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1편

3-2편

4-1편



2.

결국 일을 하러 가지 못했다.


툭, 툭.


하루쯤 제멋대로 쉰다고 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툭, 툭.


아.

습관처럼 검지로 식탁을 두드리다, 뻐근히 찾아오는 아릿한 고통에 그 행동을 그만두었다.

아침부터 계속 그랬던 탓에, 바라본 검지의 끝은 살짝 부은채 벌게져 있었다.


이유없는 초조함과 불안함을 해소할 수단조차 없어지자, 이제는 휴대폰을 들었다.

관심없는 기사.

관심없는 영상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런 시간만 축내는 것들을 쳐다보다가도, 습관적으로 문자 앱을 켰다.

하지만, 아직 그녀가 원하는 문자는 오지 않았다.


...아직은 못 찾은걸까.

아니, 김실장의 실력은 그 성격만큼이나 확실하다.

분명 오늘 안에는 답을 주겠지.

그렇게 위안하며, 눈을 감았다.

아, 짜증나.


이러고 있는 자신이 문득 한심하게 느껴져서 한숨을 푹 내쉰 희수는, 기분전환이라도 할겸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었다.

무채색의 공간.

마치 그녀의 내면을 투영하듯, 작은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회색의 벽지들로 도배가 되어있는 거실을 빙 둘러보았다.


느끼지 마.

보여주지 마.

아무것도 내주지 마.


어려서 부터 들어왔던 말처럼, 일상에 배어버린 습관처럼.

텅 비어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는 그 거실을 세 번, 네 번 빙빙 돌며 쳐다보았다.

그 것을 바라보는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어 보이는 차갑고 무감정한 얼굴.


밖에서의 그녀 모습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설핏 소름이 돋을 만큼 모든 감정선이 몽창 도려내진 얼굴이었다.

가면을 벗어낸.

밖에서 남들에게 보여줄 가면을 벗어버린, 희수의 얼굴은 늘 그랬다.


감정이 메말라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할 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은 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평야와 같았다.


참으로 불필요한 인간관계, 그들에게 쏟아부어야 할 감정의 낭비.

가면이 보이기에, 자신도 가면을 썼다.

남이 웃고있는 가면을 쓰고 있다면, 자신도 웃는 가면을 뒤집어 썼다.

울고있는 가면, 짜증을 내는 가면, 기뻐하고 있는 가면...

표면적으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 역겹고 추악한 가면들에게 무방비하게 진심을 보이는 것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손해였고, 멍청한 짓이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자선가가 아니며, 봉사자도 아니기에.

그렇기에, 희수는 절대로 남에게 그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우에게도 똑같았는데...


이정우.


오 년간, 계약상의 남편이었던 남자였다.

어차피, 일상적이고 평범한 부부관계는 이미 계약서라는 것을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희미해지고, 어그러진지 오래였다.

그 남자도, 그것을 알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직접 제 손으로 도장까지 찍었다.

그저 화목해 보이는 척, 철저한 쇼윈도 부부로서, 집에서는 기계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그 남자의 역할은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지 않은게 하나 있었지.


계약 첫 날에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지나가자, 희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정우, 그 남자가 그 수두루 빽빽하던 계약사항들 중 유일하게 지키지 못했던 것.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정우라면 그 것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다른 것들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그것 만은 지켜주기를 바랬었다.


'날 사랑하세요, 진심으로...저를 사랑해주세요.'


오 년의 기억. 그 두 번째 날.

도장을 찍고난 그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정우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바뀌어 있었다.

벗은 줄만 알았던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

처음으로 남의 진심을 보았기에, 그렇기에 믿었는데.

자신을 먼저 배신한 것은 정우였다.


"하아."


머리를 어지러뜨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났다.

그것이 정말로 그 남자의 배신이었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나도 괴로워 제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에서의 착각인지는 불분명했다.

어차피, 도장은 찍었고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오 년간 가면을 쓴 남자와, 그 흔한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도 않은채 서로의 시간만 무의미하게 소비했다.


지우자, 지우자, 지우자.


세 번 되뇌며, 모든 생각을 흘려보냈다.

저 너머.

시선을 돌리자 오 년간, 그가 잠을자며 생활하던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은 정우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자마자 각방 선언을 한뒤, 쫓겨난 그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가 이 곳에 있던 시간동안, 단 한 번도 들어가지도 않았고,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그 너머가 궁금해지는 걸까.


"미쳤나봐."


미련인걸까?

그 시간동안 정이라도 생긴걸까?

아니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가 떠나는 날, 그렇게 순순히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만 떠오른다.

자신에게 벗어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벗겨지는 그 가면 속 진심이.

그 이글거리는 눈이,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는 그 폭팔하기 직전의 억눌린 분노가.

그러면서도 무언가 후련한듯, 그 눈빛에 아로새겨진 희망이라는 감정이.

자꾸만 머리에 맴도는 것이었다.


덜컹.


희수가 충동적으로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약간만 비틀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보지 못했던 너머.

어째서인지 가슴은, 나쁜 짓을 하는 어린아이마냥 쿵쿵대고 있었다.


미쳤지, 미쳤어.

지금에서야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지금에서야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보고싶다.

저 너머를, 아직은 남아있을 그의 흔적을.

이제는 떠났음에도, 그 강렬했던 순간의 조각난 파편이라도 쓸어담으려는 희수가 있었다.


끼익...


방청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문이 열리며 소리가 난다.

이내 눈에 들어오는, 그 남자, 이정우가 살던 공간.

무단침입이라도 하는 것처럼, 희수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 그 공간을 쳐다보았다.


의외로 별 것은 없었다.

남자들의 생활은 다 그런 것일까.

벽지는 온 집에 도배해둔 것과 같이 온통 회색 투성이였다.

있는 것이라고는 옷장과 책상, 침대가 끝.

어쩐지 휑하니 느껴지는 그 공간은 오 년의 생활동안 단 한번도 바뀌지 않은 듯 보였다.


침대를 보니 곱게 갠 뒤, 버리기라도 하라는 듯, 포장백에 들어있는 이불과 베개가 보인다.

한 번에 그 흔적을 지울수 있게 해놓은 것 처럼.

옷장을 열어보니, 다른 옷들도 예와 같이 포장되있는 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스윽, 스윽.


옷장의 옷은 얼마 있지도 않았다.

생활하는데 불편하지는 않게, 카드를 주었었지만 그 남자가 그것으로 결재하는 것은 언제나 아침에 먹을 식재와 생활용품 같은 것들 뿐이었다.

몇 켤레의 양말. 목이 늘어난 티셔츠 몇 벌.

같이 나갈 일이 있을때나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입었던 마이너한 브랜드의 양복.

그것이 다였다.


"진짜, 미쳤지."


포장백 비닐 너머, 정우의 양복을 만지던 희수는 문득, 가슴속에서 치솟는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지이익.


어느새 포장백의 지퍼를 열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미쳤다고 되뇌이면서도 희수는, 그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메말랐던 자신의 안.

비록 그것이 무지막지한 분노였을 지라도, 제 안에서 없어진 줄 알았던 정우의 진심을 다시 마주한 희수는, 그것이 사막에서 마주한 오아시스나 다를바가 없었다.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신을 가로막던 비닐을 치우자 까끌한 양복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정우가 입고 있던 옷.

그 얼굴을 생각하며 아주 한참동안 손으로 만지작 거리다, 다시금 충동이 인다.

아주 천천히.

충동에 몸을 맡겨,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 옷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코가 점차 가까워진다.

심장은 쿵쾅댄다.

이상했다.

지금 자신은 이상했다.
그런데도, 멈추지 못했다.

미쳤다.

정말 미쳤다.

이제와서 왜...


띠링, 띠링!


정적을 깨는 소리에, 몸이 굳었다.

그것은 문자가 오는 소리였다.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이, 황급히 양복에게서 얼굴을 떼낸 희수가 휴대폰을 보니, 김실장의 문자가 와있었다.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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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못써서 미안.

눈 감고 떳더니 왜 토요일임?

후딱 담 편 써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