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1편

3-2편

4-1편

4-2편

5편

6편

7-1편

7-2편








1.

'할 말이 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이제 와서? 라는 생각뿐이었다.

떠나는 순간까지,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나타나 머릿속을 헤집는 이유가 뭘까.


정우는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것이라 생각했던 희수의 앞에서 복잡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냥 끝까지 그녀를 미워했으면 나았을 텐데.

괜히 미련하게 굴지말고, 빨리 포기하고 놓아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 집에서 나간 첫 날.

그녀를 지우려고 술의 힘까지 빌려야 했던 그 때가 다시금 정우의 머릿속에서 표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녀도 변하겠지 라며 미련히 붙잡고 있었던 괜한 희망.

그것은 이미 산산히 깨어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억지로 이어붙히려 해왔던 멍청한 자신.

결국 오 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그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에 절망하고, 그것에 후회하며, 거기까지 가서야 포기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를 보자마자 다시금 기대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또한 그런 자신을 끔찍히 역겨워하는 자신 또한 있었다.


정우는 난잡하게 늘어지는 머릿속을 겨우 정리하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녀에게 꺼내는 첫 한마디.

그것은 괜한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그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불퉁스러운 것이었다.


"무슨 말이요?"


"...정우 씨."


"이제 와서 굳이 왜 그러는 건데요? 왜 고작 일주일도 안돼서 찾아오는 건데요? 아 미안해요. 괜히 주변에 얼쩡거리니까 거슬렸나 보죠? 걱정마세요. 이제 진짜 떠날거니까."


정우의 떠난다는 말에 희수의 눈빛이 다시금 기이해졌다.

정우는 얼핏 그것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눈꺼풀을 내렸다 올리는 물리적인 행위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밝아졌다, 어두워진다.

맑아졌다, 탁해진다.

그것은 수명을 점차 다해 가는 전구처럼 희미하면서도, 꺼져가는 잔불이 확 타오르는 것처럼 갑작스레 이채를 띠기도 했다.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이었지만, 얼핏 기계라고 착각할만큼 얼음장같은 얼굴이었지만, 정우는 그러한 그녀의 작은 변화를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니까.

가장 원했던 만큼, 그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떠나지...말아요."


희수는 힘겹게 그 앞에서 입을 열었다.

처음이었다. 우물거리는것도, 얼버무리는 것도.

정우에게 말하는 것이 이렇게나 숨이 턱 막히고, 힘드는 일 일줄은.


언제나 필요에 의해서만 말을 꺼내던 희수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뻐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것은 남을 위해 억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닌, 오롯이 정우를 향한 순수한 자신의 감정.

그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희수는 이 끔찍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처박힌 자신에게 찾아온 단 한줄기의 빛을 본 것처럼 희열에 가득차 있었다.

갑작스럽고 어색하며 낯설었지만, 보고싶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너무나 반갑고, 언제나 바라고 원했던 것을 손에 쥔 것같이 행복했다.


"왜요? 왜 떠나지 말라는건데요? 당신 저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꺼져주겠다잖아요."


정우의 날 선 말에 몸이 절로 움찔거렸지만, 그녀는 억지로 참아냈다.

화를 내고 있어.

어째서인지, 조금 무서워.

그래도...적어도 지금은 나를 보고 있어.

희수의 안은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자.

너무 멀리 돌아왔지만, 아직 괜찮아.

지금이라도.

그 말을.

그 한마디를.

꺼내자.


희수는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우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희...다시...다시...시작...해..."


"...진심이에요?"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정우가 황당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에?"


희수는 그 차가운 즉답에 조금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싫어요. 다시 시작해? 제정신이에요?"


명백한 거절이었다.

정우 또한 그녀의 그런 변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바래왔던 것이고, 또 원하던 것이었다.

이미 정우가 작게나마 가지고 있던 기대를 충분히 채워넣을 만큼 그녀의 이런 변화는 확실히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차라리, 그 날. 그가 지쳐 떠나는 순간 그녀가 붙잡았다면, 정우는 조금이라도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벽을 세운 정우가 더이상 망설이는 일은 없었다.

설령, 정말 그녀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이제 더는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거기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라고? 다시 그 끔찍한 곳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당신 뒷바라지나 평생 하다 썩으라고?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요? 왜 갑자기 붙잡는 건데요? 왜? 정말...정말로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내뱉은거면..."


"저, 정우 씨..."


뭔가 아니라는 생각에, 쏟아지는 그의 말을 틀어막듯 희수가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 그가 꺼낼 말을,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니야.

내가 듣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그런 바램을 무참히 짓밟듯, 어느새 짜게 식어있는 눈으로 희수를 노려보던 정우는 선고하듯 다음 말로 그녀의 안을 내리찍었다.


"진짜, 역겨울정도로 이기적이네요. 당신이란 사람은."

 

"아..."


지이익하며 그어지는 선이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었던 선처럼.

이번에는 정우가 희수에게 선을 그었다.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그녀의 발치에 그어냈다.

정우는 그 순간 어째서인지 조금은 후련하다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보았으니까.

감추는 것도 잊어버린채 그녀의 눈에 여실히 드러나는 감정을.

완전히 싹이 말라 한참 전에 없어졌을것이라 생각했던, 그 감정을.

그것은 그 곳에 사는 동안, 언제나 자신이 거울을 통해 보던 것이었다.

정우가 여태껏 살면서 처음 본 희수의 감정은 끔찍할정도로 깊은 절망이었다.


"아아..."


희수의 몸이 휘청였다.

그의 말이 통렬하게 가슴을 헤집고 나온 자리가 시리도록 차갑고 허하게 느껴졌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노력하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는 명백히,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그녀를 거부했다.


싫어.

그러기 싫어.

보내기 싫어.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저도 모르게, 희수가 그에게 다가갔다.

비틀거리면서, 붙잡기 위해서 손을 내뻗었다.

정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담담히, 그녀가 팔의 앞섬을 붙잡을때까지도,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지...마요...제발..."


"이거 놔요."


"아파...아...파...죽을...것 같아...요...정우...씨이잇..."


꽉 물은 잇새에서 그런 말이 새나왔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정우의 옷이 와락 구겨질 정도로 힘을 준 희수의 손을 그가 뿌리쳤다.


타악.


"놓으라고."


"이제야...찾았는데...이제야...정우 씨가...그 걸 벗었는데...기다렸는데...오 년동안...난..."


"뭘 기다렸는데? 내게서 뭘 기다렸는데. 내 탓이라는 거야? 착각하지마. 당신이 한번이라도 내게 얘기 해준 적 있어? 내가 무릎까지 꿇어서라도 빌었어야 했을까? 정도껏 해."


이제는 일말의 배려마저 도려낸 말이었다.


먼저 그녀가 변하기를 기다렸던 정우와, 먼저 자신에게 진심을 보여주기를 기다렸던 희수.

그것은, 서로에게 원하며 오직 끊임없이 바라기만 했던,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오기만 했던 이기심이었다.

허나, 끝까지 서로의 잘못을 모른채 결국 그 응어리진 고름은 결국 한계를 맞이해 터져버렸다.

끝이었다.


"간다. 알아서 잘 살아. 신경쓰지 말고, 난 이미 너한테 신경 껐으니까."


정우가 돌아섰다.

날 바라보던 눈이, 날 바라보던 표정이, 날 바라보던 얼굴이 떠난다.

멀어지는 그를 다시 붙잡기 위해, 발을 내딛으려던 희수는 곧장 끔찍한 공포가 사방을 에워싸는 착각에 빠져 허우적 댔다.

그것은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정우 씨 말대로, 이제 더이상 신경쓰지 않고 살면 돼.


그렇게 자기 최면에 가깝게 되뇌어 보지만, 머지않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돌아갈 수 없으니까.

이 수없이 많은 가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아버렸으니까.


희수는 이제 이런 역겹고 끔찍한 곳에서 혼자 있을 자신이 없었다.

혼자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무섭고, 축축했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이윽고, 그녀를 둘러싸던 얼굴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쩌적 쩍, 거리며 갈라지며, 부서지듯 떨어졌다.

가식적인 미소. 가식적인 슬픔, 가식적인 기쁨, 가식적인 분노.

그 억지로 짓고 있던 모든 것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정우를 생각했다.

진심으로 생각하며, 그를 생각하며, 그녀가 지금 지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자신의 진짜 얼굴이 가감없이 표면에 드러났다.

비뚜름히 일그러진 미소. 샐쭉 찢어진 눈. 애증으로 점칠되어 이글거리는 눈동자.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을 만큼 추악한 욕망이 번들거리는 얼굴이었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못 가.


수명이 다 되어 깜빡 거리는 가로등.

희수를 비추던 가로등이 한 차례 더 깜빡 거리자, 그녀는 어느새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




내일 일가기 싫당.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