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사자다.

나도 이게 뭔 개소리인지 이해 못했다.

그러나, 칼에 잘려나간 팔이 기절했다 일어나니 멀쩡한 걸 보고는 납득해버렸다.

팔이나 목이나 결국 다 이렇다는 이야기.

어쨌든 불사자들은 화형해서 조진 척 하다가 감옥에 처박힌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가만 있겠나?

화형이고 자시고 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잽싸게 튀었다.

쫒아오는 병사들은 없었다.

예전에 검 하나 달랑 들고 간 놈이 뭔 짓을 할 수가 있겠냐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건 다른 불사자 병사 이야기였나 보다.

산을 몇 개나 넘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휴식할 때 마다 상처나 아픔은 다 사라진다.

어릴 적 친구들이 보고 싶네, 신기하다면서 칼로 쑤셔볼 새끼...들...?

어?

내가 어린시절에 정상이었는지가 의심된다.

물론, 아주 비정상은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짝사랑을 했으니까.

숲에는 3일정도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말라죽은 시체가 늘어져있다.

슬슬 걷기도 지쳐갈 즈음, 숲에 한 저택이 보였다.

저 정도 크기면 조금의 음식이나 편안한 휴식을 요청해볼만 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피로가 사라진다 해도 배는 고프다.

똑똑.

이게 맞나?

소리쳐 봐야 하나 고민을 시작할 즈음 문이 열리고, 은발에 적안인 특이한 소녀가 나왔다.

내가 짝사랑하던 소녀가 4년 전 쯤에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았다.

"지나가는 여행자인데, 음식과 물을 조금만 나눠받을 수 있겠습니까?"

"상관은 없다, 이동하며 삼일은 먹을 수 있는 양을 나눠주지. 근데..."

소녀는 내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더니 내 목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뭔가 거부했다간 큰일날 것 같아서 가만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니다, 식사를 대접하도록 하지."

그녀를 따라 들어간 저택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살고 계십니까?"

"그래, 앞으로는... 아니다."

"네?"

"그, 그러니까... 불사자가 인간이랑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뭐지, 어떻게 안 거야?

"하하, 긴장 말게. 그냥 평범한 흡혈귀일 뿐이네."

"흡... 흡혈귀요?"

"그래, 흡혈귀. 가장 맛있는 건 인간의 피지만 보통은 동물의 피만 먹네. 인간의 피를 맛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꽤 많지."

뭔가 필사적으로 해명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일단 나는 주방으로 가보겠지만... 자네 키는 2미터인가? 왜 나보다 20cm은 커 보이지?"

"전 180cm쯤입니다."

"아, 내가 어린 모습을 취한 상태였지."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잠깐 안개가 끼듯 형체가 보이지 않더니 나와 키가 비슷한 여성이 되었다.

예쁘다, 얼굴 뿐만이 아니라 신체가 전체적으로.

"뭘 보는가? 저기 식탁 쪽에 앉아 있기나 하게. 시간이 이르니 차와 과자를 먼저 내가도록 하지."

그 말대로 식탁 앞에 자리를 잡으니 금방 그녀가 과자와 차, 우유를 가져왔다.

고급품인 것이 풍겨오는 향으로도 느껴졌다.

"내가 직접 만든 것이네, 어떤가?"

"향이 굉장히 좋네요, 무슨 차죠?"

"모른다."

"아하."

그녀와 시잡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릴 적, 그래봐야 겨우 10년 전이지만. 내게는 친구가 있었네. 정체가 들킬 위험이 생겨 말없이 떠나와버렸지만... 자네와 같은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친구였지. 다시 보고프긴 한데, 지금은 햇빛에 나가면 컨디션이 떨어지는 시기인데다 그 도시가 하필 태양의 도시인지라 무리라네."

길어.

근데 빠져든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 햇볕에 나가지 않는 내게 바깥의 이야기를 해주고. 괴롭히는 아이들을 쫒아내주고. 내게 사랑한다고도 말해주었지. 용기가 없었는지 자는 척을 할 때 귀에 속삭인 정도지만."

"다시 보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나와 성이 같은 동향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이야기에 몰입이 되었다.

"나는 그를 연모했네, 계속. 지금도. 그 어떤 여자에게도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네."

비극의 사랑인가, 지금쯤이면...

이미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 슬슬 음식을 내와야겠군."

"도울 일은 없습니까?"

"있는 음식을 데울 뿐이라 필요없네."

그녀는 빠르게 음식을 내왔다.

"불사가 발현된 후로는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 그랬나?"

"예, 삼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흠... 삼일이라..."

그녀가 내게 포도주를 따른 잔을 주었고, 나는 그 한잔으로 목을 축인 후 식사를 시작하려 했다.

빵을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식사는 끝나버렸지만.

"...?"

삼킬 수가 없다.

"하하... 정말 그랬나..."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십니까?"

"알지, 아주 잘 알지. 나의 친구, 내가 사랑하는 남자. 얀붕, 네게 일어난 일을."

내가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

빵을 베어무는 순간, 몸이 반응했다.

싫다고, 뱉어내라고.

"하, 너는 날 기억 못하는 거야?"

은발에 적안, 그런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 뿐이다.

얀순이.

햇빛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양도 적었던 아이.

내가 짝사랑했지만,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아이.

"어째, 정확히 삼일 전에 갑자기 배가 고파지더군."

"무슨..."

"내가 너를 떠나기 전, 너의 목덜미에 내 흔적을 남겨 놓았지. 널 내 권속으로 만드는 계약."

권속.

들어본 적이 있다.

흡혈귀의 하수인으로서 사람을 구해다 바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피라도 바치는 존재.

"인간인 네가, 죽음에 빠짐으로서 인간이 아닌 내 권속이 되어버렸던 거지."

"네가 나를...? 왜?"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아니, 뭐라 말하려 하지 마. 나는 그냥 너와 흡혈귀의 시간으로 평생을 살고 싶었던 것 뿐이니까."

"내 것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졌네, 고마워."

"아 맞다, 너도 먹어야 하긴 한데...피는 걱정하지 마. 방금 네가 술 대신 마신 피 정도면 흡혈귀의 한 끼 식사니까."

그녀가 얇은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희고 얇아 약할 것 같은 팔에서 나오는 힘은 나를 압박했다.

"조금만 맛볼게♡"

그녀의 송곳니가 목에 박혔다.

마치 키스라도 하듯, 내 목덜미를 햝으며 피를 빨아마신다.

의식이 흐릿해짐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본다.

"잘 자둬, 많은 게 바뀌어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