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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들만 여러 채 늘어선 마을의 새벽이 밝아 온다. 반쯤 무너진 초가집에서 살아가는 19세의 소년 지훈이가 고개를 내밀고 노련한 미어캣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지훈이의 아래에서 8살 난 동생 도훈이가 말했다.



"형... 어디 가?"



"태풍 끝났나 봐. 나가서 뭐라도 주워 올게."



"가지 마... 형... 오늘 어째 예감이 안 좋단 말이야..."



"내가 나가서 먹을 걸 못 구해 오면 넌 굶어 죽어."



도훈이는 지난번 태풍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다. 병원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천나라의 빈민들에게 부상을 입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지훈이는 도훈이를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훈이가 집 밖으로 나와 초토화된 초가집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머리가 깨져 죽은 빈민들의 잔해가 여기저기에서 굴러다녔지만 그런 모습은 이미 익숙했다. 이미 죽음과 삶을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지훈이가 낑낑거리며 초가집 잔해 하나의 틈새로 몸을 밀어넣었다.



"고구마다!"



지훈이가 고구마 자루 하나를 끄집어냈다. 아마 이 집주인이 먹으려고 차곡차곡 모아 놓은 음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집주인은 무너진 초가집의 대들보에 깔린 채 널브러져 있다. 그러니까 이제 그 고구마의 주인은 지훈이다.



지훈이가 고구마 자루를 꼭 껴안고 동생에게 줄 생각을 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때 지평선 쪽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부르릉 부릉 부르르릉!



젠장, 이 소리는! 지훈이가 있는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노예사냥꾼! 빈민촌에 들이닥쳐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작자들이다. 노예사냥꾼의 올가미에 걸렸다가는 그대로 납치당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노예로 팔릴 것이다.



노예사냥꾼의 트럭 다섯 대가 30여 대의 오토바이를 끌고 초토화된 마을에 들이닥쳤다. 저 정도 규모면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세력인 강씨 사냥꾼의 세력인 것 같다. 지훈이가 있는 힘을 다해서 질주하며 고구마 자루를 꼭 껴안았다.



탕!



지훈이가 고구마 자루를 놓치고 땅바닥에 굴렀다. 소중한 고구마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났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의 물웅덩이에 지훈이의 얼굴이 처박혔다. 지훈이의 등에 바늘이 꽂힌 것 같았다.



노예사냥꾼들이 사냥 방식을 바꾼 모양이었다. 마취총! 사람 잡기에 편하고 올무보다 사거리도 길며, 마취된 사람은 올무로 묶은 사람보다 훨씬 얌전하다. 지훈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노예사냥꾼들이 자신을 붙잡아서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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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건천 519년(서기 2021년)


천나라 대조선성 한양



따뜻한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한양 강북의 고층건물은 콘크리트와 철골을 대량으로 사용했지만 밖에서 보나 안에서 보나 한옥의 모습이었다. 올해 20세인 이민아의 얼굴에 햇빛이 비추어졌고, 민아가 휴대폰을 가지고 놀다가 고개를 들어 밖을 보았다. 태풍이 끝났다. 철골로 지어진 고층건물들은 태풍으로부터 멀쩡했지만, 아마 강남의 초가집 마을은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한양은 천나라, 일명 천 제국의 체제와 실태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천나라의 전신인 조선의 궁궐이었고 지금은 천나라의 조선 총독이 주재하는 궁궐인 경복궁이 있는 강북은 고층 빌딩과 각종 고급 시설이 잔뜩 들어서 있고, 반면 부유층이 거의 발을 들이지 않는 강남은 기와집조차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빈민촌이었다.



민아가 인형의 집을 툭 밀어 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민아의 아버지가 천나라 대조선성의 병조판서이므로 그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돈이며 책이며 음식이며 옷이며 모든 것이 철철 넘쳐흘렀다. 그렇게 누워서 막연히 시간을 보내는 스무 살의 머릿속에서는 별다른 생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기지개를 펴고 나서 일어나 벽에 걸린 저고리를 입었다. 비단 저고리도 있고 무명 저고리도 있지만 요즘 그런 거 아무도 안 입는다. 싸고 가볍고 무엇보다 더 색도 선명한 폴리에스테르 저고리가 있는데 왜 그런 걸 입겠는가.



"산책 다녀오겠습니다!"



집 안에서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래, 잘 다녀와라!"



민아가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채로, 가방을 걸어 매고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고층건물들의 숲을 지나, 거대한 빌딩 사이에 숨은 지하의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갔다.



공간 안에서는 미러볼이 번쩍거렸고, 광대와 기생들이 돌아다녔다. 이곳은 노예시장이다. 경매로 노예를 사고파는 장소. 민아는 노예시장에서 경매 광경을 보며 새 주인에 낙찰되어 질질 짜는 노예들의 모습을 보며 즐기는 악취미가 있었다. 그녀가 앞에서 나누어주는 가면을 쓰고 의자에 앉아서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노예사냥꾼으로 보이는 이들이 먼저 경매에 올릴 노예들을 나체로 묶어서 무대로 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천나라 조정에서는 노예사냥을 엄금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노예사냥꾼들에게도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이 끔찍한 세상에서 나름대로의 살 방식을 찾아낸 이들이었다. 전선이 곧 국경이고 인간이 사고 팔리며, 세계가 일곱 개의 초강대국(아스텍-잉카 연합 왕국, 천나라, 소비에트 연방, 응우옌 왕조, 무굴 제국, 보나파르트 황조, 신성 오스만 제국)에게 분할당한 이 시대에 정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군인으로 살며 평생 전장에서 구르다가 비명횡사하거나, 귀족 혹은 특권층 자손으로 태어나 억만금의 거부로 호의호식하거나, 빈민으로 살며 밟히거나.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시대였다.



민아가 지갑을 꼭 움켜잡았다. 언제 소매치기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녀가 무대를 바라보면서 야릇하게 미소지었다. 진행자가 나와서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거두절미하고 경매를 시작합니다. 오늘의 첫 번째 상품은 오늘 아침에 빈민가에서 잡혀 온 소년입니다!"



노예사냥꾼들이 소년 한 명을 끌어냈다.



겁을 잔뜩 먹은 소년이 벌벌 떨면서 구매자들 앞에 나체로 섰다. 양 팔은 뒤로 묶었고 다리에는 족쇄를 찼다. 귀여운데? 민아가 미소지으면서 그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년이 덜덜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행자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외쳤다.



"가격은 10냥(=약 20만 원)으로 시작합니다! 누구 있습니까? 누가 10냥을 내시겠습니까?"



그러자 나이 든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가면을 써서 정확히는 안 보이지만 탄광을 가지고 있는 거부 이희두가 틀림없다. 이희두가 소리쳤다.



"10!"



광산이나 어선, 혹은 군대에서 노예는 써서 없애는 소모품 수준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아마 저 사람에게 판매된다면 저 소년은 20년의 짧은 인생이 그대로 끝나 버릴 것이다. 공포에 질린 소년을 바라보던 민아에게 전에 없었던 작은 불쌍함이 피어 올랐다. 소년이 두리번거리다가 민아와 눈을 마주쳤다. 소년이 제발 아무나 도와 달라는 표정으로 민아를 바라보았다. 민아가 피식 웃고 지갑을 열어 본 다음 손을 들며 소리쳤다.



"15!"



"열다섯 냥 나왔습니다! 더 없습니까?"



그러자 곧바로 이희두가 받아쳤다.



"20!"



다시 소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민아가 손을 들면서 외쳤다.



"30!"



이희두가 30이라는 말을 듣고 손을 뗐다. 소모형 자원으로 써버릴 노예에게 30냥 이상은 아마 좀 지나친 가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민아가 피식 웃고 그 노예를 바라보았다. 노예가 민아를 바라보면서 공포 반, 감사함 반으로 눈을 깜박였다. 진행자가 소년의 목에 걸려 있던 번호표 "1"을 떼어서 민아에게 던졌다. 민아가 번호표를 낚아채서 주머니에 넣었다. 경매가 끝나고 이 번호표를 건네면 노예증명서와 함께 소년을 인수해갈 수 있다.



민아가 의자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30냥! 젠장, 내가 무슨 생각으로 노예한테 30냥을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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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


1화 탈고함.


적어도 40화까지는 예상해봄. 근본 장르는 sm일 것 같고 여주인님이 얀데레.


일단 수위야설 주제에 세계관이 얀나 방대하다... 원래 본인이 쓸 예정이었던 전쟁소설 세계관이라 그런 듯.

그러니까 사실 이 이야기는 스탠드 얼론 스핀오프(본편과 전~혀 무관한 외전)인 셈.



작중 배경이 되는 천나라는 조선이 16세기 초에 연산군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선포한 제국이라는 설정임.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프리퀄로 예정중인데 얀데레하고 무관해서 여기에는 안 올라올 듯)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해당 시점에는 이미 퇴물국가고, 남쪽에 있는 응우옌 왕조 외에는 모든 국가와 전쟁중임.

유교탈레반은 연산군한테 다 쓸려나가서 생각할 필요 없음

기본적으로는 조선 시기의 신분제를 영위하고 있어 위에서부터

 황족(이씨 가문) ㅡ>> 양반(구 사대부, 혹은 사업가) ㅡ>> 양민 ㅡ>> 천민 ㅡ>> 노비 ㅡ>> 노예 순임.

동아시아는 다 먹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는 사실상 난징(남경)이고, 본토인 한반도는 대조선성이라고 해서

추켜 세우기는 하지만 사실상 오랜 시간 그냥 방치되었음.


천나라가 15세기에는 유럽까지 다 처먹었기 때문에 이쪽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식민 지배하지 못함.

때문에 아메리카의 잉카와 아스텍이 건재하고,

두 국가가 연합을 이루어 지금은 남북아메리카를 모두 먹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음.

식인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국가적인 스케일은 아니고,

대신 응우옌으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목장에서 인육을 사다 먹음.

얘들도 노예제가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중임.


오스만 제국은 천나라에게 망했다가 재건되어 신성 오스만이라는 이름으로 아랍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지배 중이고,

천나라가 쇠퇴한 이후 한동안 군웅할거의 시대였던 유럽은 나폴레옹에게 통일됨.

영국도 나폴레옹에게 먹혔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가지 않은 탓에 보나파르트 황조는 아직까지 건재.

보나파르트 황조는 노예제는 철폐되었지만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이 계속 내란을 일으켜대서

내란지역은 사실상 소말리아 상태.

여담이지만 현재 중동에서는 석유를 두고 보나파르트 황조의 제 77차 십자군 원정이 진행 중.


소비에트 연방은 부동항(블라디보스토크)도 없고 몽골은 천나라에, 우크라이나는 보나파르트 황조에 처먹힌 상태라

물자와 식품도 다소 모자라고 해군력과 운송력도 미약해 실제 역사보다 훨씬 형편없이 약함.

해당 시점의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이 소설에 몇 없는 실제 인물)

웃긴 건 다른 국가들이 핵노답 개막장이라 소련이 차라리 일반인 살기에 괜찮은 나라 취급받음.

(오스만은 사막화로 인한 기근+노예제, 보나파르트는 중앙정부가 힘을 못 쓰는 곳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무굴 제국은 카스트와 전란, 아스텍-잉카 연합은 노예제에 식인,

응우옌은 인간목장과 공장식 국가 운영 체제, 천나라는 신분제와 군국주의)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와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남부(북부는 천나라령)를 지배 중인 국가.

국가 자체가 하나의 공장처럼 돌아감.

남성은 16세부터 군복무(군복무이기는 하지만 물건 생산과 강제노역에 동원됨),

여성은 16세부터 임신복무(쉽게 말해 애 낳는 기계 취급)을 강요받음.


무굴 제국은 카스트로 이루어진 신분제가 강하며,

천/응우옌/소련/보나파르트/오스만과 모두 접경중이라 전란이 쉴 새가 없음.

심지어 보나파르트의 십자군 원정은 목표는 오스만인데 밟고 가는 땅은 무굴 제국.

여기에 오스만은 왜 무굴 제국이 길을 열어 주냐면서 무굴 제국을 존나 때림.


있는 세계관 가져다가 얀데레 소설 쓰는거라 쓸데없이 세계관 겁나게 방대하다. 양해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