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좆같다. 도시는 부조리하다. 이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도시를 보기 싫어 검은 가면을 쓰고 나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내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그 누구도 허용하지 않았다.  안젤리카 그녀가 나타나기 까진.


그녀는 컴컴한 어둠만 존재한 나의 세계에 들어온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였다.  

은신처를 수많은 해결사들의 핏줄로 장식한 핏빚밤 엘레나를 토벌할때 나대신 흡혈 당해 쓰러진 안젤리카.

그녀가 내게 남긴 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시간이 흐르고 안젤리카와 결혼했다.  연기전쟁 참전자는 둥지에 이주하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달랫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9구에  피아니스트가 나타낫다. 피아니스트는 뒷골목의 8할, 30만명을 몰살했고 그중에는 안젤리카도 포함되었다.

그날 내 세계는 무너졌다.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한치라도 의심가는 것들은 손에 가는대로 베어갔다.


그래. 그 일은 나와 관계없는 사건이었어. 부디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는건가...? 제발... 내 아들이 저기서 부르고 있다고!

이딴건 아들도 뭣도 아니야.


나에게는 아직 먹여 살려야 하는 딸이 있어

저 톱니들도 누군가의 가족 이었겠지 


결코 뒤돌아 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  뒤틀림의 원인을 찾기 위해, 낙원을 부숴버린 존재를 찾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안젤리카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이 욱신 거린다.  뒤틀림의 원인을 찾는 답시고 무리하다 다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뒤틀림의 원인을 찾기 전 까진

죽을 생각은 없다.


하아...  뒤틀림의 원인이 보이지 않는다.  썩어빠진 뒷골목을 걸을 무렵  땅에 떨어진 뉴스 기사를 보았다.

뻔하다. 아내를 잃고 미친 검은 침묵이 도시를 휘저으며 무차별 살육을 벌이는 내용이겠지.

하지만 기사의 내용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은침묵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30만명을 돌파...


사랑하는 아내를 앗아간 뒤틀림의 원인을 찾을 뿐이었는데...  피아니스트와 맞먹는 희생자를 내가 만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틀비틀 거리며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엉망진창 이었다.  나를 저주하는 글귀가 이곳 저곳 적혀있엇다.

다행스럽게도 집안은 깨끗했다.  거실의 소파에 누워 생각한다. 내가 정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뒤랑달을 장갑에서 꺼낸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해결사 시절 읽었던 책의 글귀다.  


뒤틀림의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30만명에 달하는 희생자. 니체의 글귀가 옮았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원인을 찾기 위해 도시를 쑤시고 다닌 나는 피아니스트 못지 않은 괴물이 되었다.


뒤랑달을 목에 가까이 가져간다.  소름끼치는 감각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쿨럭 


입에서 검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누적된 부상으로 내장이 손상된 모양이다. 검은 침묵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다.


검은침묵은 뒤랑달을 다시금 자신의 목에 겨눈다.  검은 침묵은 잠시 심호흡을 한뒤 있는 힘껏 자신의 목을 베어낸다.


바닥에 깔린 타일에도,  결혼사진에도,  태어날 아기를 위해 마련한 요람에 롤랑의 피가 흩뿌려졌다.


의식이 흐려지는 롤랑은 눈물을 흘리며 작은 목소리로 한탄한다.

자신의 옆에 나뒀어야 했다.  그날 내가 파전을 사러 가지 말았어야 했고, 올리비에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아야 했다.


롤랑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