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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경이 미친듯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며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들과 정윤경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정말 한순간의 방심이었다. 아이가 그 멍한 모습 그대로 집안에 머무르고만 있을 거라고 안심했던 것이 실수였다.


 아니, 그건 실수라기보다는 정윤경의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아이가 배신한 것뿐….


 방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고 추적당할 것을 알았는지 휴대폰과 가방마저 집안에 남겨두고 아이는 떠나버렸다.


"........"


 정윤경이 물건들과 옷가지 이부자리가 뒤섞여 엉망이 되어버린 방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하.. 하하…."


 갑자기 헛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정유진이 자신에게서 도망친 것이야 사실 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이가 자기 누나에게서 배신당한 기분을 자신이 고스란히 돌려받는 느낌이었다.


 그때 정윤경의 주머니 속이 위이잉 울렸다.


'임현재'



"......뭐."


[일 다 끝났냐?]


"바빠. 끊어."


[아니, 일 다 끝났냐구.]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급하게 맡길 일 있어. 돈 터는 작업은 다 끝났어?]


"작업 다 끝났는데 어쩌라고, 나보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정윤경이 잠깐 말을 멈췄다.


[.....여보세요?]


"너, 마지막으로 일 하나만 좀 맡기자."


[아니, 맡길 사람은 난데?]


"시끄러워, 내가 더 급해. 지금 거기로 갈게."


[너 또 뭔--]


 전화를 끊어버렸다.


 임현재놈이 갑자기 무슨 용건이었는지는 그녀가 알 바 아니다. 중요한 일이면 거기서 다시 얘기를 꺼내든 할 테니.

 그보다는 아이를 쫓는 게 우선이었다.


 거액의 현금이 담긴 더플백을 거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그녀는 집을 나섰다.

 누군가를 찾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일지 모르나 그건 해결사가 아닌 일반인의 이야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윤경이 빌라 앞에 주차된 차로 달려나가려 투명한 유리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에 보안등으로 조금씩 비춰지는 두 남성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정윤경의 머리 바로 위에 있던 센서등이 켜졌다. 그리고 그 밝은 불빛 아래 보이는 그녀를 보았는지 남자들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




 그 시각.


 정유진은 낯선 집 안 거실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불안한 시선을 남긴 그 아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앉았다.

 강다현이었다.


"한참 찾았잖아. 휴대폰은 들고 오지 그랬어."


"그러면 나 어딨는지 다 들켜버리니까.."


 그 말끝에 강다현의 어머니가 두 아이 앞 탁자에 작은 플라스틱 쟁반을 탁자 위에 얹었다.


"아직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차부터 마시면서 좀 진정하렴."


"네, 감사..합니다…."


 아이 손에 들린 찻잔이 떨리며 찻잔받침에 부딛혀 달그락거렸다.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누가 자신을 지켜볼까 두려운지 자꾸만 시선을 옆으로 흘리며 조금씩 몸을 떨고 있는 정유진에게 강다현이 바람막이 하나를 꺼내와 덮어주었다.


"유진아, 너 너무 떨고 있는데.. 혹시 추워?"


"아, 아니야. 난 괜찮아…."


"정말.. 그 정윤경이라는 사람, 너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강다현이 안쓰러운 듯 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언제 흘렸는지 모를 눈물자국이 아이의 뺨에서 자꾸만 느껴지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여긴 안전해."


 강다현이 파르르 떠는 정유진의 작달막한 몸을 꼭 안았다.




==========




 교외 외딴 곳에 정차한 정윤경의 SUV에서 그녀가 내려 트렁크 문을 열었다.


 트렁크 안에 든 내용물을 그녀가 차 밖으로 꺼냈고 피가 나오는 부위마다 지혈제가 가득 덮인 시체 두 구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차 시동을 끈 정윤경이 손전등을 들어 조용히 시체들을 살폈다.

 처리 업체에 보내기 전에 적어도 누가 보낸 놈들인지는 알아내야 했다.


 역시나 그녀의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건 휴대폰과 지갑이었고 그 외 한 놈에게서 수첩 하나를 발견한 것 정도가 의외의 수확이었다.

 그녀가 쓰던 것과 비슷하게 온갖 정보들이 수두룩하게 적힌 수첩에는 그녀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가득했고 그녀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추적했던 조직의 간부들 이름임을 기억해냈다.


 다른 한 놈도 그 조직원일 듯하여 정윤경은 놈의 휴대폰을 뒤적였으나 연관된 이름이나 흔적은 나오지 않았고 최근 연락한 이름들마저도 그녀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해답은 지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갑 한구석에 욱여들어간 묵은 명함들 중에서 과거 그녀를 죽이려 한기성을 고용한 갈색 정장의 이름이 담긴 명함을 찾아낸 것이다.


 결국은 보복 시도임에 틀림없었다. 서로 속한 조직은 달라도 자신이 모시던 두목이 그녀의 손에 명을 다했다는 게 두 놈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러나 지금의 우연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직 두목을 직접 제거해놓고 흔적을 남겨둘 만큼 정윤경은 서투른 해결사가 아니다. 두 조직원들이 자신들 조직의 우두머리를 누가 죽였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 텐데 하물며 그 둘이 서로 만나서는 그 범인이 동일인이라는 사실까지 간파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은….


"......!"




==========




 더 이상 정윤경의 집에서 살 수가 없어 무턱대고 뛰쳐나오긴 했지만 정유진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너무나 막막했다.


 지금 당장은 정희은에게도, 정윤경에게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강다현의 집에서 무턱대고 얹혀사는 것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언젠가는 자리를 떠야 했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자."


 강다현의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함께 들고 난 뒤 거실에 앉아 고민하는 정유진에게 강다현이 불쑥 말해왔다.


"어차피 지금은 못 쫓아오잖아. 그러니까 지금 경찰서에 가서 정윤경이 그런 나쁜 짓 하는 사람이라고 신고해버리는 거야. 그러면 경찰 아저씨들이 널 지켜줄 거 아냐?"


 아이의 입장에서는 퍽 그럴듯한 이야기다. 어려워할 것 없이 자신이 아는 걸 경찰에 털어놓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러나 정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뭐? 왜 싫다는 거야?"


"...말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뭐가 많아? 그냥 정윤경 저 아줌마가 나 집에 가두고, 사람들 죽이고, 도망치면 죽일거라고 위협했다고만 말하면 끝이잖아!"


"그게 전부가 아니야…"


 하며 아이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움직였다.


 말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아니,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밝혀지게 되어있는 사실은 한둘이 아니었다.

 정윤경과 연관이 있던 그 수많은 범죄 조직들.. 그들이 모조리 얽혀 수사되기 시작하면 그 불똥이 정유진에게도 튈 것은 분명했다. '어떤 놈이 처음 신고했어?'라며 하나둘 뒷조사를 하기 시작하면 분명 아이의 이름이 마지막에 걸려나올 것이고 그 뒷세계의 칼은 아이를 향하게 되어 있다.


 그보다 심각한 건 따로 있다. 경찰이 전후사정을 모두 캐내버린다면 어떤 경로로든 정희은이 저지른 일들까지 밝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부모를 살해한 자식이 어떤 처벌을 받을지는 12살의 정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다 말해버리고 경찰 아저씨들이 조사하면.. 윤경 씨도 우리 누나도 다 감옥에 평생 갇혀있을 거야."


 아직 정희은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친누나가 수갑을 차고 감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는 건 아이로서는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어떡하려고?"


"......."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알아서 해결되는 거 아니잖아."


"나도 알아, 아는데--"


"알면 실천을 해야지!"


 강다현이 답답한지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순하게 당하고만 살 거야? 그렇게 무시당하고 밟히고 살아도 다 좋은 거냐고! 너 정말 이렇게 가만있으면 그 정윤경이 무슨 짓 할지 몰라서 그래?"


"나도 몰라서 가만있는 게 아니란 말야!"


 정유진도 맞서 소리치자 강다현이 놀란 듯 눈빛을 바꾸었다.

 아이가 지금까지 저렇게 소리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자기도 소리친 것이 무안했는지 정유진이 미안한 눈빛을 하더니 다시 조용히 강다현에게 답했다.


"나도 윤경 씨한테 시달리는 거 싫어. 그런데…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잡혀가고 갇히는 건 정말 보고싶지 않아."


"뭐..?"


"내가 그 사람들한테 고통받는 건 몰라도… 그 사람들을 내가 고통받게 만드는 건 싫어."


 그 대답에 강다현이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너 바보야?"


 하고 한탄했다.


"그러면.. 뭐 그래, 진짜 당하고만 사는 게 좋다고 쳐. 그럼 뭐, 앞으로도 계속 정윤경..이랑 너네 누나 피하고 살 거야? 언젠간 결국에 부딪치게 돼 있다고. 이대로 영원히 있는 게 아니잖아."


 어느새 이 사건에서 더 화내고 있는 사람은 정유진이 아니라 강다현이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거는, 네가 고통받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걸 가지고 벌 받는 거야."


"........"


"죄 지은 사람이 벌 받는 건 당연한 거잖아. 아니야?"




=========




[갑자기 공격당했다고?]


"어, 혹시 너한테나 다른 애들한테는 그런 일 없었어?"


[아니, 그런 일 전혀 없었는데. 너한테만 간 거 같아.]


 다행히 연락이 닿은 의뢰인에게서 들은 정보로 정윤경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의 공격이 현금 탈취에 참여한 해결사들 모두에게 보낸 보복도 아니라면 이건 누군가가 두 놈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두 조직과 자신 사이의 연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임현재.'


 ..결국 그런 관계였나.

 뒷세계의 관계란 결국 돈으로 맺고 돈으로 끊기는 가벼운 관계임을 잘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드는 왠지모를 씁쓸함에 정윤경은 착잡한 표정을 했다.


 동기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현금 탈취 작업이 끝나자마자 임현재에게서 연락이 오고 공격이 들어온 것부터 의도가 너무나도 뻔했다.

 아무리 도움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해도 애초에 20억씩이나 되는 엄청난 일을 받았다는 걸 '동업자'에게 알려준 것부터가 그녀의 실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지금은 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아냐. 생각 좀 하느라."


[혹시 따로 알아본 거라도 있어?]


"아니, 그건 됐고, 혹시 코리 아직 연락 돼?"


[걔는 왜?]


"사람 찾을 일이 있어. 급한 일이야."




==========




 밤 10시.


 누군가에게는 아직 무언가를 하기 좋은 시간대일지 모르나 한참 자라는 나이인 정유진과 강다현은 이제 이불을 덮고 잘 시간이었다.


 잠들 시간이 되자 부모가 다른 말도 꺼내기 전에 강다현이 먼저 정유진의 팔을 붙잡고는 자기 방에서 정유진과 같이 자겠다며 고집을 피웠고 그 말에 부모보다도 정유진이 화들짝 놀라며 난색을 표했다.


"잠깐만, 다현아, 우리 벌써 5학년인데--"


"됐고 그냥 따라와. 엄마, 유진이랑 같이 자도 괜찮지?"


"아유, 참 누굴 닮아서 저렇게 당돌할까. 호호…."


 강다현의 부모도 오히려 두 소꿉친구가 꽁냥대는 모습이 보기 흐뭇한지 그저 웃으며 둘을 보내주었고 방에는 이제 강다현과 정유진 둘이 남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 무덤덤한 표정이던 강다현은 문이 닫히자마자 뭔가 들뜬 표정을 했다.


"우리 이러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예전에 너희 누나 멀리 일 나가서 우리 집에 자러 왔던 게 언제였더라? 히히."


 뭐가 그렇게 기쁜지 강다현은 혼자서 침대에 베개도 하나 더 끼워놓고 이불도 펴며 같이 잘 준비에 한창이었으나 정유진은 자기가 가지고 온 얼마 안 되는 짐들만 만지작거리며 정리할 뿐 강다현의 그 들뜬 분위기에 통 맞춰주질 않고 있었다.


 저녁에 강다현과 이야기했던 그 고민을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유진아?"


"나.. 계속 생각해 봤어."


 정유진이 침대 쪽으로 뒤돌아섰다.


"근데… 네 말이 맞아."


"어..?"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잖아.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그래도 밝힐 수 있는 건 다 밝히는 게 맞겠지."


"......."


"누나는 안 하더라도, 윤경 씨는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


 정유진도 이대로 결심하고 있었다.

 차마 가족을 신고할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이대로 정윤경이 한 짓들까지 모두 덮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얼굴빛이 한결 나아진 아이가 강다현에게 다가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정말 고마워. 이렇게나 도와줘서. 네가 안 도와줬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그 말에 강다현이 미소지었고,


".....내가 고맙지."


 하며 정유진을 안아주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거 다 끝나면,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다 끝나면? 뭔데..?"


"그 정윤경 씨가 잡혀가고 네가 안전해지면.. 그때 말해줄게."


 그 말뜻을 모르는 정유진은 그저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강다현과 함께 침대로 들어갔다.


 하나뿐인 이불을 나눠 덮으며 둘의 잠자리는 그렇게 편안해 보였다.


--


 그날 아침.


 자신을 덮은 이불도, 자신 옆에 닿는 촉감도 느껴지지 않은 채 아이는 잠에서 깨었다.


 늦잠을 잔 듯 해가 벌써 창 너머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손을 휘저어 휴대폰을 찾았으나 잡히는 게 없었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몸을 살짝 일으켰다. 벽에 걸린 붉은색 시계가 벌써 시간이 8시임을 알리고 있었다.

 아마 강다현과 부모님은 지금 아침밥을 차려놓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잠깐 졸던 아이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으음…"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 곧바로 보글보글 국 끓이는 소리가 주방 쪽에서 들려온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유진이 좋아하는 미역국이다.


"안녕히 주무셨…ㅇ…."


 주방으로 들어서던 아이의 발이 순간 얼어붙었다.






"아가~! 잘 잤어?"



"..........."



 현실 같지가 않았다.




"우리 유진이, 누나가 일찍 깨워줄까 싶었는데, 오늘은 주말이잖아? 그래서 그냥 더 자게 뒀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앞치마까지 두르고 그녀는 주방에 서 있다.




"그래도 일어났으니까 아침은 먹어야지? 자, 앉아!"




 아이가 뒷걸음질쳤다.


 여기까지 찾아올 리가 없었다.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걸 그녀가 알 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왜 가만히 서 있어? 자, 어서 앉아 봐."



 정윤경이 아직도 멍하게 선 아이의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남의 집에 들어와 남의 식재료로 만들어 남의 그릇에 담은 음식들은 하나같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듯 정갈했고 아이의 자리에는 미역국과 하얀 밥이 담긴 국그릇과 밥그릇이 놓였다.


"자, 밥먹자?"


 그녀의 집에서 그랬듯, 앞치마를 푼 정윤경이 정유진이 앉은 반대편에 앉았다.


 그러나 아이가 수저에 손이 갈 리가 없었다.



".......다현..이.. 어디..있어요..?"


 식탁에 손도 올려놓지 않은 채 아이가 몸을 떨며 간신히 입을 뗐다.


"........."


 정윤경은 잠깐 대답을 않더니,


".....아가, 미역국 좋아하잖아? 어서 먹어, 식으면 국 맛 없어지잖아~"


 하고 아이의 물음을 무시하듯 식사를 재촉했다.

 아이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윤..경..씨, 다현이네.. 가족… 어딨,냐구요…."


".......아, 얼른~ 누, 누나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안 먹을 거야..?"


 순간 그녀의 한쪽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설마.. 다.. 다 죽인..ㄱ…"


 말을 잇지 못하고 정유진이 울먹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흘러갔다.

 공포에 질린 얼굴의 아이는 몸도 굳은 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윤경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가."


"......."


"먹으라고."


"..........."





 정윤경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한순간에 식탁이 손에 채이는 소리가 났다.


 식기들끼리 부딪치는 콰장창 하는 소리가 한꺼번에 겹쳐 울렸고 정윤경이 만든 음식들과 미역국이 바닥에 쏟아졌다.



 순식간에 자리에 일어선 정윤경이 아이를 붙잡고 넘어뜨렸다.

 양 어깨가 그녀의 양손에 꽉 눌리고 있었다.



"아가, 누나한테 왜 그랬어? 왜 거짓말한거야? 누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평생 누나 곁에 있을 거라고 그 순한 눈망울로 약속했잖아. 왜 도망갔어? 왜? 왜? 왜? 왜? 왜? 왜? 우리 유진이 거짓말쟁이였어? 누가 그렇게 가족한테 마구 거짓말해도 된다고 했어? 그 정희은한테 아가 정말 나쁜 것만 배워왔구나? 설마 유진이 그런 아이였어? 아무한테나 사랑 주고서 나중에는 내동댕이쳐버리는 그런 영악한 아이였던 거니? 누나는 너 하나밖에 없는데, 너때문에 행복해하고 너때문에 일을하고 너밖에사랑하는사람이없는데너는길바닥에돌아다니는아무잡년들이나끌어안고사랑받으면그걸로만족하는아이였냐고!!!!"


 쏟아져버린 국그릇들처럼 정윤경이 미친듯이 억눌려있던 말들을 아이에게 쏟아냈다.


 정유진의 시선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죽은 사람의 눈.

 아이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그 살벌한 눈빛이었다.


 두려움이 섞인 무력감이 느껴졌다.

 어젯밤 강다현과 함께 했던 그 알량한 결심은 그저 아이들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착각이었다.



"윽..끅...흐극…"



 아이가 울음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함 같기도, 또 자기 앞에서 죽일 듯한 눈을 한 정윤경에 대한 두려움 같기도 했다.




"잘못..했어요… 히끅,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도망칠게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다른 것은 몰라도 두려운 감정이 아이를 장악해버린 건 분명한 듯했다.


 정유진이 가녀린 양 팔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울먹이며 자비를 구걸했다.




"......."




 그러나 정윤경도,


 이번에는 가만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미안해."


"..용서해줄 수 있는 정도는 이미 훨씬 지났어."




 정윤경이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칼에 이미 피가 묻어 있다.




"우리 아가가 누나를 안 믿으니까, 누나도 우리 유진이 안 믿을 거야."




 주머니를 뒤지던 왼손이 무언가를 들어 아이의 눈앞에 보여졌다.


 알약 하나와 콩알만한 칩 하나. 약은 무엇인지 알 수 없되 칩은 한눈에 봐도 그 용도가 분명해 보이는 전자장치였다.




"자…."




 칼을 대기 전, 그녀가 알약을 들어 아이의 입 안에 강제로 약을 집어넣었다.




"읍..! 으극..!!"




"착한 아이면 누나 말 잘 들어야지? 가만히 있어…."




 정윤경의 칼이 속옷을 뚫고 정유진의 살결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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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진 폭주.


다현이네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겠음. 상상에 맡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