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세 살이며 작은 도시의 어느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전해지는 깊은 환영과 또한 공포가 내 마음속을 뒤흔든다. 어두운 구석과 환한 집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사람들의 소리, 또한 그들의 밝은 눈망울이며 비밀과 모의의 방, 향긋한 과일과 지독한 약 냄새. 그곳에서는 두 세계- 즉 밝고 어두움이 뒤섞였다. 구태여 밤과 낮처럼 말이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밝으나 협소해서 사실 그 안은 누이와 부모님밖에 없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대부분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맑음과 깨끗함이었다. 그 속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이야기들, 깨끗이 닦은 손, 청결한 옷, 좋은 관습이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를 불렀다. 또한 성탄절잔치와 미래로 인도하는 곧은 선과 길이 그 세계 속에 있었다.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원칙, 사랑과 존경, 성스러운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인생이 맑고 깨끗하려면 그 세계를 향해야 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도 우리 집에서 그 길을 열어냈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밝지 않고 검으며, 끈적한 향과 검은 모략, 또한 탄생과 죽음, 때로는 사랑과 살인, 절도, 자살 같은 일이 있었다. 그곳은 구더기가 창궐하고 저주와 노파의요술, 잡배들의 소굴이며 잔혹하고 유혹적인 향기를 뿌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았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에, 아래의 시궁창 같은 세계를 쳐다보며끝내 물들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키고 싶을 터였다.
두 세계를 보며 가장 기이한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자신의 순결함을 기도하며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불렀는데 그 후 곧바로 그녀는장작을 쌓아 둔 광에서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싸움을 벌일 때 그녀의 타락을 눈뜨고 마주하는 순간나의 벌어진 신념을 어찌나 앙다물며 다시 다짐하고, 절대 악의 길로 빠져들게 되지 않기를 신에게 맹세했건만 데미안이라는 미친 년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시장의 아들과 수석 삼림관의 아들이 같은 반이라 이따금씩 우리 집에 왔다. 난폭한 사내아이들이었어도 선한 세계에 속한 깨끗한 아이들이었다. 나는 여느 때 우리가(즉, 시장과 삼림관의 아들)경멸하던 이웃 아이들, 공립 학교 학생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들 중 한 명인 ‘프란츠 크로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
여느 수업 없는 오후, 나는 두 공립 학교 이웃 아이와 함께 집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우리보다 두세뼘은 큰 아이가 왔다. 열댓 살쯤 된 억센 여자아이, 공립 학교 학생으로, 재단사의 딸이었다.
그 애 아버지는 유명한 술꾼으로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 프란츠 크로머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무서웠다. 그 애는 벌써 어른 티를 내며 젊은 직공들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 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강가를 내려가며 그에게 납, 구리 혹은 주석으로 된 것을 보이고, 호주머니에 집어넣게 하는(일종의 돈벌이였던가?)그런 것을 하며 강물에다 침을 뱉어댔다.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나와 어울리던 소년들은 각자 학생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나쁜 짓거리를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그들은 이후 나와는 거리를 두며 크로머에게 달라붙었던 터라 내가 골탕을 먹어도 모르는 척내버려 둘 것임은 진즉에 깨달았다.
둘의 이야기가 끝나며 두려운 나머지 마침내 나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황당한 도둑 이야기를 꾸며냈다. 모퉁이 물방아 옆 과수원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채울 정도의 사과를 훔쳤는데, 이 모두 그냥 사과가 아니라 전부 최고로 치는 품종이라고 했다. 순간의 두려움을 피해 나는 이 이야기로 도피했다. 이야기를 꾸미는 것은 내 특기였지만, 중간에 말이 막혀 호되게 당하는 사태만은 벌어지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불려 나갔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박수를 조금 기대했는데, 이야기를 꾸미는 데 열이 올라 오히려 이에 스스로 도취했던 것이다. 두아이는 심드렁하니 말이 없었건만, 크로머는 어딘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나를 쏘아보며 위협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얘기 진짜야?”
“그럼, 당연하지.”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이거지?”
“그래,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
속으로는 겁이 나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도 나는 고집스럽게 단언했다.
“맹세할 수 있어?”
“응, 하나님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크로머의 간악한 미소에 몹시 놀랐지만 이제와 발뺌할 수 없으니, 즉시 그렇다고 했다.
“그러셔,”
하는 시큰둥한 대답에 놀란 심장을 쓸어내리고 잘 끝났다고 생각해 곧 일어나 집으로 가는 그 아이의 발걸음에 기뻐했다. 두려움에서 깨어나 빠른 걸음으로, 축복받은 집에서 모든 고민을 털어내겠다는 마음은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을 때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그렇게 급하게 굴지 마, 너!“
나는 놀라서 그녀를 응시했다. 또한 그녀가 무슨 속셈을 가졌는지, 혹시 나를 괴롭히려는 것인지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내가 물었다.
”뭐야? 뭘 어쩌겠다는 거야?“
”별 거 아니야. 너한테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다른 사람들은 들을 필요 없어.”
“그래, 나더러 뭘 더 말하라는 거야? 나는 집에 가는 것이 급하다고.“
“너도 알겠지. 모퉁이 물방아 옆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
“아니, 난 몰라. 물방앗간 주인 거겠지 뭐.“
이내 프란츠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나를 자기에게로 바싹 끌어당겼다. 이제 나는 바로 코앞에서 그 애의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그 애의 두 눈은 황금처럼 빛났지만 사악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일그러진 미소는 잔인함과 소유욕에 물들여진 듯했다.
”그렇다면, 싱클레어, 그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는 내가 말해 줄게. 난 그 집 주인이 사과를 도둑맞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그건 내 어머니 소유니까!”
“맙소사.” 내가 소리쳤다. “그건 모두 거짓말이야. 지어낸 것일 뿐이었어.” 마침내 용기를 가져 대답했지만, 그녀는 귓등으로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얘야, 거짓말하지 마, 하나님께 맹세까지 했으면서 부정하는 것이 참 꼴사납네.“
그 애에게 호소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 애는 나와 다른 세계에서 왔다. 이 따위 일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저 ‘방법’ 중 하나일 뿐인 것이라는 것을 진즉 깨달아야 했다.
”크로머, 들어 봐. 어머니께 내 이름을 말해선 안 돼. 그건 너에게도 안 좋을 거야. 내 시계를 줄게. 자, 봐. 이거 은이고 내부 장치도 좋아.“
눈물이 핑 돌았다.
“울긴! 네 고물 시계에는 관심 없어!“ 그녀의 사악한 목소리에 나는 한껏 놀라 눈물이 멈췄다.
“도둑맞은 사과 값만 해도 5마르크인데, 난 너처럼 그런 돈을 내던져 버릴 수 있는 부자가 아니야.”
”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슬프게 말했다. “난 돈이 없어. 하지만 그것 멀고는 뭐든 줄게. 내게는 인디언 책과 병정들이 있고, 나침반이 있어. 당장 가져다줄게.“
크로머는 다만 심술궃게 입을 움칫하며 바닥에 침을 탁 뱉을 뿐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너희 집에는 돈이 충분히 있잖아. 내일 학교가 끝난 뒤 저 아래 골목에서 기다릴게. 돈을 가져오면, 그럼 끝이야. 만약 돈을 안 가져오면,”
“안 가져온다면, 몸으로 때워.“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집의 유리문이 열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나는 계단을 오를 수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내 인생이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자살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떨지는 똑똑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저금통의 얇은 양은 막대를 두동강 내었다. 비참하게도 그것은 단 50페니히밖에 안 되는 액수였다. 하나님께 죄지은 것을 고해하며 결국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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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나고 골목으로 향하자, 크로머는 멀리서 나를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아주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며 나를 눈여겨보지 않는 듯 굴었다. 가까이 왔을 때 그 애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눈짓을 하고는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계속 갔다. 어느새 나와 그녀는 골목의 가장 외진 곳에 멈추었다. 그곳은 아무 인파도 찾지 않는, 완전히 버려진 곳이었다.
“그거 갖고 왔지?” 그녀가 싸늘하게 물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손을 주머니에서 빼서 그녀의 손바닥에 돈을 쏟아 놓았다. 그녀가 헤아렸다. 동전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채 잦기 전에 ”65페니히구나.“ 하며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수줍게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너무 적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게 전부야. 더는 없어.”
“네가 좀 더 똑똑한 앤 줄 알았는데.” 그녀가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남은 돈은 4마르크 35페니히. 이 돈을 어찌 갚는담.“
그녀의 사악한 웃음 뒤로 내막은 빠르게 드러났다.
”흥미를 풀기에는 딱 좋아 보이는데, 나랑 한 번 할 때마다 5페니히씩 빚을 줄여 주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미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세계의 불한당 하나와 나의 하녀 리나가 보인 그, 외설적인 행위를하자는 듯했다. 그것을 연상하자 나는 공포에 질려 도망가려 했지만, 그녀의 손아귀는 너무도 길었다. 고작 열세 살의 나이에 정조를 잃고 말았다.
“후아.. 앞으로 학교가 끝나면 여기로 와. 내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그녀는 내 앞에서 휘파람을 불어 보았다. 여러 번 들어 본 소리였다. 어린 나이에 부정을 저질렀다는 죄악감과 무력감 때문에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나는 혼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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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무언가가 나의 삶 속에 침입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계속 나에게 작용하고 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는 그 얼마 전에 한 학생이 들어왔다. 우리 도시로 이사 온 어느 유복한 미망인의 딸로, 옷소매에 검은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두 학년 위였으며 나이도 몇 살 더 들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처럼 나도 그를 주목했다. 지금이었다면 그 미친년에게 진작 관심 주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앳된 소녀의 인상을주지 않았다.
어른처럼, 아니 그냥 어른이라기보다는 숙녀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우리 유치한 아이들 사이를 오갔다. 인기 있지는 않았지만 신비하게 주변 사람을 끌어모았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다른 악한 것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자신감 있고 단호한 어조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간혹 그러듯 무슨 이유에선가 매우 넓은 우리 교실에 한 반이 더 들어와 앉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네 반이었다. 어린 학생들은 성경 이야기 시간이었고, 큰 학생들은 작문을 해야 했다. 우리가 카인과 아벨의 역사를 배우는 동안 나는 독특하게 나를 매료시키는 데미안의 얼굴을 자주 건너다보았다.
악마라도 씌인 것인지, 그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단호한 얼굴이 주의 깊고도 점잖게 숙여져 있는 모습을 계속 힐끗하게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표정은 약간 슬픈 냉소를 담고 있었다. 한 번은 그녀가 내 쪽으로 눈길을 주었는데 나는 놀라서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밝은 호감의 표시를 보았을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아주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가 내 뒤에서 왔다. 다른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자 나를 따라잡더니 인사를 했다. 이 인사도, 그가 학생다운 말투를 따라 했는데도 무척 어른스럽고 공손했다.
“잠깐 같이 갈까?” 그녀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고백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어디사는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아, 거기구나?” 그녀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집은 내가 벌써 아는걸. 현관문 위에 붙여 놓은 매가 곧바로 내 관심을끌더라고.”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나는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도 대문 위 맨 꼭대기의 문장을 말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 가문과는 내가 아는 한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 내가 수줍게 말했다. “건물이 예전에 한때 수도원의 일부였대.”
“그럴 수도 있겠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과 걸을 때에는 크로머의 생각이 나지 않아 정말 좋았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갑자기 데미안이 웃었다. 마치 뭔가 재미있는 것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그래, 내가 너희 반에 있었지. 이마에 표적을 단 카인의 이야기였어. 그렇지? 그 이야기 마음에 들었니?“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배워야 했던 것들 중 어떤 것이 내 마음에 드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못했다. 마치 어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가 꽤나 마음에 든다고 나는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어깨를툭툭 두드렸다.
“나한테는 그럴듯하게 꾸며 댈 필요 없단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정말로 특이해.” 그가 계속했다. ”그래,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카인에 관한 이야기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어.”
“아주 간단해. 다른 사람들은 그의 표적에 압도되어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된 거야.“ 그녀가 신나게 말했다. •••신학자 같은 소리를 들어 주기 질리던 찰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날 무서워하진 않지? 아니면 무섭니?”
“오, 아니야. 전혀 무섭지 않아.”
“그럴 테지. 하지만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몰라.. 날 내버려 둬, 나한테서 뭘 바라는 거야?”
“프란츠 크로머. 맞지?” 나는 몹시 놀랐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놀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응. 그래.“ 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애는 나빠. 사탄이야! 하지만 그 애가 아무것도 알아선 안 돼!“
”걱정 마, 너에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야. 아마도 넌 내가 걔를 어떻게 해도 상관하지 않겠지?”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부탁이야. 부디 그렇게 하지 말아 줘! 그러면 누나만 힘들어질 거야!”
“날 믿어, 싱클레어. 내가 부디 너의 두려움을 덜어 줄 거야.”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점차 안정되었다. 그러나 데미안이 나와 크로머 간의 일을 안다는 것이 나는 점점 두려웠다.
“이젠 집에 가 봐야겠다.” 라고 말하며 그녀가 빛 속에서 자기 외투를 더 단단히 여몄다. 그녀가 떠난 이후, 나는 길을 되돌아갔다. 골목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하아.. 이걸로 2마르크 75페니히 남았네.“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는 크로머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지만, 괜한 생각이었다. 또다시 악마에게 희롱당하며 끔찍한 단잠에 드는 하루의 반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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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난 후 골목에서 들리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한 주일 동안. 그 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자유가 믿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프란츠 크로머와 마주치게 되었을 때까지도 나는 믿지 못했다. 그 애는 바로 맞은편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나를 보자 움칫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더니 나를 피해 그냥 홱 돌아섰다.
그것은 나로서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내 적이 나를 피해 달아났다는 것, 하지만 나는 데미안이라는 새로운 악마를 내 안에 들였다. 차라리 2마르크 75페니히를 모두 갚는 것이 훨씬 밝은 미래였을 터다.
그 무렵 데미안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 싱클레어.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좀 들어 보고 샆었어. 크로머가 이젠 널 가만히 두지, 안 그래?”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섞인 듯했다.
“누나가 그런 거야? 하지만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했기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크로머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아.”
”그거 잘됐구나. 언젠가 다시 나타나기라도 하면, 안 그러겠지만 그 애야 뻔뻔한 녀석이니까 말이야, 그냥 그 애한테 데미안을 생각해 보라고만 해.“
무슨 방법으로 크로머를 구슬렸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표정에 내면의 거부가 기이하게 뒤섞인 답답함이 들어 그 자리를뜨고 싶은 마음만 자꾸 생겨났다.
“아무튼 누나, 정말 고마워.” 내가 수줍게 말했다.
”그저 내 표적을 활용했을 뿐이야.“ 그녀가 말했다. ”이제 갈 때가 됐네, 안녕.“
크로머에게서 벗어난 오늘, 누이들과 부모님께 그동안의 죄를 고해하고 반성했다. 나는 돌아온 탕아였고, 그들은 나를 정답게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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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수 년 사이 가문은 몰락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목이 잘리는 수모를 겪었으며, 누이들은 창부로팔려나가는 지경에 이르러, 나는 한 가문의 여식에게 팔려갔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데미안, 과거 나의 은인이었다.
그녀에게 팔린 후 잠시 동안은 별다른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다. 그동안 고된 시간을 보냈는지 그녀는 완전히 망가져 있어 일주일 정도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달래며, 집안일하는 것이 전부인 시간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어려움은,
”흐윽.. 다른 년 냄새가 나..”
“이제 나는 버린 거야? 내가 그깟 년들보다 어디가 못난 거야?”
“바람피면 가만 안 둬… 널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넌 날 못 벗어나, 죽어서도 쫓아다닐 거야.”
“내가 어릴 때 도와준 만큼… 너도 나 도와줄 거지..?”
한껏 어르고 달래도 나아지지 않는, 도저히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본래 성격인, 끝없는 집착에 결국 세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그녀를 뒤로한 채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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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에게서 도망친 뒤로 수 년이 흘렀다. 이제 나는 베아트리체라는 이국의 여인과 만나 새로운 사랑을 꽃피우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까지 생겼다. 그녀의 배가 만삭에 다다르고 있었다.
“베아트리체! 문을 열어 주세요!” 내가 수줍게 말했다. 그러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곳에는, 베아트리체가 아닌,
만삭의 데미안이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넌 날 못 벗어나.“
나는 짧게 실소했다.
p.s
줄관리 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