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




밤 중에 목이 말라 깨었습니다.


주방까지 가서 냉장고를 뒤지긴 귀찮았어요.


머리맡을 이리저리 손으로 휘저었습니다.



"... 없어."



히잉.


분명히 머리 근처에 물통을 놓아두었을 텐데.


물이 스스로 달아난 걸까요. 기묘한 일이에요.


뽀시락뽀시락거리며 이불을 걷어냈습니다.


문을 열려고 보니 문 너머에서 희미한 빛이 새고 있었습니다.


주인님도 깨어계신걸까요?


뭐라 말소리도 들렸습니다.



"꼭 그래야하는 거야?"


"그래."



식탁에 사람이 둘이었어요.


한쪽은 주인님.


다른 한쪽은 양복을 입은 음... 아 맞아, 기억났어요!


주인님의 친구분, 일전에 뵀던 적이 있었습니다.


두분 다 진지한 표정이셨어요.


주인님이 한탄했어요.



"믿기 힘든데. 영업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믿기 힘든 게 아니고 싫은 거겠지.

나는 캐피탈 사원이기 이전에 네 친구야.

내가 너한테 물건 팔아먹겠다고 사기를 치겠어?"


"효능은 어느 정도인데?"


"한번 먹이면 1주일 동안은 잠잠해."


"복용을 중단시키면?"



복용? 효능?


주인님이 드시는 약이라면 분명 폐렴, 저혈압, 우울증.


이렇게 세개였습니다.


셋다 일주일을 약 한알로 버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담 주인님의 약 얘기는 아닐 텐데....


그치만 복용이네 효능이네 하는 따위의 단어면 약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당하지 않나요?


제가 모르는 약이 또 있는 걸까요?


주인님의 친구분이 말씀하셨어요.



"마지막으로 먹은 약이 언제까지 신체에 남아있게 되는지는 개체에 따라 달라.

기록상으론 6개월씩 가던 개체도 있었고.

그래도 짧은 애들은 7일인 애들도 있었으니 하는 말이야."


"그렇담 끊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주인님이 한숨을 쉬자 친구분이 역정을 내었습니다.



"야인마 정신 차려!

넌 인생이 복권메타냐? 위험하다니까!

그건 그냥 괴물이야, 괴물!"


"괴물치곤 무해한 인상이지 않아?"



주인님이 피식 웃었습니다.


친구분의 노기는 사그라들지 않았어요.



"거죽은 그렇겠지!

괴물을 잡으려고 만들었는데 괴물이 아닐 리가 있어!"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돈이 공중분해 되어버렸는데 그 호화로운 삶을 이어나가라고?"


"그 얘긴... 아니지만."



침묵.


분위기가 슬퍼보이는 침묵이었어요.


아니 그보다, 주인님의 돈이 날아갔다고요?



"정 그러면... 처분하는 수도 있겠지."


"팔라고?"


"아님 버리거나."


"그 비싼 걸?"


"고정지출을 줄여야 하잖아."



허튼 소리 말아.


주인님은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슬픈 점 하나.


아침에 일어나서는 주인님이 기르시던 햄스터가 하나 사라졌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주인님께 여쭤보았을 땐 한사코 그리 부정하셨어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주인님의 결정이신 걸로만 보였어요.


탈출한 것치곤 우리가 무척 얌전한 모습이었는 걸요.


마치 자고 있던 햄스터를 슬며시 들어올려 어딘가에 방생한 듯이.


주인님을 의심하는 건 좋지 않지만 여하간 그렇게 비춰졌어요.


그렇다면 간밤에 주인님께서 처분을 하네마네 하던 것은 햄스터였겠구나 싶었습니다.


한데 불길하고도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젯밤의 회의의 주제가 햄스터였다면, 어떤 경위에서 주인님은 그걸 숨기려는 걸까요.



'재정난이라 햄스터를 방생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밝히면 될 텐데.


더불어, 햄스터에게 약물을 먹인 기억도 없습니다.


지금껏 햄스터를 관리하는 건 거진 제 역할이었음에도요.


꼬치꼬치 캐묻는 건 주인님이 싫어하시곤 합니다.


밤중에 가버리셨으니, 그 친구분에게 몰래 여쭙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 다음에 오시면 여쭤봐야겠다."



끙끙대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 마음 먹고 도로 잠이나 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계획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잠자리가 바뀌어있었거든요.



"바닥이 딱딱해...."



아스팔트 바닥이니 딱딱할 수 밖에요.



"물방울 차가워...."



비가 내리고 있으니 차가울 수 밖에요.


주인님의 집에서 살 땐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각에 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깼냐?"



간사하게 웃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어요.


주위는 차도. 비 내리는 차도.


왜 주인님의 집이 아닌가?


그리고 이 거지꼴을 한 여자아이는 누군가?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상황 파악 안 되지?"


"... 꿈인가?"



몰래 중얼걸릴 속셈인데 귀가 밝았나봅니다.


거지꼴 여자아이가 사악하게 웃더니 제 뺨을 후려갈겼어요.



"아야!"


"이래도 꿈 같아?"



현실인 걸 자각시켜주는 것치곤 고전적인 방법이네요.


얄미운 방법이기도 하고.


얄미운 아이에게 침착하게 물었어요.



"너, 새로 온 ts녀야?"


"응?"


"꿈이 아니란 건 알았어.

그럼 여기가 주인님 사유지거나 그렇겠지 뭐.

너는 주인님 사유지에 있는 것 같으니 하는 말이야.

너, 새로 온 ts녀야?"



피식.


아이가 웃었어요.



"깔깔깔! 새로 온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너 아주 웃기는구나? 머리도 안 돌아가고!"


"머리가 뭐가 안 돌아가. 내 말이 틀렸어?"


"틀렸지 그럼, 넌 이제부터 우리랑 똑같은 알거지 길틋녀인데!"



알거지? 길틋녀?


이 여자가 뭐라고 떠드는 걸까요.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너희 주인은 여기에 널 버리고 간 거라고."



아이가 알긴 쉽지만 받아들이긴 어려운 쐐기를 박았습니다.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습니다.



"그럴 리가. 주인님이 얼마나 날 아끼셨는데."


"어휴, 그러셨어?"


"옷도 예쁜 걸로 가끔씩 사주셨다고."



듣기로 다른 집 집틋녀들은 캐피탈에서 보내준다는 양산형 값싼 옷만 입힌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평범한 옷가게에서 비싼 옷도 사 입었습니다.


주인님의 은덕이죠.



"그래? 그 옷은 다 어디갔는데?

지금 네 옷은 그 모양이잖아."



그제서야 몸뚱이를 보니 거지꼴 누더기였습니다.



"아냐. 주인님이... 주인, 주인님은...."



뭐라 반박을 해야하는데.


조금씩 얼굴 근육에서 힘이 빠져갔습니다.


다리에서도 힘이 풀려서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아, 아아 하며 신음이 샜습니다.



"히히, 좋은 구경 했다!"



아이는 만족한 듯 깔깔거리며 빗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슬픔은 둘째치고 어쨌든 비를 피해야 했습니다.


한참 울고서야 흐느적흐느적 일어나 걸었습니다.


피할 만한 곳은 여럿 있었으나 하나 같이 임자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기 들어오려고? 사람이 많아서 안될 텐데."



그렇게 말하는 길틋녀들의 보금자리는, 정말로 만원이었습니다.


휘적휘적 빗물에 절은 몸을 이끌고 걷다보니 겨우 폐건물 하나를 찾았습니다.


안에는 틋녀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10명 남짓이었습니다.


자리는 넘쳤죠.



"머꼬, 니 신입이가?

니 밥은-."



건물의 대빵인 듯 보이는 여성이 말을 걸었지만 무시하였어요.


지치고 서러워서 피곤한 몸을 그대로 뉘였습니다.


횡경막이 부르르 떨려 히끅거렸어요.


흑흑히끅히끅.



"언니. 좀 봐주세요. 길틋녀 된 지 얼마 안된 애 같은데."


"맞아요. 가엾잖아요."


"봐주긴 멀 봐주노. 내는 그양... 심아리도 없이 생겼는데 밥은 무웄나 싶어가...."


"밥이야 이따가 그분 오시면 알아서 먹겠죠."


"지금은 혼자 있게 해주죠."


"칵 마! 알았다 알았어! 내 이 오시랖이 벵이지 벵!"



내게 화제인 모양이네요.


폐건물의 원주민들은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해졌습니다.


조용한 폐건물에는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불평만 들렸습니다.



"띠리한 지지배들, 내만 억시기 갈구네."



그 말에 푸핫 하며 몇몇이 웃었습니다.


마음 써주는 거야 고맙지만 기왕이면 더 본격적으로 써줬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금 간 정신으로는 저런 잡담 하나하나조차 성가셨습니다.


잡음이 날카로운 단검이 된 기분이었죠.


그 단검이 머릿 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놓는 기분이었어요.


이윽고, 단검치고는 거대한 잡음이 들려왔어요.



'딸랑, 딸랑딸랑! 딸랑딸랑.'


"배 안 고프십니까 멍!"



*




<서우>



"형님은 아직도 못 찾으셨는지요."



부하 녀석이 '얼라리?' 하는 얼굴로 날 보았다.


참, 이젠 형님이 아니겠구나.



"오라버니는 아직 못 찾으셨는지요?"



여자된 지 몇개월 되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었다.


익숙해지질 않았다.



"예. 단서가 없으니 힘들더군요."



부하 녀석이 변명을 해댔다.


암담하여 이마를 턱 짚었다.


형, 아니 오빠하고 헤어진지 몇년씩 지났다.


헤어졌다기보단 내가 일방적으로 거리를 둔 것이었다.


그랬다가 내 잘잘못을 지워낼 때가 됐다고 생각해서 형님을 찾으러 갔다.


그리고 이게 웬 걸? 집에 없다잖은가.


이후로 몇달씩 행방불명 상태였다.


답답한 일이었다.



"얘, 서우야."



질책하려던 와중에 선배가 나를 부르셨다.



"... 한주만 더 드리겠사와요.

오라버니, 꼭 찾아놓으시어요.

이건 명령이와요."



당부만 몇개 던지고, 작은 날개를 뽈뽈 팔랑여 날아갔다.


꼭 내 책상에서 선배 책상만큼의 거리.


내 몸의 10배나 되는 이 짧은 비행의 끝에서, 나는 잠깐 선배의 노트북 위에 걸터앉아 날개를 쉬게 하였다.


선배는 내 꼴을 보고 쿡쿡 웃으셨다.



"안 부끄럽냐?"


"몸 따라 수치심도 콩알만 해져서 안 부끄럽사와요."


"TS 되더니 많이 뻔뻔해졌구나."



TS, 요 얼마전에 받았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여자다.


좀 많이 작은 여자.



"뭐, 그 몸으로 앉아도 노트북에 이상은 없겠지만서두."


"컵 한잔보다 작은데, 이 몸으로 걸터앉는다고 고장나면 그건 불량품 아닐런지요?"



손바닥 크기 정도의 몸.


요정처럼 산뜻한 초록색 긴 머리에, 초록색 눈.


씻지 않아도 늘 청결한 몸이며, 공주님 풍의 드레스.


한쌍의 나비를 닮은 날개.


현재 내 신체였다.



"말 나왔으니 물어보자.

너 물 마실 땐 어떻게 하니?"


"페트병 뚜껑에 옮겨서 핥사와요."



옹달샘 물 떠먹는 토끼 비슷한 자세로.


쿡쿡 웃던 선배가 빵 터지셨다.



"푸하하! 재밌겠네! 물 한번 먹을 때마다 모험일 테니."


"마시는 제 입장에선 귀찮기 짝이 없사와요."


"그럼 왜 소인으로 한 거야?

평범한 사이즈로 TS 했으면 됐잖아.

너 사내복지 개념으로 지원하던 거에 신청한 거 아니야?"


"그...."



사내복지 개념으로, 우리 [틋녀 캐피탈] 에선 당사의 남성 사원들 중 신청자에 한해, TS 를 시켜준다.


몇몇 이들에게는 특별한 '옵션' 을 추가적용하여 TS 시켜주기도 하였다.


고양이귀라던가. 실전압축근육이라던가. 하이스펙의 체력이라던가.


덕분에 많은 수의 사원들이 과학 기술로 TS녀가 되었다.


개중엔 불편하던 몸을 고치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 경우엔 조금 달랐지만.



"설명하면 복잡한 것이와요."



누가 미쳤다고 말투 고정과 소인 신체를 옵션으로 걸겠어.


덕분에 매일매일 돌아버릴 듯한 기분이다.


김 상무, 그 인간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나쁜 놈.



"아무튼 서우야 김 상무가 너 찾더라."



이 녀석, 어지간히 할 일이 없었나 보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지만 나는 아직 '말' 은 안 하지 않았던가.



"김 상무님께서 어인 일로 저를?"


"그야 가보면 알겠지."



그도 그랬다.


아담한 날개를 움직여 날아올랐다.


*


백업 또 까먹을 뻔 했네.

여기서 연?중쳤음. 아마추어의 권리지...

원본은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