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 혼자 자취하는 걸로 아는데."



밤 중에 이 발칙한 계집의 처소를 찾아갔다.


시아의 말에 따르면 다행히, 천운은 내 편인 듯 하였다.


혼자 사는 거라면 가서 수작을 부리기도 용이할 터였다.


가보니 무척 의외였다.


당초에는 겁이나 주고 말 생각이었다.



"포포포."



전처럼 귀신이라도 있는 듯이 연출해서.



"계집, 시아한테서 떨어져라 포."



그러나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히 모습도 감추고 목소리도 내리깔았는데 지희는 내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다.



"귀신 놀이니?"



놀라서 입을 닫고 못 들은 척 했다.


지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와. 거기 있잖아."



어떻게 안 걸까.


귀신 들린 통찰력이었다.



"커튼 뒤에서 나오래도."



아하.


달빛에 그림자가 비쳐졌나보다.


커튼 뒷편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지희가 눈을 일순간 크게 떴다.



"이름이... 알리샤라고 했었니?"



지희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하염없이 째려보았다.


어림도 없지.


시아한테 꼬리 치는 저런 계집 말을 내가 들을 리가.


돌연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저녁이 빨리 꺼졌나보다.



"배고파? 치킨 먹을래?"


"네!"



치킨!


후다닥 발코니에서 떨어졌다.


방으로 들어와 다소곳히 앉았다.


금강산식후경이다.


지희를 혼내주는 건 나중으로, 일단은 허기를 채우기로 했다.



"잠깐만 기다려. 부엌에 먹다남은 게 있거든."



지희는 불도 안 켠 어두컴컴한 방에 나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금새 돌아온 지희가 따끈따끈한 닭튀김 몇조각을 들고 왔다.


과연 싸가지였다.


렌지로 덥힌 모양인데,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볼을 부풀렸다.



"언니 이게 치킨이에요?"


"응."


"... 언니, 냉동치킨은 치킨이 아니에요."



치킨을 들고 오겠다면서 고작 너겟을 가져온다니.


지희, 이 계집은 날 농락할 심산인 게 틀림없었다.



"그럼 치울까?"



사기가 발각되니 심통을 부리는구나.


심보는 고약해빠져가지고.


얼른 포크를 들었다.


펭귄 모양의 캐릭터가 달린 포크였다.


어찌 됐건 배는 고팠다.


두조각을 한번에 찍어서 입에 넣었다.


볼이 볼록해졌다.



"잘 먹네."


"저녁, 우움, 조금 먹어서 배... 고팠어요."



먹느라 정신이 없는데 지희가 말을 걸었다.


씹으며 대꾸하느라 말이 엉망진창이었다.


지희가 또 물었다.



"난 왜 찾아온 거야?"



대번에 정신이 들어 먹길 멈추었다.


어떻게 한담.


생각해둔 변명도 딱히 없는데.



"어... 경고하려고요."


"무슨 경고?"


"시아 언니한테 들러붙지 말란 경고요."



지희가 "아." 하고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시아 좋아해?"


"네?"



얼굴이며 등이며 시뻘겋게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 여자, 남의 아픈 곳을 찌르네.


지희가 물음을 바꿨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5층인데.

현관에서 들어온 거 같진 않고."


"안 알려줄 거에요."



닭쪼가리 몇개 주워먹었기로서니, 네 어디가 예쁘다고 알려주겠느냐.


원래는 널 혼쭐내려고 왔는데.


아직도 그럴 계획이고.


지희를 다시금 노려보았다.


적의가 불타올랐다.


지희가 "아쉽네." 하곤 말했다.



"알려주면 남아있던 쿠키도 주려고 했는데."


"쿠키요?"


"아몬드 좋아하니?"


"네! 완전!"



핫!


이 영악한 암캐에게 속을 뻔 했다.


정신 차려야지.


머리를 붕붕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안 알려줘요."


"밖에 춥지 않았니?"


"추웠어요."


"코코아도 내올 수 있는데."



코코아?


쿠키만이 아니라 코코아까지?


으음.


확신하건데,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본다.


상대가 안 좋았던 것이다.


쿠키만이라면 참을 수 있겠지만, 따뜻하고 달콤하고 푹신한 음료수까지 같이 준다잖나.


자백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날아서요."


"날아서 왔다고? 헬리콥터라도 탄 거야?"


"마법 쓰면 돼요."



지팡이를 꺼내서 보여줬다.


신기하다는 듯 지팡이를 만져보려 하길래 "여기요." 하며 건넸다.


그새에 너겟을 오물거렸다.



"그럼 마법소녀였던 거야?"


"네. 바로 눈치채셨네요?"


"요샌 지상파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니까.

주로 괴수 토벌 같은 거 한다고 들었는데 안 힘들어?"


"괴수들 약해서 쉬워요."



내가 마법소녀란 건 알아도 정확히 '마법소녀 누구' 인지는 모르나보다.


인지도가 낮다는 게 이런 때 도움이 될 줄이야.



"그럼 낮에 시청각실 박살나있던 것도 괴수랑 싸우느라?"


"아, 엇, 앗, 맞아요. 끈질긴 애가 있더라고요!"



갑작스런 공격이었지만 외려 잘됐다 싶었다.


혹시라도 비슷한 질문이 들어오면 당분간 그런 쪽으로 해명해두자.



"그렇단 말이지...?"



지희가 뭐라 중얼거렸다.


집중하는 분위기에 초를 치기 싫었던 지라 기다렸다.



"얘, 언니랑 연극 한번 안 해볼래?"



지희가 떠드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는 시아의 오랜 친구이다.

한데 최근 시아의 근처에 달라붙는 학생들이 있다.

무척 질이 안 좋은 애들이고, 몇몇은 시아를 괴롭히려는 아이들도 있다.

말로 해선 안 들으니, 마법으로 바람 좀 잡아줘라.

겉에 나서서 위협하는 건 자신이 하겠다.


이 어디가 연극이란 건지 원.



"연극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마법을 쓰는 연기를 하는 거니까 연극이지.

내가 연기 담당. 네가 이펙트 담당."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이었지만 "그래요, 그럼." 이라며 넘겼다.


저런 타입은 고집불통인지라 '아무튼 내가 연극이라면 연극이다' 라고 생떼를 부리는 게 특기다.


대충 맞춰주는 게 편하다.


그보다 시아한테 달라붙는 날파리가 있다고?


시아한테?


용서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종자가 있다면 내가 처치해야지.


다만 걸리는 구석이 있어 "저기" 하며 손을 들었다.



"마법소녀는 사람 앞에서 직접적으로 협박 같은 걸 하면 안 되는데요...?"



지금까지완 다르다.


'한번이면 되겠지', '이번 한번 뿐이겠지', '한번이면 들키지 않겠지.'


지희 때나, 그 전의 놈팡이 때나 똑같이 이런 마음으로 협박을 했다.


얼굴 가리고 할 생각이었기도 하고.


여러번이면 말이 달라진다.


꼬리를 밟힐 우려가 있었다.


'날파리들' 이라고 했으면 몇번씩 위협을 해야한다는 거잖아.


솔직히 자신 없었다.



"하지 말라고 시킨 거야? 요정이?"


"아니요, 시스템이 어쩌고저쩌고 하던 걸요.

일반인한테 그런 모습을 보이면 마법을 못 쓰게 된다고."


"괜찮아. 모습만 안 드러나면 되는 거잖아?"



인근에 숨어서 마법만 써달란다.


겉에 나타나는 '얼굴' 역할은 자기가 맡겠다고.


목적은 달랐지만, 수단은 내가 강구하던 길과 비슷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의문점만 하나 있어 물었다.



"왜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려는 거에요? 시아 언니한테?"



날파리가 꼬이든 똥파리가 꼬이든.


지희는 어떤 연유에서 그리 참견을 하는 걸까.



"언니도 시아 언니 좋아해요?"



만일 그렇다면 곤란했다.


그저 적이 하나 느는 것 뿐이니.


지희는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시아랑은 친구야."


"여자들 간엔 친구끼리 그런 짓도 해줘요?

남친 선별?"


"오랫동안 봐온 친구거든."


"언제부터요?"


"유치원 때부터."



10년 넘게 봐왔구나.


징글징글한 인연인갑다.



"시아 덕도 많이 봐왔고."


"어떤 덕이요?"


"여러가지 있었는데. 우리 엄마 장례식 때라든가."



엄마가 없었구나!


헉. 놀라라.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지희가 손을 저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불쌍하단 눈 짓지 말고.

그럭저럭 살만 했어."


"죄송해요."


"아무튼, 상심했을 때 시아가 많이 도와줬다고.

나한텐 소중한 친구야.

시아가 또 이상한 남자랑 눈 맞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뿐이야."



단순히 오랜 친구로구나.


이상한 남자라.


왠지 모를 분노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어때? 나 믿어볼래?"



지희가 악수를 청했다.


행동 원리는 이해되었다.


갈 길도 불만은 없었다.


지희가 내민 손을 잡았다.



"네."



시아한테 다가오는 똥파리를 전부 떨궈내면 시아 주변 남자는 나만 남겠지.


그럼 난 시아에게 재차 사랑 고백을 하는 거다.


... 설마 그때 쯤엔 그 요정 녀석도 돌아오겠지.


설마.



*



"조심히 가."



양 볼 가득 쿠키를 우겨넣고 우물거리는 마법소녀.


마법소녀를 배웅하고 지희가 현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지희가 미끄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죽는 줄 알았네."



지희는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강자를 앞에 뒀던 터라 심장이 하이텐션이었다.


더구나 몇번인가는 상대가 노골적으로 째려보기까지 하였다.



"그때 말을 잘못했으면 손을 쓰려 했겠지."



콩닥콩닥.


'잘 뛰는구나. 아직 살아있네.'


단순명쾌한 구별법이었다.



"위기가 기회라더니."



정말 그랬다.


기회는 위기와 함께 방문해왔다.


'인간병기가 밤중에 찾아왔다' 라는 오싹한 위기.


지희는 위기를 앞에 두고 어떻게든 기회를 발굴해냈다.


이제 방해되는 녀석들도 일망타진이었다.


아주 편리한 무기를 획득하였으니.


'투둑' 하고 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반투명한 작은 지퍼 봉투였다.



"참! 이것도 넣어둬야지."



꼬마의 눈치를 보느라 낮에 힘들게 챙긴 물건이었다.


잊어버리면 아까웠다.


방금 전, 마법소녀를 환영한 방의 바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지희가 지퍼 봉투를 들고 망설였다.



"여기가 좋겠다."



방 한쪽 벽면을 넌지시 살피던 지희가 자석으로 봉투를 고정시켰다.


봉투엔 털이 몇가닥 담겨있었다.


지희는 그 아래에 펜으로 글자를 끼적였다.



[부위는 겨드랑이.]

[가슴은 아직 성장 중인 듯. 작년보다 한치수 커짐.]

[키 성장은 멈춘 모양.]



지희가 벽을 둘러보았다.


벽에 빼곡히 달라붙은 다른 봉투들을 만족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러곤 아쉽다는 투로 되뇌였다.



"시아도 이렇게 붙여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나만 가지고 놀 수 있는데-.


방을 나서는 처자가 입을 샐쭉였다.



*



원본은 이쪽
이 담은 쓰려다가 오래 걸릴 거 같아서 런했던 듯
암튼 이걸로 또 하나 백업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