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나와라지도 교관을 기다리게 할 생각인가?”

 

황당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즈쉬엔이 닦달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오른쪽 구석을 좋아하는 정설아라 맨 끝이었기에 4분 정도는 끌 수 있었다.

 

왜 소설 내용과 틀어진 걸까.

나로 인한 나비효과라 치부하기엔 아직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다.

 

기껏해야 바알을 만났다는 정도.

 

잠깐만바알?

 

시발설마

 

내가 소설을 떠올릴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인지 단말기가 진동하며 창을 띄웠다.

 

[즈쉬엔은 바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대로 증명된 능력 하나 없으면서 교관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년.

당국의 정보망을 이용하여 바알에 관한 정보를 모았으나 신원불명이라는 결론만 나왔다.

 

처음부터 싫던 것은 아니다.

 

본신의 위력이 살짝’ 모자라지만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여 쟁취하는 것.

멍청한 것들은 협작질이라 손가락질하지만 정치 또한 능력이다.

 

탱크를 부수고건물을 녹이는 것들조차 정치인의 펜에 휘둘린다.

즈쉬엔은 그것을 알았기에 권력을 신봉했다.

 

머저리 같은 놈그녀의 엄포만 없었더라도 목젖을 뜯어 항문에 박아줬을 것이다.”

 

같은 부류라 생각해 안면이라도 틀겸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모욕이었다.

마치 인간이 더러운 해충을 내려보는 시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부르르 떠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찡그린 표정으로 어깨를 털어내며 사라졌다.

 

다를 것도 없는 주제에 깨끗하고 고귀한 척하는 년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중화인민의 저력을 보여주겠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년이 머리를 조아리며 파리처럼 비는 꼬라지를 보는 유흥은 달콤하리라.

 

즈쉬엔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를 기다렸다.]

 

저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원작에선 바알의 제자 따윈 없었다.

 

그로 인해 뒷배경자본권력능력 그 어떤 것도 없던 초반의 정설아를 먹잇감으로 삼은 것이다.

능력은 하찮아도 그런 점에선 탁월했던 즈쉬엔은 귀신같이 그녀를 찾아냈다.

 

하지만 원작과는 다르게 그가 증오하는 바알의 제자가 등장했다.

 

게다가 반 배정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떨이고배경 하나 없는 고아에다가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일 생도 정설아의 옆에 앉은 걸 보아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했겠지.

 

염병내가 즈쉬엔이어도 날 부르겠다.’

 

절 먹어주세요 라며 목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니 말이다.

 

내가 잔뜩 굳은 얼굴로 그의 옆에 서자 근질거렸을 입을 열었다.

배우처럼 과장된 목소리다.

 

자아잘 봐라 생도들내 마나 연성법의 위대함을 몸소 느끼게 해주겠다.”

 

즈쉬엔이 한 대 치고 싶은 면상을 연신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는다.

수준의 우위에 선 각성자는 대강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으니 백 퍼센트 안전한 먹이라고 봤겠지.

 

이건 내 마나 연성법으로 만들어낸 마력구다조화와 균형이 완벽한 게 보이나마력이 세는 부분도 없고 안정력 또한 뛰어나지다만이곳의 난다긴다하는 교관들의 연성법은 어떨까.”

 

마력구를 손에 만들어내고는 공중에 띄운다.

생도들의 감탄사가 미약하게 터져 나온다.

 

기초 중의 기초라 불리는 마력구지만 공중에 띄워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마력구가 덧셈이라면영창 된 마법진에서 벗어나 유지하는 것은 수열의 합 정도.

이과충인 나기에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게 이 암울한 소설에 예체능도 아니고 이과를 보내래.

다시 생각해도 작가를 향한 증오가 들끓지만 고이 접어두었다.

 

어디한 번 만들어보겠나?”

 

즈쉬엔은 비열한 조소를 날렸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죄송하겠다며 우선 상황을 벗어나려 하자 즈쉬엔이 갑작스레 손을 뻗었다.

웅성거리던 소란이 젖어 들고 생도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주목맞아아는 것처럼 마력구를 배열을 유지하며 투사하는 건 1학년 생도 수준에선 몹시 어렵지내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그러니 이 생도에 관해 설명해주고 싶은 게 있다괜찮겠나생도?”

문제없습니다.”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예상이 되지 않으나 시간을 벌 목적으로 허락했다.

저놈의 손목을 보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올랐기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에 잠긴 날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입꼬리가 찢어지려 한다.

 

자네들은 바알 교관을 알고 있나그래그래음침하며 깐깐한 척하고 다니는 교관이지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겠으나 자랑스러운 방패의 교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너희 생도들을 벌레 보듯 대한다.”

저 교관 미친 거 아냐저래도 되는 거야?”

그래도 이상하긴 하잖아솔직히 얼굴 곱상하고가슴 끝내주는 거 말고 뭐 하는 거 본 적 있냐교장이 레즈라 섹파란 얘기도 있음.”

 

적나라한 모욕에 생도들이 술렁인다.

방패의 교관이 교관을 대놓고 헐뜯은 상황.

아무리 바알이란 교관의 행적이 의아하더라도 큰 문제가 될 게 뻔했다.

 

대부분은 얼굴을 찌푸리고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아해하고몇몇은 낄낄거리며 즈쉬엔의 말에 동조한다.

옆에 있는 생도들의 경멸 어린 표정에 깨갱거리긴 했지만저것들은 선을 넘었다.

 

니들 얼굴 다 외웠다.’

 

일단 조지는 건 다음으로 미뤄두고.

바알과 그녀의 제자를 동시에 물 먹일 생각에 잔뜩 흥분한 즈쉬엔이 말을 이어간다.

 

신출귀몰한 바알 교관의 제자가 바로 이생도다매일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제 할 일만 하는 교관이 제자를 들였다라

 

즈쉬엔이 희극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날 둘러싸고 빙빙 돌았다.

저 때려죽이고 싶은 표정은 유지한 채로 히죽거린다.

당연하게도 생도들의 궁금증은 온전히 나를 향했다.

 

이런 합죽이한테도 모욕받는 정체불명의 교관.

방패 최초로 반 배정조차 받지 못했던 생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겠지.

나로는 억울할 따름이다.

 

대체 얼마나 뛰어난 특성과 능력을 지녔기에 그녀가 이 생도를 선택했을까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교관 자리를 차지할 만큼 대단할 그녀의 제자이니만큼 분명 자네들에게 대단한 것을 보여주지 않겠나?”

 

무조건 실패하리란 예상으로 짜인 덫.

지독하리만큼 치밀하게 만들어진 판이 나 하나만을 목적으로 움직인다.

 

내가 실패하여 나 자신만의 비웃음으로 끝난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내가 실패한다면 하이에나들은 이를 빌미로 바알을 물어뜯을 것이다.

교관의 자격이 있는가비리청탁 의혹부터 사방에서 그녀를 괴롭히리라.

 

바알의 성격을 생각하면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그러나 나로 인해 그녀가 이딴 것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죽어도 싫다.

 

아차생도의 이름을 묻지 않았군이름과 계열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로아 헬링턴. 1학년버퍼 계열입니다.”

 

내가 버퍼란 말을 듣고 다시금 술렁이는 생도들.

아무리 그녀의 정보가 없다곤 해도 저주술사란건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버퍼와 저주는 물과 기름처럼 상극.

당연한 반응이다.

 

맙소사얼마나 뛰어나길래 버퍼가 저주술사의 제자가 될까크하하신기하다신기해분명 마력구 투사 따위는 밥 먹듯이 할 테지자아그럼 자네의 시범을 보여주겠나?”

 

마지막으로 숨을 골랐다.

그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내가 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바꿔 말하면내 생각대로 움직인다면 그에게 큰 엿을 먹일 수 있다.

 

제 마력구를 교관님의 마력구와 비교한다면 생도들이 분명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마력구를 투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 물론이지아주 당돌한 생도군하하!”

 

그가 마법을 영창하자 손에는 다시금 마력구가 떠올랐다.

아까와 완벽히 똑같은 모습의 마력구로 확실해졌다.

 

이 새낀 좆 됐다고.

 

품에서 바알이 선물했던 수정체를 꺼낸다.

점액이 사라지자 영롱한 초록의 수정처럼 빛났다.

 

수정체를 손에 쥐고 마법을 영창하는척 중얼거린다.

이렇게 쓸 줄은 몰랐으나 훌륭한 눈속임이 되어줄 것이다.

 

아티펙트라 생각했는지 즈쉬엔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나 다시금 돌아갔다.

고작해야 아티펙트 하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본인이 더 잘 알기 때문일까.

 

버프 효율을 200%로 뻥튀기해주는 스킬 [신의 사도]

대상의 기분을 건드릴 수 있는 스킬 [일렁이는 감정선]

 

일렁이는 감정선에 나와 있는 대로 간파될 위험이 있으나 이곳은 기초반.

만약 알아차린다면 정설아뿐이지만 그녀가 말하고 다니는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신의 사도를 사용하고 일렁이는 감정선을 생도 모두에게 전개한다.

혹시 내 수작질을 읽을 수 있을 즈쉬엔에겐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시전했다.

 

[일렁이는 감정선]

 

-감정 버프

어지러움 Lv. 1

혼란스러움 Lv. 1

 

(대상은 시전 사실을 알 수 없음.)

 

몸에서 방대한 마력이 빠져나가는 순간 머리가 터질 것처럼 고통스럽다.

수백 개의 바늘로 뇌를 마구 헤집어놓는 듯한 감각이다.

 

눈의 혈관들이 모조리 터졌는지 시야가 지옥처럼 새빨개진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길어야 10초 안에 내 마력이 동날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움직였다.

 

다리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척하며 바닥을 살핀다.

비틀거리길 잠시유난히도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했다.

 

유레카다씹새꺄.’

 

옥빛 수정체를 공중으로 던지면서 튀어나온 부분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기계장치가 고장 나는 소리와 동시에 즈쉬엔의 손에 떠 있던 마력구가 사라진다.

 

즈쉬엔이 오른 손목을 감싸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죽일 듯이 날 노려보며 삿대질을 하지만 고막이 터졌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떨어지는 수정체를 받아 쥐었다.

내 손 위에서 옥빛의 마력구가 강렬하게 회전한다.

 

이계종의 일부를 매개로 상대의 주문을 탈취하는 특성입니다.”

 

쓰러질 것 같지만 당당하게 서서 즈쉬엔과 눈을 마주친다.

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한 고생이 보답받는 듯하다.

 

사실은 마력구가 아닌 홀로그램이지만.

 

즈쉬엔은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부들부들 떨며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관리하는 것뿐이다.

 

[이름 류 즈쉬엔] [나이 : 37]

 

[마력 : 4]

 

아까 나오며 떠오른 단말기 창.

 

마력 4로는 마력구 투사는 둘째치고 마력구조차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서 손쉽게도 만들어냈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얀아강의 설정.

 

홀로그램 투사기와 마력차단장.

 

손목에 맨 단말기와 바닥에 설치해놨을 홀로그램 투사기로 마력구를 만들어내고마력차단장으로 생도들 사이를 갈라 의아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설 밖에서 온 빙의자 따위만 아니었더라도 완벽하게 흘러갔을 계획이다.

정설아조차 의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지금 수준에선 최고품 차단장까지 준비했는데 어쩌나.

 

강의 내용은 당국이 각성자들을 갈아 만든 결과물을 대충 외워서 하려 했겠지.

첫날부터 생도 하나 짓밟아놓으면 강의 내용이 이상하더라도 감히 대들 생각은 못 하니 말이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좋다.”

 

나는 그가 안배해놓은 것을 살짝 이용했을뿐이다.

 

이 모든 게 사기라며 붙잡을 수도 없다.

그렇게 된다면 범행을 자백하는 꼴이 된다.

 

날 어떻게든 조지고 싶다면 같이 자폭할 수도 있으나 아직은 많은 대가로 힘들게 얻은 교관직이 더 아쉬운 모양이다.

 

서로 암묵적인 거래를 마치고 즈쉬엔은 아까의 빈정거리는 말투 따위가 아닌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힘들게 걷는 나에게 생도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부담스러움을 느낄 힘도 없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정설아의 옆에 털썩 앉자놀란 토끼처럼 눈만 깜빡인다.

 

그녀의 눈에는 내가 온전한 마력구를 투사한 것으로 보였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다행스럽게도 버프를 간파해내진 못한 모양이다.

 

대단해요!’

고마워요.”

 

그녀가 화들짝 놀라더니 책상에 다리를 박았다.

끄앙거리며 빨개진 다리를 매만진다.

 

주변의 생각들이 조금씩 읽혀 머릿속에 때려 박힌다.

놀람감탄궁금증혼란경외 따위의 것들이다.

 

왜 제멋대로 읽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준을 벗어난 전개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자 이해가 되었다.

 

끝난다면 저 좀 깨워주시겠습니까.”

잠시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신에 밀려오는 탈력감으로 정신을 잃었다.

 

흐끅… 제가 한 게 아닌데요… 히끅.”

시끄럽다손을 내리는 순간 영원히 두 다리로만 살게 해주지병아리에게 듣고 풀어주마.”

 

깨어났을 땐 무릎 꿇고 손을 든채로 엉엉 우는 정설아와 내 손을 잡은 뚱한 표정의 바알이 보였다

 

 

 

6

 

 

 

바알이 회복을 걸어줬는지 몸은 괜찮은 편이었다.

터진 핏줄도 어느 정도 돌아왔고 온몸을 짓누르던 탈력감 또한 훨씬 덜해졌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며 적응하려 노력했다.

섬광탄 맞은 것 같던 처음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는 적응되었다.

 

살며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일자로 쭉 뻗은 정설아의 팔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린다.

바알은 왼손으로 내 손을 잡고오른손은 머리를 빙빙 꼬며 정설아를 노려보고 있다.

 

원작에서 둘의 사이를 아는 내게 지금은 꽤 웃긴 상황이다.

 

그와는 별개로 저러다 근육통으로 일어나지도 못 할 것 같았다.

파스 살 돈도 없어 끙끙거릴 그녀를 생각하니 어서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설아 완전 개복치란 말이야.'

 

나중에 운동을 억지로 시키면 모를까 지금은 계단도 헥헥거리며 올라가는 체력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교관님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잘 잤나병아리."

 

바알이 화들짝 놀라 급히 손을 떼어냈다.

 

'엄청 놀라네.'

 

내가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나.

맥 짚으려고 잡았다는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알아서 속아줄 건데.

 

근데 팔이 너무 아프다.

뭔가 감각도 사라진 것 같다.

 

마력 탈진 증상에서 근육통도 있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둘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울먹거리던 정설아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바알은 그녀 답지 않게 입을 떡 벌리고 날 바라보았다.

 

나까지 불안하게 왜들 저러지.

 

"왜 그래요?"

"오빠팔이으읍!"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덜덜 떨며 정설아가 내 몸을 가르키려 하자바알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발버둥 치는 정설아를 마력으로 감싸고는 오른손으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가로등 없는 밤하늘처럼 어두운 마력이 모여서 까마귀 모양을 만들어낸다.

대체 뭐길래 저러는지 고갤 돌려 팔을 보았다.

 

바알이 내 고개를 돌리려 손을 뻗지만 내가 더 빨랐다.

정설아는 체념한 듯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

"보면 안 된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는지 팔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

시발 왜 내가 조립 로봇이 된 거지?

 

"바알설마 마력으로"

 

그와 동시에 까마귀가 내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수면제를 먹은 느낌이다.

몸에 힘이 빠지고 사고가 느려진다.

 

바알을 흔들며 어떡하냐며 엉엉 우는 정설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바알.

 

이 둘을 끝으로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

 

바다에 표류하는 나뭇배처럼 정신이 아득하다.

 

분명 바알이 내게 뭔가 했던 거 같은데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 지우개로 뭉갠 것처럼 선명하지 않은 간헐적인 기억만이 남아있다.

 

내가 즈쉬엔을 엿 먹였다.

정설아에게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지금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이 사이에 무언가 있었는데 떠올릴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검은 까마귀.

검은 까마귀?

 

터질 것처럼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포기했다.

나중에 떠오르겠지 뭐.

 

"여긴?"

 

눈을 뜨자 얼굴을 찡그린 정설아와 이상하게도 풀이 죽은 바알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밖을 보니 벌써 해가 져 어둡다.

지금까지 기다려준 건가괜히 가슴이 간지럽다.

 

근데 둘의 표정이 미묘했다.

기쁜 것 같으면서도 불안이 공존하는 기이함.

 

의아해 둘을 바라본다.

바알이 내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정설아가 살짝 노려보자 시무룩하게 입을 다문다.

 

그 사이에 정설아가 방금 깎은 사과를 건네주었다.

체력 2인 개복치가 깎아준 것이라 삐뚤빼뚤 했지만 먹을 만하다.

 

"고마워요근데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그게"

"기절했었다병아리아픈 곳은 없느냐!"

"전체적으론 괜찮지만 팔이 유독 아픕니다."

"그러느냐이리 오거라아니지내가 가마."

 

안절부절 못 하던 바알이 내게 달려와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까마귀 여제가 내 팔을 주물러주는 게 꿈인지현실인지 너무나 황홀하다.

 

'나 설마 죽은 건가?'

 

사실내가 자는 사이에 즈쉬엔이 날 죽여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아했던 바알과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정설아의 모습으로 변장한 거지.

그럼 바알은 천사고뒤에 감시하는 듯한 정설아는 인도자?

 

신빙성 있는 망상에 침음성을 흘리자 바알이 움찔거렸다.

살살 내 눈치를 살피는데 엄마가 아끼는 화분을 깨부순 딸 같았다.

 

정설아의 뚱한 표정을 풀릴 생각을 않았다.

그런 그녀가 손가락으로 톡톡 팔을 두드렸다.

 

저거 분명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하는 정설아만의 습관인데.

내가 기절한 사이에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던 걸까.

 

"설마 둘이 싸웠어요?"

"아니다병아리는 조용히 안마나 받거라!"

"흐응"

"그러니까조용히 안 해도 된다… 에잇그냥 받으란 말이다!"

"끄아악아픕니다!"

 

바알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내 팔을 꾹꾹 주물렀다.

손에 감싸여 있는 건 평소의 검은 마력이 아닌 초록 빛이다.

 

(계열의 저주를 걸어준 걸까.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엔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경감된다.

 

각성자의 신체는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다.

당연하게도 간단한 안마조차 몇 배의 힘을 써야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마력 스탯에 비해 아기자기한 수준의 근력을 가진 바알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땀이 흘러 눈에 고이자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힘드신데 그만하세요충분히 감사합니다."

"안 된다병아리넌 바알의 유일한 제자다제자의 고통을 방관하는 스승은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흐응?"

"흐윽… 자격이… 없단 말이다."

 

정설아가 살짝 추임새를 넣으면 고슴도치처럼 움츠려 드는 바알.

 

원작에서도 백치미 바알을 꼼꼼한 정설아가 누나처럼 데리고 다니긴 했다.

근데 그건 둘이 충분히 친해졌을 때고지금은 분명 처음 만났을 텐데.

 

"생도교관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그만하세요더 하신다면 모욕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아리… "

"…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교관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그만사과드릴게요."

 

정설아가 살짝 웃으며 바알을 향해 고개 숙였다.

바알은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설아의 사과를 받고는 바로 처량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였다.

울음을 참느냐 새빨개진 눈이 고맙다는 듯 반짝인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순수한 바알의 모습이다.

내가 조금만 늦은 시점에 빙의 됐거나바알의 제자라는 우연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보지 못 했을 표정.

 

늦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분명 뿌듯하게 바라보아야 정상이다.

근데 마음 한 구석에서 나쁜 마음이 살짝 튀었다.

 

상처 입은 햄스터 같은 모습에 갑자기 가학성이 솟아오른다.

뭔가뭔가 잔뜩 괴롭혀줘서 '하디먈라구라며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제야 정설아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백 번 천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해보는 게 빠르다.

 

음침한 자아를 밀어 넣을 목적으로 헛기침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크흠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니까."

 

안 우는 척 창문을 바라보는 바알을 못 본 척 해주고 정설아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기절하고도 큰 일은 없었다 한다.

 

즈쉬엔은 혼자 오락가락하다가 수업을 30분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얼굴이 까맣게 죽어있었다고 한다.

 

정설아는 내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자 난감했다.

귀에 속삭여도 보고흔들어도 보고.

30분을 넘게 그랬으나 일어나질 않았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며 위험한 상태였다고 한다.

 

나였다면 다른 생도에게 부탁했겠지만 순혈 아싸인 정설아는 불가능했다.

나를 살려야겠다며 꾹 참고 말을 걸려 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결국 혼자 끙끙거리며 끌다시피 날 운반하다가 바알을 만났다.

 

분명 공방에만 있을 바알이 왜 나왔는지 의아했으나 바알은 말을 빙빙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추궁해보고 싶었으나 지금 건들면 터질 것 같아 넘어가 주었다.

 

하여튼바알은 쓰러진 나를 의무실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그 사이 절대 어떤 일도 없었고 방금 처음으로 눈을 뜬 것이라고 한다.

 

"고생 많으셨습니다고마워요."

"아니에요사실상 제가 한 건 얼마 없는 걸요."

"맞다병아리다른 이들 따윈 믿을 수 없어서 네 스승인 내가 손 끝 하나 다치지 않게 전부"

"흐응"

"전부… 돌보려 했지만 이 생도의 도움도 컸다."

 

또 다시 짓궂게 웃는 정설아.

바알은 아예 무릎에 턱을 괴고 고개를 휙 돌린다.

 

적당히 하라며 말릴 필요는 없어보였다.

아마 정말 싫었다면 바알이 입을 꽤맸든저주를 걸었든 했겠지.

 

바알의 나름의 호의 표시이리라.

증거로 틱틱거리면서 바알의 입꼬리는 살며시 호선을 그리고 있다.

 

역시 원작에서 괜히 친해진 건 아닌 모양이다.

뭐 서로 좋다는데 둘이 사이좋게 지내주면 나도 좋다.

 

그래도 완전 좋은 건 아닌지 입이 삐죽 튀어 나와있다.

정말 제대로 삐진 모양이다.

 

바알은 나중에 뭐라도 챙겨주기로 했다.

 

이계종 시체를 구해주면 눈을 빛내겠지만 돈이 없다.

알사탕이나 사다 줘야지.

 

벌써 즈쉬엔이 보복했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이제 대비책을 짜야했다

 

 

 

7

 

 

 

대비책도 중요했으나 소설 속 즈쉬엔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급한 일은 아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즈쉬엔은 우선 날 재보길 시작할 것이다.

 

소설 내용을 알기에 할 수 있었던 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즈쉬엔에겐 아마 여러 압박으로 다가오겠지.

 

마력차단장이나 홀로그램 투사기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알아차리기 힘든 아티펙트다.

이계종의 광역 주문 방어고위급 정상들의 호위대규모 전장 급에서나 이용되는 차단장을 어떻게 구해왔는진 모르겠다.

 

수완이 좋던 즈쉬엔이니만큼 당국에서 큰맘 먹고 지원해줬을 확률이 높다.

그런 귀한 것들을 내게 바로 간파당했으니 똥줄이 많이 타고 있으리라.

 

물론 바알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알아차리겠지만 바알 급의 마력 소유자가 많은 편도 아니고 초반부에서는 절대 들킬 일이 없을 물건들이란 소리다.

 

물건을 건넨 그의 후원자들에게 정보를 들었다면 그도 알 것이다.

전에 일어났던 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말이다.

 

즈쉬엔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더욱 좁아진다.

 

바알이 미리 언질을 주었다.

마력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알아차렸다.

즈쉬엔에 대한 뒷조사를 미리 마친 상태다.

 

그에겐 셋 중 어느 하나도 가볍게 넘기기 힘들다.

 

첫 번째는 이미 바알이 그의 수작질을 알아차리고 예의주시하고 있단 얘기가 된다.

 

아무리 병신이라도쉬운 상대라 생각했을 바알에 대해 두려움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두 번째는 국가급 각성자가 될 생도에게 첫인상을 개차반으로 심었다는 뜻이 된다.

 

A급만 되어도 국빈 대우를 받는 게 현 실정이다.

1학년 수준 생도가 자신의 모든 계략을 간파해냈다.

병신이 아닌 이상에야 내 성장 가능성을 생각해볼 것이고 당장이라도 사과든제거든 뭐라도 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세 번째는 나보다는 내 뒤에 누가 있을지 알 수 없게 된다.

 

당의 지원을 받는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조사하고 압박할 수 있는 존재가 가벼운 경고를 날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당과 전면적으로 붙을 것을 각오한 단체가 일개 생도를 비호한다.

 

과연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도 큰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즈쉬엔을 끝까지 지켜줄까?

확실하지아니올시다.

 

뭐가 됐든 좋다.

 

그가 사과를 전한다면 적당히 최전선에서 죽어라 구르는 거로 봐줄 의향이 있다.

전투 중 사망으로 각성자 묘지에 묻히게 된다면 그에겐 영광이 아닐까.

 

그가 만약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덤빈다면.

정설아와 바알을 위해서라도 빙의자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

 

병아리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

 

평소의 무뚝뚝함으로 돌아온 바알이 물었다.

아까의 모습은 잊으라는 듯 무섭게 쏘아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11.

정설아는 이미 머리를 까딱거리며 졸고 있다.

 

그냥 즈쉬엔 교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벌레 따위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바알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머리를 꼬는 대신 팔짱 끼며 불만족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표현했다.

 

에베레스트?’

 

지금의 바알은 평소에 입고 다니던 온몸을 가리는 무거운 코트를 벗어두었다.

대신 생도복과 가까운 교관복을 입고 있었다.

 

온몸에 밀착하는 생도복이니 만큼 몸의 윤곽이 잘 드러난다.

품위를 중시하는 교관들은 말해서 무엇할까.

 

바알이 팔짱을 끼자 안 그래도 거대하던 산맥이 더욱 솟아오른다.

왜 등산을 죽어가면서까지 하는지 이해 못 했으나 그들에겐 산이 이런 존재였으리라.

 

평범한 사이즈던 정설아의 옆에 있으니 더욱 두드러진다.

 

… 병아리시선이 꽤 음습하구나그렇게 쓸 눈이라면 내게 연구자료로 바치는 게 어떤가없어서 불편해지는 건 걱정 말거라네 스승은 이계종의 안구로 교체해줄 능력이 있다.”

 

바알이 마력을 일으키자 주변 사물들이 공중으로 솟으며 흔들렸다.

이미 유리 같은 충격에 약한 것들은 박살 나 가루가 되었다.

 

내 침대도 땅에서부터 30cm가 넘게 떠올랐다.

바알의 검은 마력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저거 맞으면 죽는다.

생존본능이 울부짖었다.

 

교관님그게 아니라 드릴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말이나 들어보자꾸나.”

 

바알이 살짝 손짓하자 살며시 내려갔다.

마력이 점점 날 감싸고 돌기 시작한다.

나는 서둘러 주머닐 뒤졌다.

 

제 생도복제 생도복 오른 주머니를 한 번 살펴봐 주세요!”

흐음… 별것 없다면 각오하거라.”

 

바알이 손짓하니 생도복이 벗겨져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손으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바알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교관님에게 드리려고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교관님이 좋아하실까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교관님을 보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좋다이번 한 번만 속아 넘어가 주지.”

 

이틀 전바알의 고문 같은 강의가 끝나고 세계관의 화폐를 확인할 겸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사뒀던 알사탕 봉지였다.

방패는 몇몇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각성자 학교를 졸업한 성인들이다.

 

당연하게도 알사탕을 좋아하는 인원은 거의 없었고 수요가 없는 만큼 구석에 처박혀있는 마지막 알사탕을 운 좋게 사 올 수 있었다.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다행이다.

 

바알이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해서 알사탕을 사지 않는 점이 천운이었다.

아무리 주변의 신경을 안 쓴다 해도 이런 건 좀 그랬나 보다.

 

근데 네 버프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구나내게 보여줄 수 있겠느냐.”

오빠의 특성은 강탈이 아니었나요그러고 보니 버퍼라 하시기도 했네요.”

 

알사탕 두 개를 양 뺨에 넣고 우물거리던 바알의 뒤에는 어느새 정설아가 있었다.

 

바알의 뺨이 점점 새빨개지더니 알사탕 봉지를 내게 집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지만알사탕을 뱉을 생각은 않는다.

 

그럴 거면 왜 던진 건데..’

 

… 내게 이런 것을 먹이다니병아리각오하거라!”

바알 교관님은 알사탕을 좋아하시나 봐요귀여워라.”

 

후후 웃는 정설아.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바알.

 

한숨을 가볍게 쉰 내가 그녀들에게 앞으로 와 앉아달라고 부탁했다.

부들거리며 의자에 앉은 바알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제 버프는 꽤 특이한 것 같습니다.”

 

전에 300명에게 사용할 때와 같은 과부하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일 대상인 만큼 부담이 훨씬 덜 한 것 같다.

한계치까지 끌어내기보단 우선 가볍게 시전했다.

 

감정 버프

편안함 Lv. 3

행복함 LV. 1

 

(대상은 시전 사실을 알 수 있음.)

 

어떻습니까.”

이건

 

내 버프를 받은 바알은 처음엔 가면이 흔들릴 정도로 놀라더니 침묵했다.

바알의 조용한 혼잣말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환각 계열인가… 아니 그보단 더 직접적이야저주대상에게 감정을 강제하는 방식인가그렇다기엔 반발성이 없었다신관의 강신과 비슷한 단기 격발이라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마력 소요가 적군그렇다면

 

[바알은 하나에 꽂히면 해결혹은 실마리를 잡아내기 전까진 며칠이 지나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연구성과와 그녀의 궤를 달리할 성장이 증명한다.

 

원하는 것은 시간이 걸려도 갖는다는 위험한 생각은 그녀를 천천히 잠식해나갔다.

처음엔 그것이 지식과 이계종이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족쇄일 뿐이었다.

 

그녀 특유의 병적인 집착과 호기심이 혼합된]

 

갑자기 떠오르는 창을 휘휘 저어 없앴다.

 

바알은 저대로 놔둬야 할지 억지로라도 깨워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정설아는 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꿈이 군인인 아이가 수많은 병기를 과시하는 열병식에 참여한 것처럼 뜨겁다.

 

오빠저한테도 가능할까요?”

당연하죠근데 언제부터 제가 오빠가 됐습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정설아도 이내 바알처럼 생각에 잠겼다.

얜 또 왜 이래.

 

… 그러게요내가 왜 오빠를 오빠라… 아니지왜 로아 생도님을 오빠라

 

여자 둘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조용히 불러도 듣질 못하는 듯 조용하다.

 

고장 난 인형들처럼 흘러나오는 혼잣말이 귀를 파고든다.

성향이 비슷한 둘을 붙여놓았더니 하는 짓마저 비슷하다.

 

허탈하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TV에선 인류극장이 방영되고 있었다.

 

*

 

먼저 일어난 건 정설아였다.

 

사실 저는 사람에게 말 거는 게 무서워요아니애초에 사람 자체가 무섭다고 할까요.”

 

부끄러운 사실을 밝히는 것처럼 뺨을 긁적인다.

그녀가 대인기피증이 심하다는 건 알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정설아는 쓰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 보던 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부모님이 없어요조금 긴 얘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실까요?”

 

*

 

정설아의 첫 기억은 눈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흰 포대기에 감겨 군부대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정설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막사 안으로 데려왔다.

 

안에선 시체 태우는 빛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은색의 뾰족한 것들을 들고 있다.

 

자신을 안아 든 남자가 무어라 말하자 고개를 돌린다.

남자가 자신의 뺨을 슬프게 매만진다.

 

기억이 끊긴다.

 

살이 뒤룩뒤룩 찐 여자가 정설아를 강하게 밀쳤다.

 

이제 다섯 살 남짓의 정설아는 크게 굴러 팔이 찢어졌다.

팔뚝 전체에 길게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연약한 팔에서 흐른 피가 바닥을 적셔간다.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양의 피가 떨어진다.

 

정설아는 울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살로 덮인 얼굴을 부르르 떤 여자가 손을 뻗더니 정설아의 뺨을 내리친다.

쓰러지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도 버틴다.

 

한 대두 대세 대열 대스무 대.

 

정설아의 눈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고막은 터졌는지 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도 일어나 여자가 있을 것 같은 자리의 앞에서 팔을 든다.

 

정설아의 뒤에선 울음소리가 들린다.

다섯 살인 정설아보다 어린 꼬마들의 울음이다.

전부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는 그들을 암시장에 팔려 한다.

아직 살이 여물지 않은 아이들은 수요가 많다.

그것이 성적이건무엇이건.

 

그렇기에 정설아는 버텼다.

고통받는 건 자신으로 충분하다.

 

영원히 번창하리라 믿은 인류는 무너졌다.

식량난핵 따위의 하찮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계종에 의해서였다.

 

인간 영토의 3, 10억의 인류만이 남았다.

인간의 고귀함 따위는 생존 앞에서 무가치하다.

 

인간의 선악은 간단하다.

직면한 상황이 바뀐다면 선악의 기준 또한 그에 맞춰진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상대를 죽인다.

이것이 선이다.

 

같잖은 동정죄책감 따위로 망설여 그르친다.

그것이 악이다.

 

세상은 잔혹하다.

약자에게 베풀 동정 따윈 없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거리의 시체에서 장기를 파낸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은 지금이지만고기로는 쓸만하다.

인육의 수요 또한 대폭 증가했다.

 

누구 하나 식인종이라며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떨어진 살점을 갈취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상식이며당연한 생존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도덕은 고리타분한 책상놀음이 되어간다.

 

살기 위해 어제 친구의 등에 돌을 내려찍는다.

살기 위해 키워준 부모를 죽인다.

살기 위해… 모든 것은 살기 위해

 

그것이 약자들의 생존이다.

 

기억이 끊긴다.

 

자라난 정설아는 손에 쥔 총을 까닥거렸다.

그녀의 앞에는 부랑자로 보이는 남자가 배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간다.

 

그가 그녀를 향해 휘두르던 벽돌은 바닥에 떨어졌다.

 

정설아는 칼을 들었다.

 

미안해요미안해요.

 

눈을 꾹 감은 채로 그의 목에 뾰족한 칼을 눌러 박는다.

생명이 날붙이에 너무나도 간단하게 식어간다.

 

그녀는 시체를 어디에 팔아야 식량을 많이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이중성에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나오려는 구역질을 재차 삼킨다.

귀중한 영양소를 뱉어 허비할 순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비를 맞았다.

그녀의 눈물이 빗방울에 씻겨 나간다.

 

기억이 끊긴다.

 

검게 타버린 남자 셋의 시체엔 잔불이 남아있다.

그녀는 벅찬 숨을 쉬려 노력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이 셋은 갱단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

 

발버둥 치던 중 자신의 손에서 무언가 날아갔다.

그것은 그들을 태웠다.

살려달라는 소리가 젖어 들 때까지 지독하게 태웠다.

 

그때 머릿속에 특성 개화라는 소리가 울렸다.

 

[옭아매는 침식(H)]

상대의 영혼을 흡수하여

 

확인할 틈도 없었다.

정설아는 익은 고기 냄새를 퍼트리는 그들에게서 벗어나려 바닥을 기었다.

 

산채로 불타 절규하던 그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남아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움직일 수 없다.

이미 숨이 꺼진 시체들이 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시체에서 나온 세 빛덩어리가 그녀의 심장 속으로 파고든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환한 손전등이 정설아의 눈앞에서 비친다.

군인들과 특이한 복장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갱단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을 때도 코빼기도 안 비추던 군인들이다.

그들의 이례적인 등장에 슬럼가는 조용하다.

 

저항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불은 바로 사라졌고총알이 박혀 들어갔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목을 다리로 짓눌리고 팔다리엔 수갑이 채워진다.

 

마력각성학교방패교육

 

생소한 단어들이 정설아의 귀에 들린다.

 

당연하게도 그들 누구 하나 자신의 앞에서 재가 된 부랑자 셋을 신경 쓰지 않는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이게 내가 살아갈 세상이구나.

 

정설아는 평소처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고 붉은 하늘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서글프게도 조용히.

 

*

 

… 헤헤너무 제 이야기만 했나요.”

아니괜찮아.”

 

딱히 특이할 점 없는 얘기였다.

그녀는 각성했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여기 아얀강에선 말이다.

 

미친 암울충 작가 새끼

 

다시금 원작의 암울함을 되새긴다.

생환율 10%가 수치에 그친 것이 아니란 걸 자각했다.

 

내가 바꿔야 할 세계다.

적어도 외면해선 안 된다.

 

교관님은… 언제 나가셨데.”

아까 네가 말하는 걸 듣다 나가셨어이거라도 먹으라고 주셨다.”

 

바알이 조용히 건넨 알사탕을 까서 그녀의 입에 넣어줬다.

살짝 놀라던 그녀는 푹 고개를 숙였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즈쉬엔 교관님이 처음 찍은 건 오빠가 아닌 저란 걸요그런데 즈쉬엔 교관님이 제가 아닌 오빠를 불렀을 때저도 모르게 안심했어요제가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요.”

?”

 

처음 듣는 사실에 그녀를 바라봤지만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즈쉬엔이 정설아를 먼저 노렸다고?

 

처음 봤을 때 왠진 모르지만오빠가 절 생각하고 있단 걸 알아차렸어요이래보여도 부랑자 출신이라 사람 생각 읽는 건 조금 자신 있거든요오빠의 시선에서 보인 애틋함과 안쓰러움 같은 처음 겪는 감정이요그게 무서웠어요제게 경멸이나 모멸이 아닌 따듯한 감정을 내비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정설아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꽉 쥔 손에 손톱이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저는 그런 오빠를 배신했어요제가 먼저 오빠 대신 지원하겠다 했으면 오빠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었어요.”

정설아 생도잠깐만진정해 봐.”

 

천천히 고개를 든 정설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옆에 바알이 남기고 간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물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오빠가 이겨내 주어서 다행이었지만아니었다면제게 처음으로 따듯한 손을 내밀어준 사람을… 제가… 제가.”

제발정설아 생도난 괜찮아.”

아니에요… 제가… 다 나 때문에… 저주받은 특성 따위나 가진 주제에 오빠를… 그러면서 모르는 척 웃기나 하고 역겨워더러워쓰레기 같은 년부랑자 따위가

 

위태로운 감정사의 효과라기엔 그녀에게 버프를 한 번 밖에 시전한 적이 없다.

이건 오로지 정설아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바알과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더욱 죄책감이 일어난 건가.

애초에 웃고 있던 모습은 전부 연기였나.

 

아니애초에 초반의 정설아가 이렇게 무너져있었나.

 

자신을 믿어준 사람을 배신했다는 게 그녀를 괴롭히는 듯하다.

배신이라 불릴 건덕지도 없지만지금은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 보였다.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최대한의 마력을 끌어 시전했다.

 

감정 버프

편안함 Lv. 7

안정 Lv. 3

 

(대상은 시전 사실을 알 수 있음.)

 

… 따듯해요미안해요조금 흥분했다저 많이 보기 싫었나요?”

전혀정설아 생도이제 조금 괜찮아?”

괜찮으시다면… 설아라고 불러주세요싫어요무서워

그래설아설아야.”

고마워요저 잠시 눈 좀 붙일게요헤헤… 졸리다.”

 

[위태로운 인형사(H)]

대상 – 정설아 – 의 결핍 중 – 애정 을 충족시켰습니다.

대상의 당신을 향한 의존도가 1단계로 상승

 

좆 까.”

 

평소라면 좋아했을 창이지만 지금은 불쾌했다.

마치 눈앞의 소녀가 그저 텍스트 더미에 불과하다는 듯.

내 품에 안겨 잠든 설아는 분명 인간이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창을 보지도 않고 껐다.

 

오늘따라 깊은 밤이 원망스럽다.

 

 

결국 설아는 내 숙소에서 재웠다.

남자 생도의 방에서 재워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버리고 오는 것보단 나았다.

 

설아는 폐를 끼쳤다며 끙끙거릴 게 뻔했기에 아침 일찍 나왔다.

그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 이게 맞겠지.

 

단말기를 켜 시간을 확인하니 7.

숙소에 4시쯤 도착했으니 눈만 잠깐 붙였다 뜬 수준이다.

 

근력 9, 체력 8

일반인에 비교하면 초인에 비슷한 각성자이기에 이 정도로는 거뜬했다.

 

던전힐 1미리 하나만 주세요.”

“20칩이요.”

 

방패엔 당연하게도 여러 민간 기업이 들어와 있다.

온전한 민간이라기엔 어폐가 있으나 정부 주도 기업은 아니니까.

 

아얀강의 작가도 이런 세세한 설정까진 귀찮았는지 많이 누그러트렸다.

설정집도 아니고 궁금해할 사람은 적으니 이해는 간다.

 

그래서 지구에서 피우던 담배는 이름만 살짝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아니었다면 판매원한테 추천받을 생각이었다.

 

라이터를 깜빡했네.”

 

공원 벤치에 앉아 일찍부터 움직이는 생도들을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최전방에선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이들도 4년 뒤에는 그곳으로 향한다.

이제야 입학식에서 보여줬던 그들의 결의가 조금이나마 와닿는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여기서 혼자 궁상맞게 뭐하나 병아리.”

교관님여긴 어떻게.”

 

바알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떠오르는 해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한 점의 그림 같았다.

 

병아리 아니랄까 봐 멍청하긴물어라.”

하하감사합니다.”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을 봤는지 피식 웃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무니 바알이 검은 마력을 일으켜 불을 붙여줬다.

 

각성자 담배를 사지 않았군그걸로 만족하나?”

충분합니다.”

 

연기가 퍼져나간다.

담배가 타들어 갈수록 복잡했던 머리도 풀리는 기분이다.

 

바닥에 꽁초가 쌓여간다.

바알이 날 조용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품에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가를 물었다.

 

잘 돌려보냈나.”

.”

 

담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독한 연기다.

바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조용히 들이마셨다.

 

게이트가 열린 지 수십 년이 지났다누구나 각자의 삶을 갖고 살아가지그 아이의 삶을 우습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그 정도면 꽤 곱게 자라난 편이야.”

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

고개를 돌려 슬쩍 바라본 바알이 재를 털었다.

 

고아로 적혀있더군나이이름 외엔 모든 것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너에겐 너만의 삶이 있었을 테니 묻지 않으마그러나 명심하거라 병아리과거에 매몰되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저는

 

나는 그런 과거 따윈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이곳에 비교하면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기껏해야 반찬 투정이나 부리며 살았다.

 

내가 과연 이들을 동정할 자격이 있을까.

고작 소설이란 글자로 접해놓고 정말 이해하는 양 위선을 떠는 게 아닐까.

 

한심한 건 안다.

이딴 걸 생각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게 이롭다는 것 또한 안다.

 

그러나 너무 괴롭다.

고작해야 한국에서 살던 일반인에 불과한 나에겐 너무 벅차다.

 

굳게 다짐했던 것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설아가 과거 이야기를 할 때 특성 때문인지빙의자이기 때문인지 그녀의 모든 삶이 영상처럼 내 머리에 때려 박혔다감정감촉생각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었다.

 

살아있는 여성의 배를 칼로 찌르며 성욕을 푸는 남자를 스쳐 지나갈 때의 심정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날 손에서 느껴지던 생명이 꺼져가는 감촉과 절망갱단에 의해 죽었지만 한때 친구였던 이의

 

그만널 믿어라네가 너를 믿지 않는다면 어떡할 건가.”

 

바알이 물고 있던 시가를 내 입에 물렸다.

독한 연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네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어라내가 네 곁에 있어 주겠다내 손을 잡아라병아리 하나쯤은 제대로 키워줄 능력은 있는 스승이다.”

 

어느새 앞에 선 바알이 손을 뻗었다.

역광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약간 작은 체구였던 그녀는 내게 거인과도 같았다.

 

바알은 웃고 있는 듯했다.

 

좋군날 믿어줬으니 나도 모범을 보여줘야겠지천방지축인 병아리를 제대로 절여줘야겠어오늘은 실습이다.”

왜 그렇게 흘러갑니까?”

시끄럽다절대 알사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많이 사드리겠습니다.”

 

바알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8

 

 

 

오늘도 개판인 바알의 공방.

 

사흘 사이 익숙해진 거미가 공중에서 바둥거리고 있다.

 

반갑다고 인사하는데 안 받아줄 건가그렇겐 안 봤는데 꽤 매정하군.”

이젠 궁상 절대 안 떨 테니 그만 놀리십쇼그리고 인사 맞습니까?”

 

내장이 죄다 꺼내져서 거미의 배는 비어있다.

내장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발작하니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실제로 게이트가 열리고 공포영화는 수요가 없다시피 해 망했다던데 이유를 알겠다.

이런 게 일상인데 돈 주고 볼 필요가 없겠지.

 

배 정중앙에는 바알의 마력구로 보이는 것이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게 거미의 생명을 지탱하는 듯하다.

첫 만남 당시 무섭게만 보이던 겹눈은 이젠 처량하게 보였다.

 

거미가 제발 죽여달라고 제게 말을 건넵니다.”

이런나쁜 이계종이 병아리를 놀리는군무시해도 좋다.”

 

공방에 책상은 2인용 하나다.

당연하게도 온갖 이계종을 해부수술한 테이블들은 예외다.

 

딸의 꼴을 보다 못한 린이 갖다 놓았단다.

당시엔 자리도 없는 데 필요 없다고 툴툴거렸다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온갖 점액과 피로 가득한 바닥에 앉아서 수업 들을 뻔했잖아.’

 

아무리 바알이라도 그건 사양이다.

 

책상은 과외하는 것처럼 나와 바알이 마주 보게 되어있다.

어제 죽을뻔한 일을 되새기며 아래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붙잡았다.

 

까미야나와 보아라.”

 

바알이 간단한 수인을 맺자 공중에서 까미가 나타났다.

여전히 늠름한 모습이다.

 

실습이라 했지만오늘은 네 버프에 대해 조금 알아볼 생각이다꽤 흥미로웠단다.”

역시 그렇습니까.”

 

(H)가 붙은 특성은 정설아가 가진 특성뿐이다.

생명체 영혼 흡수라는 괴랄한 특성 말이다.

 

대상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이 특성 또한 평범하진 않을 것이다.

 

아얀강을 수십 번이나 읽은 나도 사기라고 느꼈던 특성인데 역시 바알도 같은 생각이었다.

간파당할 수 있다는 것과 대상을 망가트린다는 꺼림칙한 경고를 제외하면 그냥 사기다.

 

환각을 일으키는 이계종은 은근 흔하다.

마력 하나 없는 일반인이라면 모르겠으나 각성자는 마력을 일으켜 벗어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버퍼의 버프를 마력으로 풀었다는 묘사는 본 적이 없다.

강제할 수 있단 뜻이다.

 

이계종의 환각은 보스급이어도 길어야 하루다.

내 특성은 마력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아마 무제한일 것이다.

 

아직도 정설아에게 걸었던 버프가 유지되는 걸 보아하니 확실하다.

 

[위태로운 인형사]

[일렁이는 감정선]

대상 – 정설아 – 유지 중

 

그래빙의자 특선으로 이 정돈 줘야지.

 

단기와 장기의 차이다.

 

쓰고 싶진 않으나 우울슬픔자학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켜 지속한다면?

 

인간은 감정 앞에서 나약하다.

 

건강한 몸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들 듯이무너진 정신으론 아무리 강인한 몸이라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아마 내가 더 성장하여 간파당하지 않는단 조건이 붙어야 하겠지만 이것만 보면 암살자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사기(士氣)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용기인내 같은 버프를 대규모로 준다면?

바이킹이 독버섯을 이용해서 광전사처럼 싸웠던 것처럼 부작용 없는 전투자극제다.

 

안정감따듯함 같은 버프 또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정설아도 단번에 진정됐으니 효과는 확실했다.

 

단순 강화 버프도 가능하다.

마력 증폭체력 강화 같은 버프는 간결하지만 큰 전력이다.

 

성장형 특성인 만큼 앞으로 어떻게 발전될지 몰랐다.

바알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어느 정도 예상한 것 같다.

 

까미에게 버프를 걸어보거라.”

 

눈을 감고 버프를 시전했다.

그러나 벽에 막힌 것처럼 영창 단계에서 끊어졌다.

 

안 걸립니다뭔가 벽에 막힌 듯한 느낌이 듭니다.”

역시 그렇군그렇다면 저 이계종에게 걸어보거라.”

 

거미 또한 다를 것 없었다.

말하자 바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버프들처럼 인간에게만 통하는 것 같구나애초에 이계종에게 감정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그럼 마지막으로 내게 걸어보거라.”

 

감정 버프

편안함 Lv.1

안정 Lv.1

 

(대상은 시전 사실을 알 수 있음.)

 

놀라워확실히 저주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오늘은 이것저것 실험해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

 

바알의 수업은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마력 기초는 일주일에 한 번인데 이미 끝냈고전술 기초는 아마 다다음주부터 시작이었나아직 많이 남았다.

 

바알은 오늘 만든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하고 싶은지 축객령을 내렸다.

나도 슬슬 지쳐가던 때였기에 내일 뵙겠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이제 슬슬 던전도 돌아야 하는데.”

 

게이트와는 비슷하게 다른 존재가 던전이다.

 

화기가 통하지 않는단 점은 똑같으나 게이트에서 나오는 이계종에 비해 수준이 낮다.

동 랭크라도 게이트의 이계종과 던전에서 나온 이계종 사이엔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래서 던전의 이계종은 몬스터라 불린다.

방치하면 위험하기에 주로 소속이 없는 각성자들의 돈벌이나 생도 훈련에 쓰인다.

 

아카데미 헌터물이었던 아얀강이기에 다른 헌터물과 대략적인 설정은 똑같다.

 

던전만의 보상이 나온다거나던전이 닫히면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거나.

 

내가 아는 초반에 얻을 수 있는 아티펙트나 보상 대부분은 던전에 있기도 하다.

원래라면 주인공이 얻어갈 것이지만 이젠 내가 먹어야지 별수 있나.

 

문제라면 내가 버퍼란 것이다주인공은 검사였기에 혼자 돌고 다녔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대상의 능력치와 스킬을 일부 빌려온다는 스킬이 떠올랐다.

[은밀한 엿보기]였나이참에 확인해보니 정설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름 바알과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고작 3일밖에 지나지 않았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바알이 날 대할 때 분명 진심이었으니 말이다.

 

딜러 하나탱커 하나힐러 하나버퍼는 내가 있고.’

 

기본적인 4인 공대의 짜임이다.

물론 커진다면 함정이나 길을 읽을 암살자 같은 특수 계열이 필요하나 아직은 아니다.

 

탱커와 힐러가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지금은 어디서 구할 수도 없다.

그러니 적어도 딜러는 필수다.

 

내가 설아의 능력을 빌려온다곤 해도 지금 설아의 10%로는 큰 힘을 내지 못한다.

 

단말기를 들어보니 언제 찍었는지 설아의 번호가 있었다.

설아는 수신음이 나오기도 전에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아야제대로 받았어?”

여보세요?”

네에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설아.

어제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힘이 없다.

 

조금 어때아직도 힘들어?”

아뇨아뇨괜찮아요근데 무슨 일이에요?”

나랑 던전 갈래?”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아야지금 내 숙소 아니니.

 

깨질 만 한 게 없는데.

설마 컴퓨터 부순 건가.

 

눈물이 흐를 것 같지만 참았다.

 

… 던전이요?”

네가 딜러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 제가 가능할까요마법 한 번 제대로 써본 적 없어요오히려 민폐가 될 것 같은데.”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쉽다.

 

설아의 문제는 마력이나 실력 따위보단 어릴 적 트라우마가 더 크다.

그녀도 모르게 그날의 기억으로 뒤덮여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애초에 바알도 인정한 대마법사에게 실력 운운도 웃기지.

내가 살짝만 도와줘도 그 뒤론 전투기처럼 알아서 날아다닐 것이다.

 

괜찮아난 설아 널 믿어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던전 가자어때?”

아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그래도안 되는데

괜찮다니까한동안 둘이 돌아야 할 것 같으니 쉬운 곳으로만 알아뒀어혹시라도 위험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 … 이요?”

 

또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뭘 자꾸 깨부수는지는 이젠 나도 모르겠다.

 

 

설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많이 흥분한 것 같다.

 

역시 둘은 무리였나.

이때 팀이 없이 떠돌던 히로인을 떠올리며 설아를 안심시키려 했다.

믿을만한 전력의 탱커가 누가 있더라.

 

혹시 둘만 가는 게 무서워그럼 내가 어떻게든 탱커라도 구해볼.”

안 돼요둘이던전 가요열심히 할게요집합 장소 단말기에 넣어주세요!”

 

-

 

잘 된 건가.”

 

생도가 던전을 돌려면 절차상 교관 한 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생도가 사망한다면 모든 책임은 허가한 교관에게 향한다.

 

덕분에 철저한 심사와 교관이 동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중엔 돈 받고 보내준다거나자기들 귀찮아서 허락을 내주지 않는 썩을 것들도 있다.

 

진짜 이게 인류 최후의 방패 취급을 받는 아카데미라니.

아직 윗대가리들이 풀어졌단 의미지.

언제 한 번 뒤집어야겠지만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봐온 바알이라면 당연히 해줄 것이기에 까미를 불렀다.

 

까미야.”

까악!”

 

목에 바알이 새긴 문양을 누르니 까미가 내 머리 위에서 튀어나왔다.

아까 전화하기 전에 써둔 편지를 까미의 입에 물려줬다.

 

내가 과자라도 있으면 주는데 미안해다음엔 꼭 챙겨줄게.”

까아악!”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내 귀를 톡톡 깨문 까미는 편지를 물고 사라졌다.

얼마 안 가서 까미가 바알의 편지를 물고 나타났다.

 

동글동글한 바알의 글씨체지만 급하게 날려썼는지 살짝 틀어져 있다.

글씨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

 

[병아리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까미가 발톱으로 편지를 써 내려간 게 아니라면 제대로 본 것이겠지던전미친 건가 병아리혹시 내가 병아리용 사료가 아닌 인간이 먹는 음식을 잘못 줘서 어디가 아픈 것일지도 모르겠군당장이라도 네게 날아가고 싶지만… 당연하지만걱정 따위는 아니다내 위신이… (4000로다눈앞에 있었다면 딱밤으로 머리통을 깨트려줬을 것이지만 알사탕을 줬으므로 넘어가 주겠다널 믿기에 허가하마던전에서 콱 뒤져버리지만 말아라네 스승은 이런 거로 슬퍼하진 않으나 시체 수습부터 보고서 등 벌써 골머리가 아프군너는 내 첫 번째 병아리라는 것을 꼭 알아두거라너무 오냐오냐해서 문제인가앞으로는 아주 강하게]

 

편지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이걸 10분 만에 쓴 게 대단하다.

 

욕이 반아닌 척하는 걱정이 반이다.

이거 돌아가면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단말기가 반짝였다.

 

[은밀한 엿보기]

정설아 6%, 바알 (격의 차이로 제한 됨) 4%

 

조금 솔직해지면 덧나나.”

 

참 귀여운 스승이다.

 

까미는 바닥에서 벌레를 쪼아먹고 있다.

원래 까마귀가 벌레 먹나.

저거 근데 소환수 아닌가.

 

정설아 : [금방 갈게요!!]

 

설아가 오는데 대충 30분 잡으면 시간이 남는다.

그사이에 준비를 좀 해둬야지.

오늘 갈 던전은 워낙 쉬운 편이라 큰 준비는 필요 없지만 않은 것보단 낫다.

 

벌레를 잡기 직전 내가 잡아들자 파닥거리던 까미는 어깨에 올려주니 얌전해졌다.

지금 보내면 바알이 또 뭘 보낼지 몰라 조금만 데리고 있기로 했다.

 

상점 간 김에 까미 간식이랑 까미 주인 간식 알사탕 가득 사서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