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건 잘 알고있소만, 놀라지 말고 내 이야기좀 들어보시게. 절대 그대를 해치려고 저 대짝만한 철판을 열고 들어온게 아닐세.


허허, 사시나무 떨듯이 파르르 떠는 그대의 모습도 귀여우니 보는 맛이 있구려.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를 해치려 온게 아니니 나와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해보세. 허연 달이 밤하늘에 떠 있고, 아직 여명이 밝기 전 까지 밤은 길지 않은가.


그대는 이 귀와 꼬리가 눈에 보일 것이오. 그대는 신통하여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범인이 느낄 수 없는 기를 오감으로 느끼는 자이니,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느낄 것이오. 비록 이 몸은 인간이 아닐지 모르나, 심성은 인간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으니 인간처럼 대해주면 참 고맙겠소.


내 오래 전에는 신수라 칭해지며 범인들에게 일년에 세번씩 제사상을 진상받는 존재였소. 소국의 백성들은 가장 큰 가축을 잡아 내 앞에 바치고, 그해 가장먼저 수확한 곡식을 바쳐 풍요를 기원했다오. 범인의 염원이 곧 나의 힘이요 내 힘이 곧 신통함이니 내 어찌 그들을 외면하겠소? 내 기꺼이 백성들이 풍요롭게 먹고 자식들을 키우도록 힘을 보태었소.


풍요속에서 자라난 범인들의 후손들이 나라를 키워나갔고, 살림살이도 나아지기 시작했소. 북쪽의 대국에 맞설 정도로 강력해졌으니, 마치 강인하게 자라나는 사내아이같아 과인은 매우 뿌듯했다오.


사내는 자라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여아는 여인이 되어 남편의 뒤를 따르니, 자식은 언젠가 곁을 떠나기 마련인게 세상이 이치요 그것이 부모된 자의 숙명이지 않은가? 범인들은 점점 과인에게 기대지 않고, 내 존재마저 신화로 치부하며 나를 신앙하지 않게 되었소.


허나 자식을 언제나 바라보고 싶은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는가? 내 신력으로 몸을 바꾸어 여인이 되고, 무녀가 되어 악한 것들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왔다오.


오, 그 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 백성들에게는 간사한 임금이 하나 있었소. 그 자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세 나라로 나뉘어진 나라를 모두 통치하고자 하는 자였소. 어느날 그 임금이 소인의 신통함을 알아보고 조언을 청하여 내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오.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은 필시 이 땅을 붉게 물들게 하고 애환이 천지를 흔들게 하니,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고 말이오.


그 임금은 간사했지만 좋은 눈과 간파력을 가졌었소. 내가 일개 무녀가 아닌 신통한 신수라는걸 알아본 임금은 범인들에게 과인이 재앙의 신이며, 흉의 탈을 쓴 여인이라 하여 만인이 시기하고 멸시하게 하였소.


과인이 내려준 가마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이 가련한 몸을 꿰뚫고, 악한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가르쳤던 신력은 과인의 영혼을 찢는 손이 되었으메, 몸을 잃어 존재가 비석에 묶여버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오.


범인들이 높은 집을 짓고, 하늘을 날아다닐 동안 과인은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서 앓고 있었다오. 악령으로 타락해버린 여인을 누가 다시 찾아오고 싶었겠소? 그저 비를 맞고 눈을 맞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을 뿐이오.


그렇게 영겁같은 시간이 지나, 한 사내아이가 비석 앞에 섰소. 몸을 잃은 내 앞에 서서 신령님이라 부르며 난생 보지도 못한 다과를 진상하고, 어린아이의 놀거리를 바쳤소. 봉숭아같은 작은 입으로 슬픈일, 즐거운 일, 행복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는 염원이 되어 과인의 마음에 스며드는 단비와도 같았다오.


그 사내아이는 시간이 지나 점점 늠름하게 자랐고, 삶이라는걸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는지 고심을 털어놓기 시작했소. 내 말을 하지 못하는게 참으로 한심스럽고 원통했어도 몸을 잃었으니, 어찌 방도가 있었겠는가?


사내아이는 자라서 어엿한 청년이 되었소. 이제 세상을 누빌 나이이니 과인을 찾아오는 날이 줄어서 서운했소만, 잊지 않고 계속 내 앞에 와주었소. 외로움에 지친 과인에게 염원을 불어넣어준 그 청년을 나는 연모하기 시작했소.


그렇소. 그 청년이 바로 그대일세. 내 그대가 자라는 시간을 봤으메, 이 몸은 그대가 불어넣어준 염원의 힘으로 빚은 것이니, 어찌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몸을 얻어 세상에 다시 발을 딛으니, 더 이상 한 자리에 묶여있지 않으메,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그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그대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고 온기를 나누고, 그 삶을 풍요와 희로애락으로 채워 극락같은 삶을 살리라.


이제는 신통한 신이 아닌 한 여인이 되었으니 그대만 바라보고 오직 그대만을 원하며, 그대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리라. 그대의 아내가 되어 영원토록 그대를 보필하고 그 곁을 지킬 것이오.


과인은 이제 기다리는 것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지쳤소. 그대도 이제 청년이 되어 여인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니, 오늘 밤은 서로의 몸을 탐하며 달콤한 락에 빠져보세.


저항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게나. 내 오늘은 영겁의 고통을 그대로 채워야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