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1)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0.

 

“자, 그럼 일단 서로 소개부터 해볼까.”

 

콘크리트로 된 넓은 방.

어두운 그 방 중앙에는 큼지막한 원형 테이블과 일곱 개의 의자가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도 있을 테고, 모르는 사이도 있을 테니까.

우선 조금 이야기를 나누고 다같이 시설을 확인해보자.”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와중 그런 제안을 꺼낸 것은 미술교사 이시연이었다.

 

다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말은 몹시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침착한 모습과 유일한 성인이라는 입장 또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리하여 납치된 일곱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강문희입니다. 그, 이란이랑 같은 반이고 지금은… 여자친구입니다.”

 

가장 처음 자신을 소개한 건 강문희였다.

연인 관계임을 밝히는 부분에서는 조금 부끄러운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나머지 사람들도 줄줄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

처음 시작이 그래서였는지 다들 백이란과의 관계도 말하는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나아가던 와중 박루미라는 여자의 차례가 되었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듯 산발이 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였다.

 

특히 그녀는 나머지 사람들과 달리 백이란의 기억 속에 없는 존재였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가 자신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아니면 그저 남 앞에서 말하는 게 어색한 것인지,

박루미는 얼굴을 푹 숙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말했다.

 

“박루미… 이란이하고는 친구야…… 후히힛.”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연신 몸을 꿈틀댄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백이란이 느낀 것은 수줍어하는 소녀를 바라보는 흐뭇함 따위가 아니라 미묘한 혐오감이었다.

음침한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그녀에게서는 살짝이나마 광기가 느껴졌기에 잘못 말했다가

이상한 스위치를 건드리고 폭주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친구’라는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이 게임이라는 거 말인데…….”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모두가 이야기를 끝마쳤을 무렵 이시연은 다시 주목을 모은 후 말을 이어나간다.

 

“문희야.”

“아, 네!”

 

그러다 갑자기 이름이 불린 탓인지 강문희는 깜짝 놀라 허리를 폈다.

 

“이란이 정말 좋아하는 거 맞지?”

“네? 그… 네에, 엄청이요…….”

“결혼까지 할 정도로?”

“아으… 네…….”

 

뒤이어 날아온 질문에는 양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린다.

고개는 숙이고 있지만 분명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으리라.

 

“그럼 뭐 됐네. 문희 우승시켜주고 끝내자.”

 

이내 이시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이목이 쏠려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하품을 해댄다.

 

“멀쩡한 사람 납치해서 소유권을 멋대로 넘긴다니, 이게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냐고.

그래도 그나마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 이렇게 하는 맞잖아?”

 

너무나도 정론이었다.

이것이 어른이라는 건가 싶어 백이란은 감탄하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에 입을 연다.

 

“저기, 제 의견은요?”

“네 노예 계약서가 누군가에겐 반드시 넘어가게 될 텐데 네 의견이 무슨 상관이야?”

 

…그것도 정론이긴 했다.

참 더러운 어른이었다.

 

“그게 아니면 문희랑 결혼할 정도는 아니니?”

“아니, 그건 아니에요. 문희가 좋다면야…….”

 

백이란은 시선을 피하며 말한다.

그러다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강문희와 시선이 맞아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와, 염장질. 짜증나는데 그냥 떨어뜨려버릴까.”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이시연은 농담을 던지며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아무튼 다들 불만은 없는 거지?”

 

백이란과 강문희는 그나마 그게 나은 선택이겠다 싶어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문희 언니라면야.”

“문희에게라면 문제없어.”

 

뒤이어 수긍하는 것은 여동생인 백은하와, 한 살 많은 소꿉친구인 박선정.

 

“…….”

“루미도 이해했다는 걸로 생각할게?”

 

박루미는 말없이 백이란 쪽에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반응을 보아서는 이야기를 안 듣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대놓고 반발할 생각은 없는 듯 하기에 이시연은 시선을 옮겼다.

 

“성란아.”

“…당신,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요?”

 

마지막으로 그녀가 마주본 소녀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술부에서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하는 모습을 많이 봐온 백이란이었기에 그 모습은 꽤 의외였다.

두 사람 모두 좋은 친구이자 좋은 선생님이었고, 둘의 사이도 꽤 좋아보였던 탓이다.

 

“이런 데 오래 있고 싶진 않아. 그냥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게 제일이잖니?”

“하, 그러시겠죠.”

“그리고 그 호박이 재미를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했잖아.

그럼 최대한 재미없게 곧장 끝내버리는 게 최고의 복수 아닐까?”

 

성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어쩌면 납치감금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해버려서 너무 예민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약속을 어기고 이상한 짓을 하는 녀석이 나오면 걔부터 탈락시키는 걸로 하자. 알겠지?”

 

이시연은 싱긋 웃었고, 다들 침묵하여 답변했다.

 

그렇게 첫 회의는 끝이 났다.

 

 

1.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다함께 시설을 둘러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하도 어두운 탓에 중앙에서 벽 근처가 제대로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일곱 사람이 처음 깨어난 홀은 커다란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둘레를 따라 모두 열두 개의 방이 있었다.

 

모든 문은 그 옆에 있는 패널에 손을 가져다대면 옆으로 스르르 열리는 구조였다.

문을 여닫는 동안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만져보니 금속으로 되어 있어서 부수는 것은 불가능할 듯 했다.

 

서로 붙어있는 일곱 개의 방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확인을 위해 강문희의 이름이 적힌 방을 확인했더니 각자에게 배정된 침실인 모양이었다.

 

하필 그녀의 방이었던 이유는 그저 시계 방향으로 돌던 중 그녀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왔던 탓이다.

아무래도 침실의 배치 순서는 가나다순이었던 것 같았다.

 

딱히 잠금이 걸려있는 것은 아닌지 배정된 본인이 아니라도 문을 열 수 있었다.

 

나머지 방 중에서 넷에는 각각 ‘주방’, ‘투표실’, ‘욕실’, ‘화장실’이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으며 안쪽 역시 텅 빈 콘크리트 방일 뿐이었다.

 

욕실과 화장실은 호화스러운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넓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다만 이쪽도 잠금장치는 없었다. 그나마 ‘사용중’ 팻말은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투표실은 잠겨 있었다.

아마 괴인이 말했던 사흘 뒤가 되면 열어줄 것 같았다.

 

주방의 경우는 예상과 다르게 커다란 철문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크기가 조금 많이 크기는 했지만 학교 급식실에 있던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구조였다.

 

옆에 붙어있는 종이쪽지에는 ‘6:50, 11:50, 6:50’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마 이 시간이 되면 식사를 보내주겠다는 의미인 듯 했다.

 

그 외에도 군데군데 살펴보긴 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결국 일단 다들 침실로 돌아가서 쉬기로 하고 헤어졌다.

 

 

2.

 

스윽. 문이 닫힌다.

 

배정된 침실에 들어온 백이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대체 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자신에게 휘말려 이런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더욱 침울해지고 만다.

 

“그래도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다행이지…….”

 

백이란이 시설을 둘러보고 느낀 것은 범죄를 저지르기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너무 어두워서 누가 어느 방에 들어가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규칙을 정하지 않는 한, 살인만 아니면 무슨 짓을 벌여도 된다.

 

만약 그 자신 따위가 아니라 더욱 귀한 무언가를 놓고 게임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심각한 일들이 일어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조금 불안한 것은 눈을 가린 그 박루미라는 여자였지만

여섯 명과 한 명이라면 어지간해선 큰 문제가 되진 않을 터였다.

 

여차하면 첫 번째로 탈락시켜버려도 되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최소 열흘 정도는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담해진다.

그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아주 푹신해 보이는 침대.

실제로 눌러보니 꽤 좋은 감촉이 전해져왔다.

 

세련된 원목 옷장을 열어보니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흰 옷이 상하의 세 벌씩 들어있었다.

 

뒤이어 같은 나무로 만든 것 같은 책걸상에 시선을 돌린다.

책상에는 작은 서랍이 하나 달려 있었고, 위에는 종이가 두 장 놓여 있었다.

 

다가가서 그것을 확인해본다.

침실도 바깥과 마찬가지로 어두웠지만 책상에 스탠드가 있어서 읽는 데 문제는 없었다.

 

첫 번째 종이에는 크게 ‘안내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는 식사가 올라오는 시간이라든가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침실 문이 잠긴다든가 하는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두 번째 종이는 일종의 설문지였다.

다만 일부만 가져다 놓은 것인지 문항이 38번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모서리에 스테이플러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도 두 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백이란은 그것이 기억 속에 있는 설문지임을 기억해낸다.

분명히 이전에 학교에서 나눠주었던 것이었고, 적혀있는 필체 또한 자신의 것이었다.

 

혹시 이걸 작성하게 했던 게 그 호박 괴인 때문이었다면

대체 그녀가 얼마나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오한이 들었다

 

“…음?”

 

그러다가 문득 어느 문항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41. 당신이 초능력을 가진다면 무엇을 가지고 싶습니까?’

 

그 아래에는 그의 글씨체로 ‘치유’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남을 도울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기 때문에 좋겠다 싶어 그리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것에 표시를 해두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바로 옆에 ‘책상 서랍을 열어볼 것’이라고 적혀있는 걸 알아차렸다.

명백히 그의 필적은 아니었다.

 

백이란은 의아해하며 책상 옆에 있는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그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3.

 

어두운 실내.

커다란 홀 한가운데에 위치한 테이블.

 

강문희는 그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뒤로 넘어갈 것처럼 등과 고개를 주욱 젖힌다.

 

“…선정이 언니?”

 

그렇게 뒤집힌 시야 너머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여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금빛으로 물들인 단발.

염색하고서 꽤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정수리부터 검은 머리가 은근히 자라 있었다.

 

“아직 식사 시간은 아닌데 무슨 일이에요?”

“너도 벌써 나와 있으면서.”

“방에서 할 게 아무 것도 없다보니 차라리 넓은 쪽이 낫지 않나 싶어서요.”

“나도 마찬가지야. 방이 그리 좁지는 않은데 어두워서 그런지 많이 갑갑하더라고.”

 

그리 말하며 테이블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본다.

아직 저녁식사가 나온다는 시간까지는 30분도 더 남아 있었다.

 

박선정. 한 살 연상인 그녀는 강문희의 소꿉친구였다.

 

“최소한 책이라도 넣어주면 좋을 텐데.”

“저 어두운 데서 읽으면 눈 나빠진다?”

 

박선정은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거칠게 쓰다듬더니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아, 언니!”

 

머리가 흐트러진다며 불평하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헤실헤실 웃는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이 어두워진다.

 

“저기… 언니는 괜찮아요?”

“뭐가?”

“포기하셔도 괜찮아요?”

 

의아해하며 되묻는 박선정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강문희였다.

 

“됐어. 애초에 한참 전에 포기했거든?”

“그렇지만…….”

 

많은 요소가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전해졌기에 박선정은 피식 웃고 만다.

 

“언니 머리도 그렇고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하신 거잖아요?”

“뭐, 그건 그렇긴 한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아본다.

딱히 긴 머리가 아니었기에 금세 손끝에서 흘러내린다.

 

“내가 암만 그래도 기회 생겼다고 넙죽 받아먹는 짐승새끼는 아니야.”

“으음…….”

“그럼 뭐. 감사합니다 하고 남친을 채갔으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닌데요…….”

 

두 사람에게 비극이 있었다면 아마도 같은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그녀들이 서로의 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박선정은 동시에 그의 마음이 이미 강문희에게 기울어 있음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날부터 그녀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해봐야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평소보다 좀 더 경박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뿐이었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백이란이 말을 걸어오는 횟수가 줄어든 것은 분명했다.

 

“포기할 수 있어. 걔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니까.”

“…미안해요, 언니.”

 

그리고 그것은 강문희에게 희미하게나마 부채로 남아있었다.

자신이 그를 포기한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왔다.

 

박선정은 그런 감정을 딛고 양보한 것이다.

항상 함께 웃고 떠들면서도 이따금씩 떠오르는 죄책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더니 박선정은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윽?!”

“됐네요.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마치 훌훌 털어버린 듯 미소를 지어오는 그녀를 강문희는 바라보았다.

아니, 분명 그 속은 잔뜩이나 곪아있을 터였다.

 

“어디 두고 봐. 언젠가 훨씬 멋진 남자를 데려와서 자랑질 해줄 테니까.”

 

그럼에도 어떻게든 밝은 표정을 내보이는 그 모습에는 감탄하고 만다.

대체 어떻게 저리 강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는 없는 그 강함에 무심코 쓴웃음을 지어버린다.

 

“아, 그러고 보니 언니는 능력 뭐라고 썼어요?”

“나? 휴대전화 배터리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능력.”

“와아, 진짜 로망 없어.”

 

이 이야기를 더 파고들면 서로 기분만 처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야, 이게 얼마나 좋은 능력인데?”

“근데 정작 휴대전화가 없잖아요.”

“아니, 이런 상황에서 쓸 능력일 줄 알았겠냐고.”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에 강문희는 쿡쿡 웃었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데?”

“무려 염동력이랍니다.”

“너야말로 재미없는 걸로 적었구만.”

“네, 다음 피카츄… 으극?!”

 

신이 나서 놀려대고 있었더니 뒷덜미를 붙잡힌다.

그리고 곧바로 이상야릇한 통증이 목덜미를 내달렸다.

 

“너 저주파 마사지기 써본 적 없지?”

“악! 언니, 잠시만요…!”

 

그렇게 한참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또 누군가가 다가온다.

어두워서 꽤 다가올 때까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해요, 언니들?”

“사랑의 매.”

“은하야! 나 좀 살려줘!”

“…또 문희 언니가 선정이 언니 놀린 거겠죠 뭐.”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답을 맞히곤 의자에 앉는다.

백은하. 백이란의 여동생인 그녀는 긴 머리를 목 근처에서 대강 묶어 정리해두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뭘로 놀린 거예요?”

“아니, 휴대전화 충전하는 능력이라길래 피카츄라고 했을 뿐인데…….”

“언니는 대체 왜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 거예요…?”

 

한참이 지나서야 박선정은 그녀를 해방시켜주었다.

강문희는 테이블에 엎어져 연신 목을 문지른다.

 

그러다가 고개만 홱 돌려 백은하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은하야. 너는 능력 뭔데?”

“황금연성이요.”

“…그냥 네가 짱 먹어.”

 

최고로 로망 없는 대답이 돌아오고 말았다.

 

“왜요. 다들 돈 좋아하지 않아요? 전 좋은데.”

 

그런 실없는 대화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시간이 되어 하나둘 테이블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뭐야, 다들 너무 빨리 온 거 아니니?

나도 나름 준비하려고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식사가 오기 5분 전이 되자 어느새 일곱 명이 전부 모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이시연은 그리 너스레를 떨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런데 준비라니요?”

 

그녀의 말에 반응한 것은 백이란이었다.

 

“호박이 음식을 테이블까지 친절하게 옮겨줄 것 같지는 않거든.

아마 주방까지만 올려주고 끝이지 아닐까?”

 

테이블에 다가와서도 굳이 서있던 건 아마 곧바로 주방에 향하려 했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한두 명 정도만 더 따라와줄래? 혼자서 옮기려면 몇 번을 왔다갔다 해야할지 모르니까.”

“아, 제가 갈게요.”

“그럼 저도…”

 

배식에 자원한 것은 강문희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더니 백은하도 조심스레 따라 일어선다.

 

“이란 씨. 선생님을 너무 믿지 마요.”

“…응?”

 

세 사람이 떠나고 네 사람이 남은 테이블.

그런 가운데 성란이 갑자기 백이란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속이 시커먼 여자니까.”

 

그러나 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꾹 다문다.

갑자기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인 백이란이었다.

 

“뭐, 사람 없어지자마자 호박씨나 까는 여자보단 낫지.”

 

그러나 정작 그 말이 무언가 심기를 거슬렀는지, 반응해온 것은 박선정 쪽이었다.

그런 그녀를 성란은 흘끗 쏘아보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된다.

 

그 이후로 둘 모두 아무 말이 없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백이란은 나머지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박루미는 이 분위기가 영 불편한지 어깨를 움츠리고 힐끔힐끔 양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첫날부터 불길한 기분이 들고 마는 백이란이었다.




등장인물이 꽤 있다보니 어째 빌드업이 끝나질 않는다.

캐릭터 두 명인 글 쓸 때는 첫화에 덮치고 들어갔는데.

그래도 아마 다음 편에서는 떡씬 들어갈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