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헤매는 흡혈귀 사냥꾼이 풍작신과 만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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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품]

얀데레 안드로이드의 주인에게서 시민권을 상큼하게 빼앗아보았다(총 10화)

https://arca.live/b/yandere/14626115

 

자결투표(총 25화)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K시 살인사건에 관한 면담 카르테(단편)

https://arca.live/b/yandere/19964826

 

 

0.

 

고독한 자여,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간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하고, 오로지 사랑하는 자들만이 경멸하기에 그대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는 탓에 창조하려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경멸할 필요가 없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열린책들, 2015.

 

 

1.

 

따스하게 내리쬐는 태양에 드미트리는 무심코 하품을 했다.

온몸이 나른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협회의 습격이 있은지로 닷새가 지났다.

진령이 폭주한 탓에 나무들은 이상한 형태로 자라나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나무 둥치에 기대어 몸을 반쯤 뉘였다.

 

“…드미트리.”

 

그리고 바로 곁에는 팔을 꼭 끌어안은 진령의 모습이 있었다.

 

“떠나지 말거라.”

“아뇨, 오줌이 마려워서…….”

 

조금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자 그녀는 곧장 몸을 벌벌 떨며 드미트리를 더욱 붙잡았다.

 

“안 된다. 놓아줄 수 없도다.”

 

그날 이후로 진령은 줄곧 이런 상태였다.

그녀는 드미트리와 떨어져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의 죽음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경험 탓이리라 드미트리는 짐작했다.

아무리 담피르라 하여도 한 번 죽음을 겪은 이상 다음 기회는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

 

진령은 심각한 불안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나마 소하라도 있다면 티격대면서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마저도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가지 말거라. 다른 곳으로 갈 필요 따윈 전혀 없느니라.”

“아, 잠깐…….”

 

뭐라 할 새도 없이 바지를 훅 벗겨버리곤 서지도 않은 페니스를 입에 무는 그녀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속에서 귀두를 혀로 날름날름 굴려대자 순식간에 피가 몰리고 만다.

그것을 감지하고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히죽 웃는다.

 

이윽고 진령은 이전의 뻣뻣한 움직임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그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혀끝으로 요도구를 콕콕 찔러 간질이면서도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아랫배를 빙글빙글 돌리듯 살살 눌러댄다.

 

“윽…….”

 

결국에는 차마 견뎌내지 못하고 오줌이 새어나오고야 만다.

 

그러나 진령은 오히려 기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페니스를 더욱 깊숙이 물었다.

천천히 목이 꿈틀거리며 입 안에 든 것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모습이 보여왔다.

 

“푸하… 이제 괜찮느냐?”

 

그렇게 한참을 물고 있다가 겨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진령이었다.

 

벌써 매일같이 이런 일을 해오는 그녀였으나 행위가 행위다보니 아무래도 아직 거부감이 들었다.

 

5일째 반복되는 행위였으나 아직 일상에 스며들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되레 과격하다고 하는 게 올바를지도 모른다.

 

그래, 5일이었다.

습격이 있던 날로부터 닷새.

 

──그리고 소하가 눈을 감은 날로부터 닷새.

 

선언했던 날이 이미 지났음에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추정에 따르면 여유를 두려면 모든 준비가 일주일 안에는 해결되어야 했다.

 

…소하가 다시 깨어난 것은 그 다음날 노을이 질 즈음이 되어서였다.

 

 

2.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흘렀다.

 

“날이 얼마나 지났소?”

 

깨어나자마자 소하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그것이었다.

 

오랜만이라는 말도 기다렸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한마디.

그러나 그 말은 결코 퉁명스럽거나 차갑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길에는 따스한 애정이 서려있었다.

 

그저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소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에 여유를 가질 수 없을 뿐이었다.

 

“하, 이 몸이 아주 늦긴 했던 모양이구려.”

 

그녀의 부활에 엿새나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몹시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오.”

 

뒤이어 멋쩍은 미소로 사과해온다.

 

“요 악독한 여우 년 목덜미를 끌고 나오느라 늦었소.”

 

그리 말하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는 소하였다.

빙의라는 불안한 형태였던 르나르였지만 아무래도 어찌어찌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여튼 오랜만에 이 말은 해야겠지. 사랑하오, 드미트리.”

“…네, 그래요.”

“에이, 너무 차가운 거 아니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게 그대에게만 두 번째거늘.”

 

다음으로는 키득대며 드미트리를 바라보다가 목덜미를 끌어당겨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하긴 부활을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태어나서 처음이기는 했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소. 안 그래도 저 할망구가 엿새나 그대를 독점할 기회를 줘버렸는데 더 늦을 수야 없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소하는 떠났다.

전력으로 내달리며 산비탈을 내려갔다.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너무나도 무자비하게.

 

…더욱이 사흘의 시간이 지났고, 소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큰일이네요…….”

 

드미트리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소하가 아직 오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원치 않은 인물이 찾아오고야 만 탓이다.

 

아니, 더욱 상세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데, 정확히는 인물‘들’이 찾아왔던 것이다.

 

협회 쪽 사람들이 이곳에 오고야 말았다.

그것도 아주 칼을 갈고서.

 

“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드미트리…?”

 

곁에 있는 것은 당황한 표정의 진령이었다.

그야 시간초과 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그럴 만도 했다.

 

“드미트리와 내 사이를 가로막는 녀석들은 죽여버… 리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죄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말투였다.

그래도 늦게나마 말을 바꾸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까.

 

“아뇨, 들어오면 죽여도 괜찮은데요?”

“그, 그래도 되는 게야…?”

“저쪽에서 먼저 움직이면 말이에요. 저희 의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게 훨씬 협상에 용이하고요.”

 

저쪽에서 공격하면 반격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이쪽도 움직이지 않는다.

 

드미트리가 바라는 건 대충 그러한 것이었으니 보복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편이

상대 입장에서도 훨씬 이쪽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무조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조금 자세히 말해주시겠나요?”

“아직 산에 들어오지는 않았고…….”

 

이내 설명을 이어나가는 진령의 말을 드미트리는 잠자코 들었다.

 

“여차하면 산을 통째로 태워버릴 생각이라도 되는 모양인데요…….”


그리고는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그였다.

 

진령에게 들은 인물들의 모습으로 미루어보건대 협회에서도 쟁쟁한 양반들을 잔뜩 데려온 게 틀림없었는데

거기에 더해 최종 수단까지 마련해온 듯 보이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 어쩌겠느냐 드미트리?”

“어쩌긴요. 협상을 해야죠.”

“하지만… 흡혈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잖느냐.”

 

협상을 어쩌니 저쩌니를 떠나서 협상 재료부터가 없었다.

진령이 그런 반문을 해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어쩔까요? 어차피 정면으로 맞붙으면 결국에는 저희가 질 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방법이라곤 오직 그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죠. 소하 씨가 곧 돌아온다는 전제로 시간이나 끌어보는 수밖에.”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원.

드미트리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따라가겠노라.”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어차피 협상이 실패하면 나는 죽은 목숨이지 않느냐.”

 

이내 진령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지막에는 곁에 있게 해다오.”

“…….”

 

그녀의 눈빛에는 짙은 결의가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드미트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팽개쳐둔 가방에서 큼직한 외투를 한 벌 꺼내 그녀의 몸을 둘러주었다.

 

“…드미트리?”

“그럼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알몸으로 나가시렵니까?”

 

드미트리의 행동에 조금 당황한 듯 했던 진령이었으나 이내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저 당황할 정도로 너무나 고마웠을 뿐이니라.”

“그러십니까.”

“하아, 드미트리의 냄새…….”

 

…아마 세제나 섬유유연제나 뭐 그런 쪽 냄새일 것이다.

 

혹시나 하는 경우를 대비해 챙겨온 겨울옷인지라 세탁 이후로 입은 적이라곤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럼 가볼까요?”

“그, 그래.”

 

아무튼 행복해보이니 된 거라고 대충 넘겨두고서 드미트리는 그리 말했다.

그러자 정신이 팔려있던 진령은 그제야 부랴부랴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인데 나무가 멋대로 길을 비켜주니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

"……."

 

그리고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에 보이는 것은 꽤나 많이 모인 사람들의 모습.

 

뒤이어 드미트리는 그 중에서도 익숙한 인물들을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앞에 서있는 세 사람.

아마도 저번에 진령이 말했던, 왔다가 상황을 보고 그냥 돌아간 인물들이 틀림없었다.

 

“오랜만이다, 아들!”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상황이 이렇게 되는 거니.”

 

그 중에 두 명이 자신의 부모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배건하는 창백하고 여윈 모습임에도 밝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고,

탁목조는 눈썹을 가볍게 씰룩이며 아들이 친 사고에 한탄하고 있었다.

 

“지… 드미트리.”

“본명으로 부르셔도 되는데요.”

“사람이 많으니 최대한 조심해야지.”

 

그리고 가장 상관으로 보이는 인물은 2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은 덩치의 사내였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터질 듯한 정장’ 외에는 다른 묘사를 차마 할 수 없을 만한 근육질이었다.

 

“그래서 포기할 마음이 든 거냐?”

“포기라니요?”

 

이수는 이내 턱짓을 하여 진령을 가리켰다.

덕분에 이목이 끌리자 부담스러운지 드미트리의 뒤에 쏙 숨어버리는 그녀였다.

 

“글쎄요. 가능하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협상을…….”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말 못 들어봤나?”

“에이, 그래도 테러범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능청스럽게 말을 넘기는 드미트리였지만 찔리는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만약 소하가 진령을 말리지 못했다면 분명 근처 사람들을 잔뜩 죽여버렸을 테니까.

 

이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드미트리. 산에서 나와라.”

“저주를 받은 거라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만?”

“한 번 죽었으니 이젠 괜찮을 텐데.”

 

드미트리는 혀를 찼다.

역시 이런 걸로 어영부영 넘기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제가 되는 건 그쪽 개개인이 아니라 둘의 관계다.”

 

이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 네가 스스로 떠난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는 셈이지.”

“과연 이쪽 신께서 가만히 두고볼까 싶은데요?”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의 발단은 드미트리와 진령의 관계로 인해 풍작신의 힘이 폭주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드미트리가 산을 떠난다면 진령은 온힘을 다해 주변을 파괴하겠지.

 

“그럼 퇴치하는 수밖에. 항상 그래왔으니까.”

“흠… 그러네요…….”

 

드미트리는 팔짱을 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싫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부의 말을 내뱉은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급격히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짓누르는 듯한 공기가 퍼져나갔다.

 

“싫다면 억지로라도 하는 수밖에.”

“…윽?!”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는가 싶었을 때는 이미 그의 발목에 사슬이 칭칭 감긴 뒤였다.

 

뒤이어 그의 다리가 끌어당겨지기 시작해 균형을 잃고 벌러덩 넘어졌다.

 

상황이 아주 곤란했다. 만약 저 많은 인원에게 붙들린다면 빠져나갈 길은 없다고 봐도 좋다.

 

“…역시 이상할 정도로 자해에 주저가 없군.”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든 드미트리가 스스로의 발목을 잘라낸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이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만 그는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너희들, 방금 드미트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게냐?”

 

이어서 찾아오는 것은 호흡을 억누르는 것만 같은 목소리.

 

목소리는 크지도, 낮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저 무거울 뿐이었다.

 

“지금 내게서 드미트리를 빼앗으려고 한 게야?”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나무가 쏟아져내렸다.

그 모습은 ‘쏟아졌다’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슬을 붙잡고 있던 몇 사람들이 순식간에 꼬챙이에 꿰여 숨을 거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것은 큰 덩치의 이수가 앞에서 막아내었다.

 

“덩치. 너는 꽤 단단한 모양이로구나."

“잠깐만요. 일단 진정하세요. 그리고 저 사람 불 아니면 다치지도 않거든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에서 제일 침착해 보이는 것은 발목이 잘린 드미트리였다.

그리고 조금 더 넓게 봐도 그의 부모 정도가 전부였다고 봐도 좋았다.

 

“진정? 네가 다쳤는데 어찌 진정하란 말이더냐?”

 

하지만 진령은 온몸에서 내뿜어지는 살기를 전혀 누그러뜨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오죽했는지 저 뒤에 있던 두어 명이 거품을 물고 픽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리고… 이젠 내가 진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듯 보이니라.”

 

진령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 대로였다.

이미 저쪽은 완전히 전투 태세를 취한 이후였으니까.

 

“하아…….”

 

드미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왜 이런 꼴에 처했는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휴, 테러범이라고 대화도 없이 다리를 잘라가시다니.”

 

그렇다면 적어도 분위기라도 이쪽으로 끌고오는 수밖에.

그리 생각하며 그는 입술을 떼었다.

 

“그렇게 나오시면 진짜 테러를 하는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럼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사냥해야지.”

“아,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드미트리는 웃었다.

적어도 이것이 당당한 모습으로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참고로 테러 대상은 한반도 전역이니까 유의해주세요.”

 

갑자기 규모가 너무 커진 탓인지 이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드미트리를 노려본다.

 

“그 정도의 힘까지는 없을 텐데?”

“그래도 온힘을 다하면 이 나라 절반 가까이는 작살낼 수 있을 걸요?”

“과장이 심하군.”

“저희 쪽에는 한 사람 더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길.”

 

실제로 반쯤 허세에 가까운 말이었다.

준비가 갖춰진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 준비가 되어있질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소현의 딸을 말하는 거냐.”

“아, 백작님 아버지 성함이 그거였죠?”

“실제로 그 정도 힘이 있느냐는 둘째 치고… 설령 그만한 피해가 나오더라도 퇴치할 가치는 있다.”

 

이번 일로 발생할 피해와 불안요소의 배제라는 두 가치를 저울에 재었을 때

충분히 시도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고 이수는 판단했다.

 

“그럼 그 이상의 피해를 가한다면?”

“…뭐?”

“말했잖습니까. 박살내는 대상은 한반도 전체라니까요?”

 

그의 말에 꼬리를 물며 드미트리는 입꼬리를 비쭉 틀어올렸다.

 

“증원을 불렀습니다.”

“…소현의 딸이 여기 없는 건 그래서였나?”

“뭐,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와중 그는 한 차례 침을 삼켰다.

 

“백작님의 아버지는 잘 아시는 모양이니 넘겨두고, 어머니 쪽이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

“여러모로 봤을 때 여우겠지.”

“그건 척 보면 알잖습니까. 어떤 여우겠느냐 이 말입니다.”

 

저쪽에서도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파고들 틈이 존재했다.

본능적인 호기심을 자극하여 대화를 이어나가고 최대한 시간을 끈다.

 

“애초에 이 산을 빠져나갔다는 건 한 번 죽었다는 의미잖습니까?”

“그렇군. 확실히 뭔가 있긴 한 모양인데.”

 

소하가 담피르라는 건 저쪽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일 터였다.

그러나 명백히 흡혈귀의 힘을 보인 이상 담피르로서의 목숨은 이미 소모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

 

그럼 의문이 생긴다.

대체 무슨 수로 그녀는 다시 부활할 수 있었는가.

 

“그냥 스포일러 해드리겠습니다. 풍작신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라는 게 정답이랍니다.”

“……!”

“아, 죄송해요. 좀 전에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드미트리는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다리가 잘려 주저앉은 자세였기에 조금 멋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풍작신이 두 명. 그리고 풍작신의 피를 이은 아가씨가 한 명.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사람이 많다보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인물들이 있는지 웅성거림이 퍼져나간다.

 

“갑자기 뭡니까? 어차피 허세일 게 분명한데…….”

“…움직이지 마라.”

 

드미트리가 분위기를 휘어잡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떤 사내가 앞으로 나오려했으나 이수는 팔을 들어 그를 막아세웠다.

 

“대, 대체 뭐를 무서워하는 겁니까…?”

 

사내는 불만을 표하려다가 이수의 얼굴을 보고는 당황의 목소리를 흘렸다.


그는 몹시도 당혹이 깃든 표정을 짓고 있던 탓이었다.

그 강건한 남자의 눈동자가 가벼이 떨리고 있었다.

 

…퍼즐이 완전히 맞춰졌다.

 

조금이라도 힘이 더 필요한 상황에 소현의 딸이 왜 산을 떠났는지.

그리고 대체 왜 드미트리가 저렇게 당당한 모습인지.

 

여우. 그리고 풍작신.

듣기로는 소현의 아내는 그녀를 낳고 곧장 바다를 건너 떠나버렸다는 모양이다.

 

어쩌면 하(荷)라는 이름부터가 정답을 알리고 있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그 순간 정적을 깬 것은 너무 웅장해서 이 상황엔 오히려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였다.

 

“아, 잠시 전화를 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유유히 자기 전화를 받을 강심장이라 해봐야 몇 없었다.

탁목조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귀에 가져다댔다.

 

“응? 그러니? 그래. 잠시만 기다리렴.”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대화를 하는가 싶다가 스피커폰으로 바꾸어 그 목소리를 모두에게 들려준다.

 

[──드미트리, 들리시오?]

 

음질이 좋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명백한 소하의 목소리였다.

 

[지금 막 배에서 내린 참이오.]

“늦었잖습니까…….”

[미안하오. 어머니가 할 줄 아는 한국어는 삼국시대로 끝이니 통역을 구하느라 설득이 오래 걸리고 말았소.]

 

당연히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분명 쓴웃음을 짓고 있으리라 드미트리는 짐작했다.

 

“아무튼 어머니 좀 바꿔주시겠어요?”

[어머니라니. 드미트리, 장모님이라 부르시오.]

“어머니 바꿔주세요.”

[쯧, 도통 받아주질 않는구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불만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귀엽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뒤이어 조금 나이가 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라서 그런지 거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허나 그 이름만큼은 확실히 들려왔기에 이수는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사실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들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저 너머에 있는 상대가 누구일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삼국시대에 일본 열도로 넘어간 도래신이자 여우와 동일시되는 풍작신.

이수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상호확증파괴는 완성된 거 같은데.”

 

이나리노가미(稲荷神). 후시미이나리타이샤(伏見稲荷大社)의 그녀가 찾아왔다.

찾아오고야 만 것이었다.


“…좋아. 어디 이야기를 해보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 외에, 이수에게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의 처갓집 센본도리이로 대체되었다

이번 편 묘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계속 고민하고 갈아엎느라 좀 늦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