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봐도 악몽 같은 말이었다.



"미안해, 친구로밖에 안 보여."



사근사근하게 굴던 지난 날은 다 무어란 말인가?


시아, 괘심한 여자였다.


하지만 그러고도 아름다운 여자였다.


떠올릴수록 어쩐지 가슴이 뛰는 여자였다.


미워할 수 없었다.


번뇌거리는 떨쳐내야겠지.


남자답게. 훌훌.


아니지, 지금은 '남자답게' 는 아닌가?



"거기 마법소녀님! 이쪽 봐주세요!"



처치한 괴수를 밟고 땀을 닦았다.


좋다며 기자들이 촬영해댔다.


남이 땀 훔치는 모습이 뭐가 좋다고 난리람.


이해 못할 사람들이다.



"메에롱."



그렇게 땀방울이 좋으면 자기들 땀방울이나 찍으라지.


나는 협조해줄 생각 없었다.


아담한 혓바닥을 내밀며 빗자루에 몸을 실었다.


비행 모습을 보고 아래 기자들이 찰칵.


그러고보니 나 지금 치마인데, 저 녀석들 팬티 찍은 건 아니겠지.


마법소녀 모습이면 토끼가 그려진 흰색 팬티였을 터다.


뭐 됐다. 신경쓰지 말자.


내 신장은 겨우 130 언저리다.


이 어린 모습의 속곳을 찍은 정신 나간 녀석이 있을라고.


있으면 내일 일어나 신문사에 항의하면 그만이다.


사람의 눈을 피해 집 근처에 안착했다.


빗자루를 거뒀다.



"해제."



변신도 풀었다.


푼대도 옷이 바뀌는 수준이다.


언제부턴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건장한 남고생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슬픈 일이었다.



"이상하네."


"무책임하게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변신을 해제했는데 여자인 채냐고!"


"기다려 봐. 내가 요정 나라 가서 원인을 알아보고 올게."



몇달 전 사역마와 나눴던 대화였다.


개... 아니 '고양이 자식' 은 그 말만 남기곤 감감무소식이다.


따져보면 내 입장에선 슬프기만 한 일도 아니었지만.



"혼자가 돼서 할 수 있던 일도 있었으니까."



외로운 건 사실이지만.


요즘 혼잣말이 늘었다. 외로움의 증거일 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방에 들어섰다.


방은 차갑고 침침했다.


보일러 끄고 나갔구나.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니 전화가 왔다.


발신자 명으로 [배불뚝이] 라는 네 글자가 쓰여있었다.



"여보세요."


[R님이십니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냐."



늙은이가 바싹 긴장한 투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옵고 전번에 말씀드리신 건에 대하여 보고하고자 전화 올렸습니다.]


"어떻게 됐어?"



대화하는 어투론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연하가 맞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건방지게 있는 것은 서열이 내가 더 높기 때문이었다.


[힘] 의 서열이.



[잘 됐습니다. 내일부터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후후. 계획대로로구나.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나올 뻔했다.


어린 몸으론 퍽하면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 큰일이다.



"수고했어. 또 보자구. 교장."



'교장' 이라는 건 암구호 상의 무언가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의 교장이었다.


사전에 받았던 교복을 챙겼다.



"내일부터 다시 고등학생이라!"



요전번에 계획한 바가 있어, 한 사립학교 교장에게 부탁을 했다.


나를 학교 학생으로 넣어줄 수 있느냐고.



"안 됩니다.

아무리 마법소녀고, 제 생명을 구해주셨다지만 그런 짓은...."


"맞고 넣어줄 거에요, 아니면 그냥 넣어줄 거에요?"



종주먹을 쥔 내 간곡한 '부탁' 에, 교장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이 금발이며 푸른 눈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외국의 월반 고등학생이 편입을 해온 것으로 처리한다고 했다.


편입인지 전학인지, 아무튼.


벌떡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교복을 보니 사이즈가 꽤 컸다.


130 짜리 고등학생이 있을 거라곤 상정 못한 걸까?


아쉬워라. 실과 바늘이라도 있었으면 접어서 바느질을 했을 텐데.



"당분간은 헐렁헐렁해도 놔두는 수 밖에 없나."



불편함을 뒤로 하고 설레는 마음을 안았다.


내일은 오랜만의 등교였다.



*



한번은 연을 떼었던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의 무게.


잠시 까먹고 있었지만 첫 등교를 하자마자 신속히 그 무게감을 자각하게 되었다.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게 됐습니다."



꾸벅하고 인사를 하니 쉬는 시간이 극성이었다.



"귀엽다!"


"키 되게 작네. 몇살이야?"



뭇 학생들이 몰려와 내게 이러쿵 저러쿵 말을 건 것이었다.


남의 책상까지 와서 아주 소란이었다.



"우리랑 비슷하겠지. 그야."


"아닐 수도 있지."


"소문으론 월반이라던데."


"아따~ 월반이 뭔데?"


"아이고~ 이 촌닭팔푼아~ 나이도 어린 것이 월반도 몰라?"



무수한 관심공세에 나는 되려 황당했다.


하는 게임도 없는데 어째 학급에서 인기폭발이란 말이더냐?


의아했지만 전학생이란 게 그런 존재였다.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인간 냄새가 지독하게 밸 즈음에 제지해주는 급우가 나타났다.



"애 놀랐다. 그만들 해."



짝궁이었다.


은혜로운 여학우의 안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차!


포니테일로 검은 머리, 서글서글한 눈꼬리, 특징적인 눈물점.


찾던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시아였다.


시아, 나의 사랑. 나의 빛.


마법소녀가 되기 전, 남자 시절부터 좋아해오던 여자.


나를 찼던 여자.


내가 언젠간 품을 여자.



"으휴, 애가 겁을 잔뜩 먹었는데 눈치도 없이."



무서웠지- 라고 시아가 걱정해줬다.


참 사려 깊은 여자였다.


나는 기쁘게 기회를 물었다.



"흐아앙 언니 무서웠어요!"



덥썩 시아의 품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체격 차이인지 보노보노에게 안긴 조개가 된 기분이었다.


포옥 안기니 시아의 몸 여기저기가 느껴졌다.


히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글래머였구나.


현재 나는 같은 여자에, 어린 아이인 상태였다.


시아는 날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도닥여주었다.



"그래그래, 근데 '언니' 라면-."


"저, 월반했으니까 아직 어려요."


"역시 그렇구나. 몇살인데?"



그러고보니 이 몸은 어느 정도 나이일까?


130. 내 키가 130이었지?


140 언저리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라고 들은 바 있었다.


그럼 한 초등학교 3학년? 2학년인가?


얼른 둘러대었다.



"9살이요."



손가락을 9개 펴서 보여주었다.


끔뻑 애라고 속겠지.


... 초등학생은 이런 짓 안 하던가?



"귀여워라! 9살이구나!"



허허, 멍청한 여자.


곧잘 속는구나.


그 점 또한 사랑스러웠다.



"야. 시아."



시아의 푹식푹신함을 만끽하는 중에 누군가가 시아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남자였다.


훤칠하게 생긴 남자가 수줍어 하고 있었다.


어쭈, 호출이란 명목으로 어깨까지 두어번 친 모양이었다.


끔직도 해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시꺼먼 사내자식이 시아를 건드리는 꼴을 본단 말이던가?


지네가 팔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걸 직관하는 기분이었다.


시아는 달랐나보다.


밝은 낯으로 호명한 쪽을 보더랬다.



"점심시간에 그, 잠깐 음악실로 와."


"왜?"


"이유는 그때 가서 말해줄 테니까."



시아가 빙긋빙긋 웃으며 답했다.



"음악실이면 오늘 가창부가 쓴다던데. 다목적실이 낫지 않겠어?"



은밀하게 둘이 있고 싶은 거라면 다목적실이 낫지 않겠냐는,

장난기가 들어간 말이었다.


남자는 "앗... 앗!" 이라며 버벅거렸다.



"그, 그러면 다목적실로 와! 기다릴 테니까."



남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달아났다.


명백히 사랑 고백이었다.


시아가 쿡쿡 웃었다.


왜 웃어?


너, 왜 웃어?


웃기는 계집이네.


이거 시아한테 맡기기 불안하였다.



"점심 먹어야지. 우리 학교 급식은 맛있는 게 많아."



점심 종이 울렸을 때 시아가 날 꼬드겼다.


같이 밥을 먹어줄 심산이었겠지.


더 없이 고맙고 귀한 기회였지만 거짓을 꾸며내 거절했다.



"배가 아파서 못 먹겠어요."


"오늘 긴장해서 그런가보네.

많이 아파? 조퇴해야겠어?"


"그 정돈 아니지만 그냥 혼자 있을 게요."



미안한 눈빛으로 시아가 교실을 떠났다.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 남자가 시아에게 고백하기 전에 먼저 훼방을 놓아야 했다.


나란 게 들키지 않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 이렇게 해서 넘어가려나."



입술을 삐죽였다.


다소 좀스런 방식이 하나 있었다.


성공할까 불안하여 성에 차지 않는 구석은 있었지만 달리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영차."



몸이 작아져서인지 학교 의자 높이가 부쩍 높게 느껴졌다.


점프하듯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시아와 그 사내 놈의 약속장소이던 다목적실로 향했다.


*


백업 잊고 있었다.

원본은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