중위는 곤란한 듯 말했다.
"그게, 연료가 바닥나서 장갑차로 탈출하기는 무리입니다. 저도 여기에 겨우 온 겁니다."
이센그린 대위가 안타까워 하는 한편 탈출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구하러 온 프레드가를 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걸어가는 수 밖에 없겠네. 그리고 장갑차를 못 쓰니 우리에게 남은 건 소총 두 자루랑 보급품이 든 가방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센그린 대위가 자신의 소총을 꺼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마력이 이미 방전된 상태였다.
"에잇, 이것도 이제 당분간은 못 쓰게 됐네. 아무튼 잘 들어라. 우리는 이제 우리의 본진으로 되돌아갈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폰토를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니 위장을 해야겠지. 옷은 갈아입고 소총은 최대한 숨기고, 그리고 앞으로 호칭은 생략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이센그린 ㄷ, 아니, 이세그린... 어..."
"어차피 대위로 막 승진한 상태라 나이도 비슷하니 그냥 이세그린이라고 불러.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냥 불렀잖아."
"예, 아니, 응."
프레드가가 겨우 말을 되잡았다. 사실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세그린은 둘만 있을 때는 반말을 쓰라고 했지만 규율을 중시하는 프레드가가 자발적으로 썼던 것이었다.
"그리고 너는 선글라스를 쓰는 게 낫겠다. 아무래도 카그란 제국이랑 레스톡의 눈 색깔이 다르니까 안 하면 금방 들키겠지. 넌 병사 훈련할 때 마음 약한 거 안 들키려고 쓰던 거 쓰면 되겠네."
그리고 자신의 가방에서 안대를 꺼내면서 말했다.
"그러면 나는 안대를 쓰면 되겠지. 처음 군대에 들어갔을 때 레스톡인이랑 똑같은 보라색 눈이라는 특이체질 때문에 적개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쓰고다녔던 건데, 지금은 거기에 감사해야겠네."
이센그린이 안대를 꺼내 그의 오른쪽 갈색 눈을 가렸다. 평상시에는 왼쪽 보라색 눈을 가렸기 때문에 약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럼 가보자고."


군복에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폰토로 나왔다. 오른쪽 갈색 눈을 가리니 이센그린은 그의 왼쪽 눈 덕분에 완전 레스톡 사람으로 보였다.
그들은 보급품인 전투식량을 꺼내먹어 허기진 배를 채우고 폰토를 가로질렀다. 앞으로 하루하고도 절반을 밤낮으로 걸어야 돌아갈 수 있는 거리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모든 신경이 쏠려있었다. 다행히 도심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기에 지나가는 데는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도심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였다. 도심 끝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아가씨 한 명이 갑자기 달려와서는 이센그린을 덮치듯 껴안았다.
"에스텔라! 왜 이제서야 돌아온 거야!"
이센그린은 갑자기 달려드는 것에 몹시 놀라며 소총을 꺼내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적의없이 그저 반가움만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그 손을 내리고 어리둥절하게 서있기만 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어디 가서는 계속 행방불명이고, 이 동네에서는 너 찾으려고 아주 난리가 나고..."
"아니,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그리고 에스텔라는 누구인지?"
"넌 뭐냐?"
프레드가가 반사적으로 소총을 꺼내며 그녀에게 겨누었다.
"응? 에스텔라 가미지잖아? 외모랑 목소리랑 다 똑같은데? 나 몰라? 이신다 잔디스잖아."
이신다가 총이 나오자 매우 당황하며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섰다. 한편 이센그린은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거부해봤자 손해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일단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센그린은 모르는 사람이지만 일단 긍정하기로 했다. 그는 프레드가에게 눈치를 주고 말했다.
"맞다, 이신다구나! 오랜만이 보니까 까먹어가지고 못 알아봤네."
"역시 맞았어! 에스텔라! 왜 갑자기 6년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이제 돌아온 거야? 어디갔다 이제 온 거야? 그리고 그 눈은 또 어떻게 된 거야? 그치만 이렇게라도 나타나주니 참 다행이네."
이신다가 다시 얼굴에 웃음꽃을 만개하며 이센그린을 꼭 껴안았고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한참을 있다가 이신다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저 분은 누구?"
"아, 프레... 아니, 프레아단이야. 얘가 밀덕이라 총 갔고 다니거든. 하하..."
이센그린은 프레드가의 이름을 말하려다 말을 바꾸어 가짜 이름을 즉석으로 짜내어 말했다. 그걸 본 이신다는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총을 막 정리하고 있던 프레드가는 살짝 상황을 파악하고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이센그린의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 행동할 지 머릿속에서 계획했다.
그러나 이신다는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이센그린에게 제안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너희 집은 들렀다 가야지. 안 그래? 그리고 그 김에 대체 어디갔다 이제 왔는 지 좀 말해주라."
이센그린은 그 말을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신다의 목소리가 너무 기대에 넘쳐있었고 눈도 사슴의 눈망울처럼 엄청 초롱초롱하게 반짝여서 쳐내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잘 곳도 없는데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 알겠어. 오늘만 딱 자고가지 뭐."
"잘 선택했어!"
그렇게 이신다는 이센그린의 손목을 살포시 잡고 어떤 주택으로 이끌었다. 프레드가도 낙오되기는 싫어서 그들을 졸졸 뒤따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