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온거야? 그리고 눈은 또 왜 애꾸눈이 됐고?"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를 에스텔라의 집에 들인 이신다가 이센그린을 걱정하면서 그의 눈가를 어루만지려 했다. 그러나 이센그린은 방어적으로 그녀의 손을 밀쳐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어가지고..."
이센그린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안대를 풀어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그래? 무슨 사정? 그동안 어땠어? 그리고 우리들이 같이 놀고 했을 때 기억나지? 우리 소꿉친구잖아!"
이신다가 굉장히 흥미로워하며 말을 속사포로 꺼내었다. 이센그린은 그 말에 당혹해 했고, 이센그린은 앞으로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나 지어내었다.
"그게 사고가 좀 있어서 기억이 좀 날아가가지고 옛날 기억은 잘 안 나. 그리고 하는 일도 꽤나 위험한 업무여가지고..."
그것은 거짓이었다. 이센그린은 카그란 제국의 행정도시 리트라에서 어렸을 적부터 고아로 길러져온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레인미트 고아원부터 제국 군사훈련소까지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은 추억들이 그에게 담겨있었다.
"중개무역이 그렇게 어려운 거였던가?"
이신다는 그 말을 믿고 동정의 눈빛을 보내며 앨범을 꺼내왔다. 그리고 그것을 살짝 흔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그럼 이거 보면서 기억 되살리면 되지! 내 이름을 생각해냈던 것처럼 나머지도 살아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이신다가 앨범을 피고 과장된 몸짓으로 사진을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봐, 네 어릴 적 사진. 폰토에서 나랑 얼마나 놀았는데. 친한 사람이 몇 없어서 나랑 자주 놀았잖아."
이신다가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러나 이센그린에게는 그저 제3자의 일생일 뿐이었다. 확실히 그 사진에 나온 에스텔라는 이센그린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아니, 이센그린의 오른쪽 갈색 눈이 레스톡 사람의 보라색 눈으로 바뀐 것 와에는 누구라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었다. 이센그린도 순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고아원에서 지냈던 기억과는 다르게, 무역회사에 취업했을 때 찍었던 사진에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나란히 서있었다. 이센그린이 아는 아버지는 역무원이었다가 아기를 보기도 전에 열차에 치여 죽었고 어머니는 출산의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죽은 케이스였다. 그러나 사진 속의 에스텔라의 부모들은 대마법사인 어머니와 금속 세공업자인 아버지였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네가 나온 마지막 사진은 이거지. 내가 경찰학교 입학했을 때 가족이랑 모여서 파티 열었잖아. 와, 지금 보니까 추억돋는다."
이신다가 가리킨 사진에는 경찰학교를 갓 입학한 그녀와 그걸 축하하러 온 에스텔라 등이 담겨져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뒤풀이에서 같이 술잔을 드는 이신다와 에스텔라가 찍혀있는 사진도 있었다.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순간 싸늘한 오한과 전율이 돋 았다. 하필이면 상대가 무려 경찰이었다.
'죽일까?'
프레드가가 소총을 만지작거리며 이센그린에게 입모양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타이밍 좋게도 이신다는 무언가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건 경찰의 상징인, 만에 하나 죽거나 다치면 바로 경찰이 달려오는 배지! 졸업하면 가질 수 있는 건데, 이거 발급되고 너 보여주고 싶었는데 네가 갑자기 실종되어버리고..."
이신다가 갑자기 우울한 톤으로 말했다. 이센그린은 그녀가 말이 많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프레드가는 속으로 눈치껏 소총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어 정자세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네가 돌아간 후에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길어봤자 1년이면 온다고 했었는데 6년이 지나도 안 왔다고. 마을 사람들이랑 친구들이 죄다 찾으러다니고, 내가 들어간 경찰에서도 직위를 이용해 수소문했는데 하도 안 와서 거의 미제사건이 되어버렸잖아. 그래서 너희 아버지는 충격먹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고, 또..."
이신다는 아직도 슬픈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빙그레 웃어보이며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네가 지금이라도 돌아와주니, 뭐랄까, 기뻐. 아니, 황홀하달까 행복하달까 반갑달까, 이거 단어 하나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네..."
이센그린도 그녀를 따라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진짜로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신문에서 이산가족 상봉 뉴스를 볼 때 같은 감정이 조금이나마 밀려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 말을 못 해서 계속 힘들었던 말이 있었어. 더 이상 기다리면 나도 맛이 가버릴 것 같으니까 지금 말해야겠어."
이신다가 이센그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얼굴과 얼굴의 거리가 가까워지니 어느새 이신다의 숨을 고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좋아해! 그동안 쭉 좋아했어!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이신다는 여러 차례 준비한 듯 문장들을 당돌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이센그린을 정말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센그린은 예상 밖의 일에 동공이 지진하고 뇌의 사고가 순간적으로 정지하였다.
"아니, 그, 그게, 나는 아직 기억이 없어서 그건 무리야. 솔직히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이센그린이 최대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회피했다. 이신다는 아쉽다는 듯 몸을 다시 멀리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여러 번 연습했던 듯 다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거리를 또다시 가까이 하며 말했다.
"그럼 기억을 되돌리면 되겠네. 바로 경찰서로 가자!"
그 말에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겉으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까무라치며 가기를 주저했다.
"지금 가는 건 너무 갑작스럽운데. 그리고 그 전에 옷 좀 갈아입고 싶은데 괜찮을까?"
"물론이지! 옷장에 옷 여러 벌 있을테니까 그거 꺼내입으면 돼. 그보다도, 생각해보니까 시간 늦었네. 경찰서는 내일 아침에 가자."
그 말에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일단 안도할 수 있었다.
"어디서 자면 돼?"
"여기가 네 집이니까 여기서 자면 돼. 2층이 침실이고, 너희 어머니는 오늘 집에 안 돌아오신다니까 집에는 너희뿐이야."
"음... 그럼 챙겨볼까?"
이센그린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 와중에도 이신다의 말은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바로 옆집에서 혼자 사니까 올 거면 와. 물론 너라면 그렇고 그런 짓도 허락해줄테니까."
이신다가 요망하게 오른쪽 손을 입에 올리고 눈빛과 말투까지 바꾸면서 덧붙였다. 이센그린은 진심이 가득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녀가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빠르게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럼 잘 자."
"너도!"
이신다가 생기발랄하게 한 마디 덧붙이며 문 밖을 나섰다. 그러다가 뭔가 까먹은 듯 다시 안으로 빼꼼 들어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아, 생각해보니 전쟁 때문에 이제부터 통금이라 길 못 쓰네. 오늘 밤은 아쉽지만 넘어가줘야겠다."
그렇게 이센그린과 프레드가는 그런 이신다를 보며 끝까지 저러는 것도 참으로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휴, 진땀 쏙 뺐네. 그나저나 에스텔라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실종되가지고 이 모양이냐?"
이센그린이 불평하며 말했다. 프레드가가 거기에 덧붙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그보다도 저 이신다라는 메가데레 경찰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지만."
"그리고 지금에서야 말하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네가 평상시의 그 마음 여린 성격이 진짜 다행으로 느껴지네. 너 아까 쐈으면 진짜 우리 ㅈ될 뻔했어. 보통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이신다 같은 애 오자마자 바로 소총 꺼내들고 쐈을 텐데 말이야."
"그래. 제국의 선전도 있었으니 더 그랬겠네. 그 내용이 대충 '보라색 눈의 악마를 경계하라. 마법으로 침투해 우리를 교묘히 무너뜨리는 악마같은 족속들이다.'였지?"
"응, 확실히 그랬지. 그나저나 우리 안 올라가냐?"
대화 도중에 아직도 계단 위라는 것이 생각난 이센그린이 프레드가에게 깨우침을 주며 발걸음을 돌렸다. 프레드가도 그를 뒤따라갔다.
"그렇네. 올라가야지."


*
"그나저나 우리 이제 어떡하냐? 통금 걸려서 아침 되자마자 이신다 그 놈에게 악의는 없지만 바로 경찰서로 끌려갈 판인데."
"맞아. 이신다 걔라면 통금 끝나자마자 바로 튀어나올 놈이라고. 걔가 오라고 했을 때 갔던 내가 바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기어이 거절했을 텐데 말이야."
프레드가의 말에 이센그린이 앞날을 걱정하며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하필 걸려도 그 놈이라니, 보병부대도 없이 기계화부대로만 혈혈단신으로 파고들어갈 때부터 재수 옴 붙었단 말이지."
이센그린은 그러면서 보급품이 들어있는 가방과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총은 어느새 마력 게이지가 반 이상 차 있어 내일이면 전부 다 찰 것으로 보였다.
프레드가가 갈아입을 옷을 고르기 위해 에스텔라의 옷장으로 갔다.
"그보다도 모르는 사람의 옷을 이렇게 마음대로 쓰다니 뭔가 양심이 찔린단 말이야."
프레드가가 그 말과 함께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양복이니 농업복이니 작업복이니 하는 갖가지 옷들이 다 있었다. 프레드가는 그 가짓수에 압도되며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근데 무역하는 애들은 전부 다 옷이 이렇게 많아요?"
"그런가보지. 그 에스텔라라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역 중개하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센그린의 말에도 프레드가는 그 경이로움에 놀라며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마침내 옷을 하나 집어들었다. 무역하면서 입었을 법한 잘 차려진 양복이었다. 이센그린도 그를 따라 신사복 한 벌을 꺼내들었다. 이 와중에 프레드가는 옷장을 둘러보더니 신기해하며 말했다.
"우와, 이 사람 밀덕이었나? 우리 카그란 제국 군복도 있네."
이센그린이 그 말을 듣고 그쪽을 바라보니 진짜로 그들이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입고있었던 군복이었다. 전투에서 줄행랑치느라 헤질 대로 헤진 그들의 군복과는 달리 잘 다려진 옷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알겠다. 얘가 카그란 제국 군복도 갖고 있어서 우리가 생활복을 입고 있어도 경찰인 이신다가 아무렇지 않았던 거네."
이센그린이 그 말을 하며 일단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생활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프레드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네 말대로 남의 옷 맘대로 입고다니는 건 살짝 꺼려진단 말이지."
그걸 본 프레드가는 불을 끄고 침대에 따라 누웠다. 그들은 누워서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근데 넌 만에 하나 내가 진짜로 에스텔라랑 같은 사람이면 어떻게 할거냐?"
"글쎄,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봐줄 수도 있고 즉살할 수도 있고. 일단 네 기억이랑 완전히 다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렇게 그들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