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발전하며, 인류가 건조하는 우주선의 크기는 점점 커져갔다.


함선의 크기가 커지면서, 우주 공간과 내부 공간의 분리도 더더욱 중요해졌다.


우주선 외벽에 1m*1m의 창문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함선 방 세개를 만드는 비용과 비슷했다.


당연히 예산에 쪼들리는 연방은 밖을 꼭 내다보아야만 하는 곳에만 특수 코팅 유리를 설치했다.


일반적인 승객은 우주선을 타고 있음에도, 우주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었다.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게 된 첫번째 이유는, '저 밖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서' 였으니까.


그래서 에버는 배 안에서 지낸 4년동안 우주를 한번도 제대로 본 적 없었다.


반란 이후에 괴로워하던 그녀를 내가 관제소로 데려왔다. 그게 그녀의 생애 첫 우주 관람이었다.


관제소는 함교에서 보이지 않는 곳을 전부 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우주와 관제소 사이를 가르는 건, 오직 거대한 유리 돔 뿐이었다.


입구로 들어오자, 수많은 단말기들이 보였다. 전부 덩쿨에 휘감겨 있었고 액정도 깨져 있었지만 녹슬거나 부서진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관제소... 지금 봐도 굉장하네요."


"여긴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은것 같아 보이네."


"그러게요.. 특히 돔은 전혀 변하지 않은거 같아요."



관제소 안에서 약간만 위쪽을 쳐다봐도 별들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정확한 관측을 위해 순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유리 돔은, 너무나도 투명하다 못해 아예 윤곽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돔을 바라보다 보면, 저 광활한 우주와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것 같아 가끔 소름이 돋았던 적도 있다.


돔은 수백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흠집이나 먼지 한톨 달라붙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에 처음 들어왔을때.. 그 기분은 평생 못 잊을거에요.."


"들어오자마자 위를 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잖아. 몇분동안 아무말도 안하고 있어서 좀 놀랐어."


"그땐 정말, 저 우주가 제 생각을 꽉 채우고 있었어요. 위에 보이던 행성, 위성, 검은 배경에 빼곡히 들어차있던 별과 성운들.. 그런 광경은 진짜 처음 봤다고요."



반란이 우리측 승리로 굳어지고 그녀에게 병이 생긴 다음,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던 에버를 어떻게든 여기까지 데리고 왔었다.


원래 민간인은 출입 금지지만 뭐 어떤가?


함내 수석 엔지니어한테 그런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직위의 사람들은 전부 반란에서 갈려나갔다.


...그래서 내가 팔자에도 없는 함장 짓거리를 하게 된거다.


아무튼 그녀는 여기 처음 들어와서, 위를 올려다보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한 몇분동안 계속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슬쩍 본 얼굴은 뭐랄까, 영혼이 빠져나간? 그런 말로만 표현할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 이후로 매일 여기로 오자고 하고, 한번 오면 몇시간이고 있었잖아."


"날마다 다른 행성, 다른 성운이 보이는데 어떻게 호기심이 안 동하겠어요? 우주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관측소를 걸었다. 한때 기계음과 말소리로 가득 차있던 이곳에는 이제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남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 시간이 먹어치운 잔해들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살짝 올리면 시간조차도 건드릴 수 없었던 광활한 바다였다.



"어렸을 때는 천문학에 이상하게 관심이 없었어요. 실험 같은것도 없고, 밝혀진 것도 적고, 그런 두리뭉술한 것보단 좀더 손에 잡히는 쪽이 좋았죠."


"근데 막상 우주를 보게 되니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더 좋아졌어요."



우리 전부터 있었고, 우리 후에도 있을 광활한 미지. 굉장하잖아요? 그녀가 팔을 하늘로 뻗으며 말했다.


"그런 얘기 하다가 별이랑 우주의 수명 얘기가 나왔을때, 네가 엄청 시무룩 했던게 기억나네."


"그랬죠. 별은 몇천만, 몇억년을 더 살거라는데, 길어도 몇백년밖에 살지 못할 우리가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었어요."


출구로 다가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관측병을 위한 기둥이 보였다. 기둥 위에서 본 풍경에는 아래서 보이던 기계들이나, 사람들이 없었다. 오직 천체들만으로 감싸진 전망대 위에서 나는 그녀에게 책이나 시를 읽어 주곤 했다.



"이젠 의미가 없을 리가 없다는걸 알고 있지만요."


"그때 함장님이 말하셨잖아요."


" '저 광활한 별들의 바다는, 오직 우리만을 위해 일렁인다.' 라고"



그랬었지.





***





에버와 나는 전망대 관제실의 기계음을 배경삼아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천문학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건만, 요즘엔 저 우주에 있는 것들이란 것들은 전부 설명해줘야 할 듯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백색 왜성이 되거나 초신성이 되서 터져버리는게 항성의 최후야."


"그러면, 저 반짝이는 별들도... 언젠간 죽어 버리는거죠?"


"그래, 뭐. 별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다가, 어둠만이 남는거지."


"으.. 좀 무섭네요."


"히, 저 별은 앞으로도 수천만년은 더 갈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별들이 생기고 있어지. 아무리 너라도 별이 전부 사라지는 걸 볼 순 없을거야."


"그런가요..?"


"저 별 입장에서는, 너나 나나, 찰나의 순간밖에 존재할수 없는 하루살이처럼 보일걸?"


"별들도 영원할순 없지만, 우리는 별보다도 훨씬 더 영원할 수 없는거지."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 저희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저 별들마저 우주의 티끌일 뿐이고, 사라져 없어질텐데, 우리한텐 그 별들보다도 훨씬 짧은 시간만이 허락된 거잖아요."


"이 우주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가 얼마나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약한 불안이 드러났다.


내가 어릴때 많이 했던 고민인데, 우리 둘은 이상한 데에서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 '의미' 가 뭔데?"


"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오니 당황했나보다.



" '의미'라는건 물리법칙이나 원자처럼, 우주의 시작부터 존재했던게 아니야. 사람이 만들어 낸 개념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 보니 에버에게 존재론같은 철학적인 이야기는 해준 적이 없었다.


음, 좀 더 차근차근 설명해줘야겠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사과에 중력이 작용하니까요."


"그러면 왜 사과에 중력이 작용할까? 왜 소립자끼리 '중력' 이라고 불리는 상호작용을 할까? 왜?"


"마찬가지로 원자, 전자, 4대 힘, 물리 법칙...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데에 이유와 목적이 있을까?"


"음..."


"없잖아. 그것들은 그냥 존재할 뿐이야."


"..."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는데, 하물며 의미는 있을까?"


"이 우주는 의미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러니까 우주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 이런게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우주는 스스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에버가 더욱 불안해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그럼 우리의 존재도,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아니에요..?"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잖아. 의미라는건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개념이야."


"이건 의미있는 물건이다. 이 행동은 결국 의미없는 발악이다. 이런 건 전부 사람이 판단하는 거잖아."


"내가 낀 이 반지. 너에겐 그냥 평범한 반지 정도의 의미밖에 없겠지만, 나에겐 우리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아주 큰 의미가 담긴 반지야.


우리 어머니에겐 사랑하는 남편이 준 반지라는 의미가 있었을 거고. 의미는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야."


"그러니까 이 우주에서 오직 우리 사람만이,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사람만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면, 사람 그 자신에게는 누가 의미를 부여하나요?"


"다른 사람."


"아."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은 세상 모든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줄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만에게는 의미를 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줄 다른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다.



"너와 나는, 서로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이야. 그렇지?"


"...네."


"그걸로 됐어. 서로 큰 의미를 주고 있으니까, 우리는 충분히 의미있는 존재야."


"...그렇군요..."


"인간이 우주에 비하면 사막의 모래 한 톨 같은 작은 존재라는 말은 맞아.


하지만, 우리는 목적이 없는 우주에 목적을 주고, 의미가 없는 우주에 의미를 줄수 있어."



말을 이어나가며 슬쩍 에버의 얼굴을 보니, 아까같은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네.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말했지."


"저 광활한 별들의 바다는, 오직 우리만을 위해 일렁인다고."





***






"그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근데 그거 누가 한 말이었죠?"


"글쎄, 잘 기억 안나는데."


"음. 제가 기억 못하는걸 보면 함장님이 말해준 적 없었나 보네요."


"아무튼, 그때는 함장님이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어요."


"한 90프로? 그정도는 이해했는데,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생겨나서 생각이 안 끝났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저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데만 몇년이 걸렸으니까.



"그럼 지금은 얼마나 이해했는데?"


"지금은 뭐, 전부 이해했어요.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거든요?"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아무튼. 이제 함교에 거의 도착했네요."



그렇다. 우리는 방금 관제소에서 나와, 함교로 가는 통로를 걷고 있었다. 함교에 도착해서 할 일은 세가지 였다.


첫번째. 함선의 상태 확인.


두번째. 함선의 항로 확인.


세번째. 예상 시간 확인.


그리고 나서 에버와 같이 동면에 들어가면 된다. 전부 잘 돌아가고 있었다면, 태양계로 돌아가 이 지긋지긋한 함선과 작별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백년 만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구에 있던 지인들은 거의 전부 죽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사회가 어떻게 변했을지 예상할수도 없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가는 도중 엔진이 멈춘다면.



에버가 의료 구역에서 말했던 대로, 죽을때까지 둘이서 우주를 떠돌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일단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함장님, 함장님에게 저는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글쎄, 엄청?"


"... 저에게 함장님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저도, 함장님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시 말하지만, 몇백년이다. 지구에 아는 사람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에버의 말에 대답해 줄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확히 말할게, 이제는 네가 나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



나는 문에 달린 생체 도어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리는 마침내 함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곳이 함선 곳곳에 퍼져나간 덩쿨의 시작지점임을.


함교 정면의 창문은 관제실의 돔과 같은 재질이었다. 창문도 돔처럼 흠집 하나 가지 않은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창문과 벽을 제외한 모든 곳에 진청색 덩쿨이 빼곡히 덮혀있었다.


바닥, 단말기들, 연산모듈, 출력 제어장치... 그리고 더 기괴했던 점은, 그 모든 덩쿨이 함교 중앙에 있는 중앙 통제 콘솔에서 뻗어나와 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덩쿨은 정원 구역에서 자라난게 아니었나? 대체 어떻게, 토양도 없고 양분도 없는 함교서부터 자라난 거지?



함교의 시스템이 작동하기는 할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대체 에버가 잠든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일단 할 일을 해야 했다. 이를 악물고 중앙 콘솔로 다가갔다.


콘솔의 화면은 꺼져 있었다. 작동하기를 빌면서 화면에 손바닥을 대자 검은 화면에 흰 글씨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 일단 전원은 유지되던 모양이다.


곧 익숙한 인터페이스가 떠오르더니, 위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함장님."



음성 시스템도 멀쩡하다고? 저 덩쿨들만 봤을때는 전부 작살나 있었을것 같았는데.



" 함선 점검."


"클레라 호의 점검을 실행합니다..."



무거운 침묵이 방에 내려앉았다. 전원이 켜져 멀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함교의 기기들을 보니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점검 완료. 점검 결과를 요약해서 들으시겠습니까?"


"그래."


"좌현 완전히 상실됨, 엔진실 설비 60% 노후화. 융합로 1,2차 제어 장치 파손.


그러나 새로운 함선 관리 루틴과 감각 단말이 지속적으로 함선을 수리중.


결과적으로, 함선 엔진 정지까지 약 1300년, 함선 내 생명 유지 가능 시간은 측정 ㅂ, 치직, 3000년."



첫번째는 통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클레라 호는 우리가 잠든 동안 나름 애쓴것 같았다.


아무리 심우주에서 항로가 꼬였더라도, 1300년이면 해볼만 했다.



"항로 확인."


"항로를 확인합니다... 현재 본 함선의 목적지는 태양계, 지구 입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아니."


두번째도 통과. 예상대로 멀쩡히 태양계를 향하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몇백년 동안 태양계로 향하고 있었으니, 도착할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목적지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


"계산중입니다..."

.

"계산 완료. 현 목적지인 태양계, 지구까지 예상되는 항해 시간은-





400년."





세번째도 통과.



긴장이 탁 풀리고, 성취감이 몰려왔다. 나와 그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고향으로.


그때였다.



"함장 대리, 신원은 음성으로 인증. 항로 재설정. 목적지는 헬릭스 성운으로."


"음성 대조 후 신원 확인 완료. 항로를 재설정 중입니다."



에버?



"큭, 키킥, 킷, 크힛"


"아, 이렇게 되면 일이 꼬이잖아요, 당 신 ? "


시발, 시발, 시발, 시발!!!


존나게 중요한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아마 첫번째 혈청 약빨이 다 떨어졌을 것이다. 멜루나가 다시 그녀의 정신을 헤집고 있었다.


뒤로 돌자 테이저건을 든 에버가 숨죽여 웃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혈청엔 발사 기능이 없다. 가까이 오게 유인해야 했다.


주머니에 슬쩍 손을 집어넣어 주사기를 꽉 쥐었다. 그녀는 두번째 혈청의 존재를 모른다.



"아까 말했던 대로 하려는거야?"


"네. 당신의 목숨이 다할때까지,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저와, 이 바다를 표류해요."


"하..."



과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좋아, 그러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는데요."



제발 의심하지 말아라...!



"...함교에 오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못해줄 것도 없다.' 가 결론이었어."


"이대로 돌아간다 해도 몇백년이나 지나 있을 텐데, 변해버렸을 세상에서 내가 뭘 할수 있나 싶기도 하고..."


슬쩍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젠 더 이상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들부들 떨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아아, 당신이 제 마음을 알아줬다는 사실, 너무 행복해서, 미쳐버릴것 같아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그녀가 점점 다가온다. 눈동자는 물론 텅 비어 있었다.


그 감정은 네 것이 아니야. 구해줄게.


이제 내 코앞에 서있는 그녀의 눈에선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주사기를 든 손에 땀이 축축했다.



"머리가 망가져 버릴만큼, 사랑해요."



"에ㅂㅡ 읍"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그녀의 입술이 살포시 벌어지며 혀가 내 입술에 닿고, 천천히 내 입술을 벌려나갔다.


순간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곤,


그대로 팔을 들어,


그녀의 뒷목에 주사기를 박아넣었다.


나머지 팔로 기우뚱 하는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기울어졌다.



성공이다.



나는 그녀를 감싸안고 서서 잠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함로를 재설정하고, 그녀를 동면시키고 나도 동면한다.


깨어나면 태양계에 도착해 있을 것이었고, 몇백년간 많이 달라졌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테였다.


기술의 발전은 내가 태어나기 몇백년 전부터 정체되었으니까, 중순양함 수석 엔지니어 정도에게 일거리는 차고 넘칠 것이었다.


그리고 에버.


일단 에버랑 약속한 대로 그녀와 함께 병을 앓아주긴 하겠지만, 그녀와 결혼해서 평생 같이 산다던가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교류해본 사람은 적었지만, 살아갈 날은 엄청나게 길었다.


분명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날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청혼한다면, 아마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


가끔씩 그런 감정 때문에 곤란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사랑' 은, 부성애에 좀 더 가까웠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병에 걸릴 때까지, 5년을 가르쳐 왔다. 그런 아이에게 이성으로써의 사랑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나는 양아버지 정도로 만족한다.


어쨌든, 그녀를 들쳐업었다. 이제 잠들 시간이었다.


"항로 재설정. 목적지는 ㅌ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옆구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닥쳐왔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며 굳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계속되는 고통 때문에 의식이 빠르게 멀어졌다.


땅바닥이 내 눈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던 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아.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3편에서 복선이고 뭐고 다 터트리려 했는데, 도화선만 태우고 폭발 직전에 끊게 되서 죄송합니다..


더럽게 긴 빌드업이라도 보아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4편은 내일 낮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