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요약




*



7/27

<예언의 날까지 9일 남음.>


26일, 어제의 이야기다.

괴이한 사람이 와서 "앞으로 열흘 남았다" 는 둥 지껄였다.


벽에는 어느샌가 열 십十자가 그려져있었다.

틀림 없이 피로 그린 것이었다.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피였다.


"벽에 열 십十? 내겐 안 보이는데."


아씨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서워서, 화나서.

흔들리던 정신머리 그대로 어제도 아씨를 때렸다.


"이래도 안 보이슈? 이래도?!"


아씨는 울면서 사과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정신머리가 돌아왔다.


아씨를 볼 면목이 없어 뛰쳐나갔다.

나가니 전에 봤던 동료가 있었다.

그, 뚱땡이와 홀쭉이 2인조 처형인 있지 않은가.


그 중 오늘은 뚱땡이만 있었다.

낯이 어두웠다.

나처럼.

먼저 가서 인사했다.


"아침부터 얼굴이 죽상이구려."

"하하, 그래보이시오?"

"숨길 기미도 없더만."

"오랜만이오. 한동안 서로 일이 바빴으니 3주만이던가?"

"2주만이오."


실로 그렇군-.

사내가 읊조렸다.

의아한 점을 물었다.


"그 야윈 분은 어디로 갔소?"

"누구 말이오?"

"항상 같이 다니던 동료 말이오."

"그 친구도 죽었소."

"어쩌다가?"

"박철수 사건의 소문 기억하시오?"

"기억하오. 목은 잘렸는데 핏자국은 없었다고."

"똑같이 죽었소."


남자가 고개를 떨궜다.


"어쩌면 참말로 괴력난신일 지도 모르겠소. 얼마 전엔 내게도 꺼림칙한 일이 생겼고."

"하아, 나도 그렇소. 낙서로 치부하기엔 불길하니 원."

"낙서...? 혹시 피로 그렸던 숫자 낙서 말이오? 그럼 자네도-."


남자가 표정을 썩히더니 갑자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며칠! 며칠 남았다고 했소!"

"며칠? 자네도 설마...."


서로의 기담을 까발렸다.

물론, 아씨와 관련된 얘기는 꼭꼭 숨긴 채.


결론부터 말해서, 완전히 같은 케이스였다.

한밤 중에 찾아온 손님.

신체부위가 결손된 기형.

문을 닫으니 집안에는 피로 그린 낙서.

그리고 "열흘 남았소" 의 경고.


"우리만은 아닐게요."


남자가 기쁘지 않은 가설을 주장했다.


"내 친구녀석도, 얼마 전에 죽은 그 녀석도 똑같은 말을 했소."


빼빼 마른 사내를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그땐 농담으로 여겼지만 둘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면 셋이라고 다를 리 없지."

"그럼 박철수는?"

"박철수도 생전에 비슷한 말을 했었소."

"그렇담 살해 예고란 말이오?"

"아마도."

"어째서 나를... 우리를."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사내에게 물었다.


"무당은 불러봤소?"

"용하다는 놈들 싹다 불러봤으나 효력이 없소."

"허어... 앞으로 며칠 남았소?"

"사흘."


아.

저승문에 선두에 서 있는 자였다.

숙연해졌다.


"여색도 맛보지 못하고 이대로 끝나는 겐지."


말은 태연하게 하면서도 눈은 빛 한길 없었다.

동질감이 느껴져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었다.

가볍게 농을 던졌다.


"여인이라면 여기 있소만."

"집어치시오. 알맹이가 뭐하는 작자인지 빤히 알고 있는데."

"하긴, 나도 별로 할 마음은 없었소."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만일에 말이오."

"음?"

"아, 아니오. 내가 미쳤지."


싱겁게 남자가 자리를 떴다.

집에 돌아와서는 모든 걸 잊고 드러누웠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으나 아무 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씨는 내가 국을 떠먹여줄 때마다 움찔거렸다.

어제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벽에 박혀있던 열 십十자가 아홉 구九자로 변해있었다.

잠결에 소란스러웠지만 깨지 못했다.

누가 찾아왔던 걸까.



*



7/28

<예언의 날까지 8일>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떨면서 집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이 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리지 않는 척 몸을 웅크렸으나 문은 스스로 열렸다.


"오늘은 깨있구려."


저번에 봤던 그 놈이었다.


"여드레 남았소. 잘 알아두시오."

"여드레가 지나면 어찌 되는 것이오. 어찌 되길래 이리 나를 괴롭히는 게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소?"


놈이 낄낄거리며 사라졌다.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벽의 문자는 여덟 팔八자로 변해있었다.


절규했다.

살고 싶었다.



*



7/29

<예언까지 7일>


아침부터 날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

'그 놈' 은 밤에만 찾아왔다.

슬며시 문을 열었다.

나보다 초췌한 얼굴의 사내가 보였다.


"잘 지냈소?"


그 뚱땡이였다.

지금은 바짝 말라있었다.

뚱땡이가 아니게 된 뚱땡이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받으시오."

"이게 무엇이오?"

"그간 알아낸 걸 정리해봤소."


편지의 안쪽에는 먹으로 뭐라 쓰여져있었다.

사내가 내 손을 붙잡으며 당부했다.


"지금은 보지 마시오."

"하면?"

"경고에 따르면, 나는 오늘까지요. 내가 죽거든 보시오."


어떤 연유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사내의 비장함에 압도되어 "알았소" 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걸 주는 대신, 부탁이 있소."

"무슨 부탁이오."

"만약 오늘 밤에 내가... 박철수 녀석처럼 죽게 된다면 말이오."

"마저 말하시오. 어찌 사내대장부가 그리 뜸만 들이시오?"

"시신을 수습해 줄 수 있겠소?"


아.

처형인이라는 지위는 서럽다.

망나니는 양수(陽壽)를 깎아먹고 피비린내를 풍기는 직업이라했다.

뭇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이란 말이다.

부인을 못 얻는 것은 기본이요, 심한 경우엔 가족들에게 거부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내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그리하겠소."

"고맙소. 죽어서도 잊지 않겠소."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생전에 갚을 생각을 하시오."


내 말에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굳게 닫은 입에 눈물이 떨어졌다.

사내도 울고 나도 울었다.


오늘도 여지 없이 밤에는 허리 없는 귀신이 날 찾았다.

오늘도 여지 없이 벽에 문자는 바뀌었다.



*


7/30

<그 뚱땡이가 죽었다.>


관아엘 다녀왔다.

뚱땡이에게 큰 의리는 없었다.

상까진 치뤄주지 못했다.

말그대로 수습만 하였다.


관아에서 날 꼬치꼬치 캐물었다.

최초발견자인 날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바쁠 것 같다.

바쁘대봤자 6일 정도겠지만.


제깟 놈들이 망자를 어찌 추궁하겠는가.

6일 후면 나는 내세에 있을 터인데. 하하.


아씨에게 자꾸만 분풀이를 하게 된다.

정신머리가 온전치 않은 시간이 늘어만 간다.

열흘이란 시간이 닳아갈 수록 하루하루가 갑갑해져간다.


아직 편지는 열어보지 못했다.

지쳤다.

내일 열어볼 예정이다.



*



7/31

<예언까지 5일>


낮에 처형을 했다.

처형을 하고 온 날은 늘 그렇듯 머리가 어지럽다.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


평범한 참수였음에도 그러했다.

이젠 참수조차 싫다.

버티기 힘들다.


차라리 빨리 죽으면 마음은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목을 맬 용기는 없었다.

자꾸만 도중에 그만두게 된다.


처형을 끝내고 싶다.

애초에 어쩌다가 내가 이런 꼴이 된 걸까.

사람 수명을 깎아다 돈을 버는 꼴이 된 걸까.


처음엔 단지 삼국시대로 전생했을 뿐이었는데

어쩌다 사형수가 된 거고

어쩌다 아씨와 신분이 바뀐 거고

어쩌다 처형을 하게 된 걸까.

그리고 어쩌다 이런 께름칙한 협박을 날마다 받게 된 걸까.


오늘도 벽과, 불쾌한 손님은 여전했다.

아씨의 눈에 시퍼런 멍이 하나 더 추가된 것도 여전했고.

어째서 아씨에게 이런 누를 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만 써야겠다. 잠이 달아나 돌아오지 않는다.



*


8/1

<편지를 잊고 있었다.>


예언까진 4일 남았다.

어젠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젠 바빴다.

오늘에서야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는 내용이 8할.

모르는 내용이 2할.


찾아와 협박하는 이는 망령일 것이라고 한다.

편지에 따르면.


그럴 듯한 예상이었다.

허리 아래가 없이 둥둥 떠다니는 게 인간일 리가 없지.


피해자마다 찾아와 협박한 망령은 다른 이들이었다고 한다.

모습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누구는 외팔이었고 누구는 목이 없었고.

나처럼 허리가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대부분 사형집행인들이었다.

우리 마을은 몰라도 옆마을이나 아랫마을에선 이미 수많은 사상자를 낸 모양이었다.

임금에게도 상소가 올라갔다나.

망령은 대저 집행인 자신이 처형한 이들 중 하나였댔다.

즉, 원혼이란 것이다.


부적은 어느정도 먹히지만 무당은 소용이 없다고 했다.

유일하게 마음에 든 구절이었다.

어쨌건 부적은 먹힌다는 거니까.


응당 시장에 가서 부적을 한가득 구해왔다.

이 정도나 필요할까 싶은 만큼 구해왔다.


오늘 문앞에 붙여둘 것이다.

마침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주는 망령이 있지 않은가.

효능이 나와야 할 텐데.


*


8/2

<예언까지 3일>


부적은 효과가 좋았다.


"게 아무도 없소?" 라며 어제도 문을 두들기던 망령.

망령은 잠시 소란을 피우다가 돌아갔다.


"칫, 부적인가."


벽에 새겨졌던 문자도 그 순간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끝났으면 해피엔딩이었다.


"나 왔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부적이 있지 않은가.

망령도 처음 몇번은 문을 못 열어 낑낑거렸다.


"역시 혼자선 안 되겠구만. 힘 좀 빌려주게."

"어기영차!"


뿌득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에 붙었던 부적이 타들어갔다.


"재미 없는 짓 하지 마시구려.

댁 잡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령이 한무더기요."


망령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깟 부적이야 머릿수만 많으면 금방 깨지니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땅에 엎드려 울었다.

부적은 해답이 되지 못했다.

벽의 무늬는 당연하다는 듯이 바뀌었다.


아씨는 세상 모르고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하루하루 떨며 살고 있는데 아씨는 두발 쭉 뻗고 자는 것이다.

참을 수 없어서 아씨에게 또 몹쓸 짓을 하였다.



*


8/1

<예언까지 2일>


아침부터 날 찾아온 이가 있었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꽁꽁 싸매어 정체는 알 수 없었다.


"김망난의 집이 여기 맞소?"

"내가 김망난이오."

"김망난은 여자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였나보군."

"무슨 일시오. 용건이 없다면 물러가주시오."

"따라오시오 그댈 찾는 사람이 있소."


산발에 생기 없는 눈.

다른 이가 봤다면 폐인으로 착각했을 모습.

내 모습이었다.


그들은 내 눈을 가리고 날 끌고 갔다.

끌고 간 곳에는 가면을 쓴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복장에서 돈과 권력의 한패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가 김망난이라지?"

"내, 유명인사라도 된 기분이군. 다들 나만 찾으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네."

"망나니한테 그런 고급진 언어는 안 통하는 거 모르시오?"


연이어 퉁명스레 대하니 재미있다는 양 껄껄 웃었다.


"허허, 내 수하들이 자넬 험하게 다룬 모양이로군."

"알면 다음부터 부드럽게 대하라고 하시오."

"명심하지."


이름 모를 권력자가 말을 이었다.


"내,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니네."

"망나니한테 할 부탁이라면 어렵진 않으시겠지."

"단칼에 벨 수 있겠는가?"


흔한 부탁이었다.


"누구를 말이오."

"이름은 말할 수 없다네."

"죄명은 어찌 되는 게요?"

"그또한 말할 수 없다네."

"그럼 관두시오."

"이래도?"


권력자 양반께서 주머니를 짤랑거렸다.

상당한 양의 금이 들어있겠지.

하나 곧 있으면 죽는 몸인데 금이 다 무슨 소용이던가.


"필요 없소."

"이럼 남은 건 명령 밖에 없는데."

"마음대로 하시오. 난 두려운 것 하나 없소. 댁이 내 목을 치더라도."

"허어."


완고한 사람이구만-.

권력자 양반께서 한숨을 쉬었다.


"그럼, 거래는 관두고 다시 부탁으로 돌아가겠소."


권력자 양반께서 가면을 벗었다.

기품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성지, 천경림에 관련된 일이오."

"천경림. 또 어떤 미치광이가 천경림에게 목이 날아가고 싶은 모양이신가보구려."

"그대가 칠 목은 이 사람이오."


권력자 양반께서 스스로를 가리켰다.

어안이 벙벙해져 한순간 입을 다물게 되었다.


"무슨 말이시오?"

"자세한 건 내일 새벽에 알려주겠소."


그가 손짓하자 좌우에서 대기하던 부하들이 날 잡아끌었다.

다급해진 나는 끌려가는 도중에 외쳤다.


"그게 무슨 뜻이오! 내일 새벽이라니!"

"장소는 뒷산의 계곡 아래 정자요."

"이보시오!"

"혹, 바라는 게 있다면 생각해두시오!"


동문서답.

막무가내로 권력자 사내는 말했다.


한참을 검은 남자들에게 끌려간 나는

"놓으시오! 아녀자를 이리 난폭하게 다룬단 말이오!"

라고 일갈해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앞으로 고작 이틀 남았다.

바라는 것이라면 불 보듯 뻔하다.

그 치가 뭐하는 작자인지는 몰라도 이 소원을 이루어주진 않으리라.


하나 찝찝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엎어치나 메치나 결과가 똑같다면 기왕에 생긴 궁금증이나 해소하고 싶다.


내일 새벽이라 하였다.

틀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