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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십시오. '얀순 님'."

지금은 시종이 된 얀순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얀진을 깨우고 있었다.

얀진은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으음... 잘 잤군. '얀진'아, 내 옷좀 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말투도 서로 바꿨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 번 연습하고 나니 익숙해졌다.

"오늘 11시에 국정 회의가 있습니다."

"아~ 가기 싫은데. 어차피 난 신하들의 말을 듣지도 않을 건데."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안 가시면 신하들의 군소리가 더 심해질 테니."

"그래 알겠어. 오늘 아침은 뭐지?"

"얀순 님께서 좋아하시는 닭고기 요리입니다."

"좋아, 2인분 갖다 줘. 너랑 같이 먹게."

"감사합니다."

식사를 가져온 '얀진'은 '얀순'이랑 같이 식사를 했다.

빈민가에 살았던 얀진은 지금 이 식사를 하는 것이 매우 행복했다.

"아, 맛있습... 아니 맛있다. 얀진, 목욕하게 욕조에 물 받아놔줘."

"알겠습니다."

'얀진'이 욕실로 들어가자, '얀순'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얀순 님을 지금 너무 부려먹고 있는 거 아냐? 어떡해! 어떡해!'

"목욕 준비 다 마쳤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 알겠어. 들어갈게."

'얀순'은 탈의실에서 잠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럼, 얀순 님. 시중을 들겠습니다."

'얀진'은 손수 '얀순'의 몸을 씻겨줬다.

비누 거품을 내 온몸에 바르고, 행궈내고, 좋은 향이 나는 향유를 발랐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 너만 그렇게 말하면 됐어. 난 다른 사람들의 평가 따윈 필요 없으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얀진'은 '얀순'의 고운, 머리카락과 몸을 조심스럽게 말리고, 그녀에게 옷을 입혀줬다.

"오늘 드레스는 뭘로 입고 가시겠습니까."

"음... 수수하게 순백의 드레스로 줘."

"알겠습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얀순'은, 귀찮지만 회의장으로 가서 국정 회의를 할 준비를 했다.

물론, 실상 그녀가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얀순'의 옆에는 '얀진'이 섰고, '얀순'이 앉아 있는 황좌 밑으로 신하들이 서 있었다.

이번에도 똑같다. 신하들은 간언하고, '얀순'은 듣디 않는다. 심할 경우 '얀순'은 자신의 심기에 거슬리는 말을 한 신하를 발설형(혀를 뽑는 형벌)에 처하게 하기도 했다. 백성들이 착취당하는 건 변치 않는다.

결국 이번 회의도 흐지부지 하게 끝났다.

"지루해라. 다 똑같은 것들이야. 입은 여러 개인데, 하는 말은 다 똑같아. 안 그래? '얀진'."

"그렇습니다. '얀순 님'."

"그런 점에서 난 네가 좋아. 넌 다른 것들과 달리 특별하니까."

"그렇게 여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이만 물러나렴."

"알겠습니다. 얀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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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인 척하고 있는 얀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내가...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내 입으로,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잔인한 성격의 안순이었다면 죄책감 따윈 없었겠지만, 얀진은 달랐다. 얀순으로서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하를 처형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 없는 신하여, 절 용서해 주세요."

얀진은 죄책감에 사과의 말을 연신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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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진인 척하는 얀순은 일을 하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재밌네. 얀진이는 매일 이런 걸 하고 있는 건가?'

그 순간, 그녀의 주위로 몇 명의 메이드가 모인다.

"뭐지?"

얀순은 순간 자신의 말투로 말했다.

아차 싶었지만, 메이드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그녀를 얀진이 대하는 듯이 말했다.

"너, 도대체 뭐야?"

"너랑 전하랑 무슨 관계야?"

황태녀의 성격이 어찌됐든 간에, 황태녀의 전속 시녀는 이 황궁 내의 시종들 중 가장 편한 일을 하는 시종이어서 메이드들은 얀진이를 질투하고 있었다.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인 주제에, 대체 뭔 재주로 그 자리를 얻은 거야?"

"몸이라도 내준 거 아냐? 어디 고위직 관리한테 말이지."

소문은 와전되는 법, 이제 막 들어온 소녀가 가장 편한 시녀가 되니 메이드들의 질투가 만들어낸 소문이 이렇게까지 퍼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말을 듣는 얀순의 마음은 평온했다.

'음, 메이드들을 싹다 죽여버리고 새로 고용해야겠구만.'

아니, 얀순은 평온한 분노를 삼킨 채 그녀들을 벌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얀순은 그녀들을 무시하고 자기 갈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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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고, 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떠셨습니까, 얀순 님? 제 일은 힘들지 않으셨는지요?"

"생각보단 안 힘들었어. 그나저나 너도 대단해. 난 분명히 너가 신하를 처형할 때 좀 고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얀숭 님을 연기하려면, 신하는 바로 처형시켜야죠."

"마음에 드네. 아, 얀진아, 내일 너한테 선물을 줄게."

"선물요?"

"어, 내일, 황궁의 마당으로 같이 가자. 내가 좋은 선물을 준비해놨으니."

"영광입니다."

"좋아. 그럼 얀진아. 오늘은 같이 잘래?"

"네? 괜찮습니다. 전 제 방에..."

"네 방에서 내가 자보니까 너무 불편해. 먼지고 많고. 이상하다? 내가 분명히 좋은 방으로 하라고 말했는데."

"시종들의 방이 다 그렇죠.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냐. 내가 말했지?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라고. 그러니까 너도 편한 방에서 자고, 좋은 음식만을 먹어야 해. 아쉽게도, 아직 방은 준비 못했으니, 오늘은 나랑 자자."

"알...겠습니다."

"일단 씻자. 같이. 이번엔 내 시중 들지 마."

"그래도..."

"아냐. 그냥 앞으로도 우리 단 둘이 있을 때에는 내 시중 들지 마. 내가 한 말을 내가 안 지켰네. 그래도 오늘 아침엔 내가 네 시중을 들었으니까 조금 봐줘."

"....네."

"좋아. 그럼 같이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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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두 명의 여자가 욕탕에 같이 있었다.

"하, 좋다. 오늘은 힘든 일을 해서 그런지 더 기분이 좋은 걸?"

"저... 오늘 일이 힘드셨습니까?"

"뭐, 황태녀로서 편한 삶을 살아오다가 갑자기 시종 일을 하니 힘들 수 밖에 없지. 예상한 일이야. 그리고 너가 맨날 그런 취급을 받아온 걸 몰랐던 게 미안하고."

"그런... 취급이라뇨?"

"아냐. 내가 분명히 너랑 나랑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너만 힘든 일을 하도록 한게 좀 미안해서."

"아닙니다. 절 빈민가에서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전 어떤 어려운 일이든...."

얀순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얀진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쉿.... 괜찮아. 널 구한 건 순전히 내가 원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그래도 전 은혜를 갚고 싶은데..."

"아 우리 얀진이는 너무 착하다니까. 때로는 좀 이기적이어도 되는데. 따지고 보면 넌 지금까지 쭉 힘들게 살아왔으니까, 나한테 부탁해서 좀 편하게 살아도 돼. 반대하는 애들은 내가 치워버릴 테니."

얀진은 마지 못해 얀순이의 말에 동의했다.

그날 밤, 얀진은 일생 중 가장 안락한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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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 얀진. 내가 오늘 선물을 준다고 했지?"

"네. 얀순 님께서 주신 선물이 정말 기대됩니다."

"네 마음에도 쏙 들 거야."

마당으로 간 얀순과 얀진.

그런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극심한 고문을 받은 듯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메이들이었다.

얀진은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죠?"

"어젯밤, 내가 너랑 역할을 바꿨을 때, 감히 네 험담을 하던 메이드들을 봐서 말이야. 그에 대한 벌을 좀 줬어."

"저... 그게..."

"왜 나한테 말을 안했어? 난 네가 상처받는 게 싫은데 말이야."

"그야... 안순 님에게 안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얀순은 분노하면서 말했다.

"얀진아, 얀진아. 우리 얀진이. 네가 그런 말을 안했다는 게 나한텐 안 좋은 소식이야. 알겠어? 앞으로 널 괴롭히는 애들, 험담하는 애들, 적대시하는 애들이 있으면 내게 바로 말해, 그런 놈들은 먼지 치우듯이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

"대체...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시는 겁니까. 피를 맺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이런 짓은 안합니다."

"메시아 컴플렉스라는 거, 들어봤어?"

"그게 뭐죠?"

"요약하자면, 영웅심리인데. 한마디로 '나만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심리야."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뭐가 관련이 있--"

얀순은 참을 수 없는 듯 그녀와 찐한 키스를 하며 말했다.

"난, 너만의 메시아가 되고 싶어. 널 상처 입히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해. 널 악담하는 존재는 죽어야만 해. 널 괴롭히는 존재는 똑같이 괴롭힘 받다가 고통을 겪으며 쓰러져야만 해. 왠줄 알아? 그만큼 난 널 소중히 대하고 있어. 근데 네가 너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얀순은 반시체 상태인 메이드들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또 널 괴롭힌 애들은 누구야? 또 너에게 악담을 퍼부은 애들은 누구야? 말만 해. 그럼 앞으로 네 인생에서 그것들을 볼 날은 없을 테니."

얀진은 혼란스러운 채로, 얀순의 눈을 보았다.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얀진 말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