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엘프를 귀향시키기로 했다 (11)

 

 

 

 

 

 

21.

 

모든 것이 희미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진 못했다.

 

때때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고, 가끔은 얼어 죽겠다고 생각할 만큼 추웠다.

 

그런가.

 

나는 지옥에 온 것이다, 그 절벽에 떨어져 죽고 내 영혼만이 고통 받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될 무렵에서야, 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의식이 돌아왔군.”


“누구……?”


“움직이지 마시오, 애초에 움직일 수 있는 몸도 아니니.”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낮고, 온화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조금 움직이려고 하자마자,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다.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죽지 않았다.

 

“어두워……불을……촛불을…….”


“얼굴에도 붕대를 감아서 그렇소. 눈이 먼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 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아팠다.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대체 내가……어떻게…….”

 

“솔직히 말해서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뼈라는 뼈는 모조리 부러져서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으니 말이오.”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아니, 이걸 살아있다고 표현해도 좋은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이제 딱 반년 정도 지났소.”

 

반년이라니,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났단 말인가?


“반년이나 의식이 없었단 말인가…….”


“의식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드리시오. 평생 정신박약으로 살거나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살 수도 있었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일어선 것 같았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오.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더 걸릴 것이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커크, 그 개자식을 잡아다…….”


레나.

 

레나와 내 부하들, 그들 모두 죽었다. 커크가 죽였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쿵쿵 뛰며 손발이 떨렸다.

 

죽여 버릴 테다. 아니, 살아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게 해주마.

 

“……푹 쉬시오. 뭘 하든 회복이 끝나야 할 수 있을 테니.”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2.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앞을 보지 못했고,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지쳐

 

잠들었다. 그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루함과 격통 속에서 유일하게 안식은

 

노인과의 대화였다. 그는 똑똑하고 온화한 남자였다. 그리고 신심이 깊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사는 오두막이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지.”


“가족은……?”


“딸이 있소, 하지만 여길 떠났소. 그대는?”


“……아무것도……처음부터 끝까지……나는 아무것도 없었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한 명 있었다.

 

아니,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이젠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를, 레나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 편이 아렸다.

 

“가족도……친구라도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없이……살기 위해 살았지.”


“그 삶을 후회하시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이미 다 끝난 일인데…….”


“그대는 인간이 어째서 후회하는지 아시오?”


그의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동물이요, 그것이 인간이 신께 받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소. 우리가 과거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사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소? 결국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텐데.”

 

“…….”


그는 내게 음식을 내주었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손수 내게 먹여주었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기에, 나는 똥오줌을 그대로 바지에 지려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것을 모두 치워주었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는 사이도 아니고, 하물며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나를 극진히

 

대접해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신을 믿는 사람이라도 그러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는 정말 궁금해서, 대놓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나를 살렸지?”


“그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소.”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나았을 거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랬더라면 난 평생 스스로를 용서치 못했을 것이오.

 

우리 에브니언 교도는 용서와 속죄를 교리로 삼고 있소. 모든 이는 죄를 지으며, 진심으로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오.”

 

“하, 그런 식이면 살인마에 강간범도 용서받을 수 있겠군.”


“그가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그렇소.”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타고 태어난 본성대로 사는 게 순리지……콜록, 콜록!”

 

나는 거칠게 기침했다. 요즘 따라 기침이 자주 나왔다.

 

“악인은 죽을 때까지 악인이며 용서받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럼.”


“그렇다면 그대가 틀렸소. 악인 또한 용서받을 수 있소.”


“그걸 당신이 어떻게 단언하지?”


“언젠가, 그대도 알게 될 거요.”


그가 책을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하루에 한 번씩 내게 에브니언 교도들의 성서를 읽어주었다.

 

내용도 잘 모르고, 종교 같은 건 믿지 않는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이 고통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곤 했다.

 

“어머니, 이 사내를 보십시오. 이 사내는 도둑에 살인자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고통 받은 이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그를 밧줄에 매다는 것이 속죄더냐. 그를 절벽에

 

떨어뜨려 죽이는 것이 참된 일이더냐? 그가 죽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닌, 그가 스스로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23.

 

3달이 지날 무렵, 나는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부축을 받으면 겨우 어떻게든 걸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나는 눈에 감긴 붕대를 풀지 못해 앞을 보지 못했다.

 

이젠 이 어둠이 익숙했다. 보이지 않아도 나는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도 더 깨어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본래 수도승이 아니었소.”


어느 날, 노인이 말했다.

 

“그럼, 상인이었나?”


“아니……나는 도둑이었소. 밤마다 집을 돌며 돈과 물건을 훔쳤소.”


그건 참 의외였다. 이런 남자가 도둑이었다니?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에브니언 교도가 되기로 마음먹었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모든 걸 용서하고 또 속죄하도록 노력하며 살았고……그 삶에 후회는 없소.”

 

“…….”


“우리는 모든 걸 용서하기로 각오한 이들이오. 그대는 어떤 죄를 지었소?”


“……나는…….”


이런 걸 고백하면, 나는 경멸받을 것이다.

 

경멸 받는 걸로 끝나지 않고, 어쩌면 노인이 날 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나는 살인자에……도둑에……강간범에……모르겠군,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을 해쳤고……너무 많은 걸 뺏고, 부수고……사람은 달라지지 않아서

 

사람인 거요. 나는 달라지지 않았소, 언제까지고 살인자로 살아가겠지.”

 

“……그대가 저지른 죄는 이미 지나간 과거요.”


“그래.”


“하지만 그대가 틀렸소, 그대는 이미 달라졌소. 자신의 죄를 고백한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마시오. 스스로의 죄를 인정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달라진 것이오.

 

그대는 살인자에 도둑이오. 그러나 앞으로도 그리 살지는 그대가 결정할 수 있소.”

 

“…….”


“잠깐 함께 걷지 않겠소?”


노인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내겐 딸이 있소, 총명하고 신심이 깊은 여인으로 자라주었소.”


“어디로 떠났다고 했나?”

 

“그렇소.”


그리고 우리는 어딘가에 도착했다. 물론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일단 오두막 밖을 나온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대의 눈은 이제 다 치유되었소. 이제, 눈을 뜨시오.”


그가 붕대를 풀어줬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밤하늘을 보았다.

 

달과 별빛을, 그리고 묘비를 보았다.

 

“……이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이 집에 도적이 들이닥쳤소.”


나는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하얗고 긴 수염, 온화한 얼굴에 덩치는 작았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거기 있었다.

 

“내 딸은 그들에게 강간당했고, 그 때문에 병에 걸려 일주일 만에 죽었소.”


“나, 나는……나는…….”


그 날, 그곳에서. 나는 노인을, 그의 딸을 만났다.

 

그리고 물건을 빼앗고 그녀를 강간했다. 

 

“아…….”


“그대에게 복수할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소. 딸아이를 죽인 그대를 죽여 복수하겠노라

 

몇 번이나 마음먹었소.”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묘비를 껴안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기 전에 내게 말했소.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주시길.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가여운 사람들이라고……그 아이가 당신을 용서했으니, 내가

 

그대에게 복수할 순 없었소. 복수해봤자 그 아이는 이제 돌아오지 않으니까.”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오오!!”

 

나는 몇 번이고 묘비 앞에 머리를 처박았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이 수치심을 어찌할 수가 없었기에.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가!! 대체 왜!?”


수치심을 모르는 삶을 살았다.

 

빼앗고 죽이고 훔치는 것만이 전부인 삶을 살았다.

 

용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삶을 살았다.

 

아니.

 

단 한 순간도 진정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미안해요……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미안……합니다…….”


“그대를 용서하겠소. 그 아이가 그랬듯, 나도 이제 그대를 용서하겠소.”

 

평생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던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이었던 내가

 

그 묘비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울부짖으며 몇 번이고 용서를 빌었다.

 

나는 한 번 죽었다.

 

눈을 뜨지 못한 채 살아가던, 도적 아이반은 그 절벽에서 죽었다.

 

모든 것을 그곳에 두고서.

 

이 묘비 앞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24.

 

“……그래, 이게 그 혈적병이라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몸의 회복이 끝날 무렵,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꾸만 분홍색 피를 토했다.

 

노인이 증상을 찾아보니 혈적병이라고 하는 불치병이라고 말했다.

 

옛날 같으면 살 방법을 어떻게든 찾겠다고 날뛰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년을 넘기기 힘든 병이오.”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 절벽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당신이

 

제게 준 것입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이젠 괜찮습니다.”

 

“이제 어찌 살 것이오?”


“옛날의 저였다면, 커크를 찾아 죽이겠다고 했을 테죠.”


그가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건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그저 훔치고 빼앗은 것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저는……용서받아선 안 됩니다.”


“아직도 스스로를 용서치 못하겠소?”


“아뇨, 제겐 저를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몸이 숨 쉬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해선 안 된다.

 

“……오래 전에……제가 어떤 여자 아이를 납치해서 팔았던 일이 있습니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지만, 그녀가 살아있다면……그녀를 찾겠습니다. 아니, 찾을 겁니다.”

 

“찾아서 어쩔 것이오?”

 

“그녀의 행복을, 부서진 행복을 다시 찾아주겠습니다. 제게 그럴 자격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끝내 실패해서 처참하게 죽는 것이 제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녀를 찾아, 그녀에게 심판받을 겁니다. 절 심판할 자격이 있는 건 그녀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렇게 하시오.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쓸 수 있도록…….”


“어르신, 감사합니다. 그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그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어둠 속에 있었다.

 

“…….”


몸이 무거웠다. 목이 바짝 타들어갔고, 도무지 기력이라곤 없었다.

 

“이거야 원, 벌써 죽을 생각이야? 안 돼, 그러면! 아직 재미있는 건 시작도 안 했는데!”


커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놈이 나를 붙잡아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얼른 죽이고 끝내……네가 안 죽여도 난 오래 살지 못하거든…….”

 

“물론, 얼른 죽여줘야지. 하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으니까 말이지.”


그가 나를 구덩이에 던졌다.

 

구덩이……라고 해야 하나, 경기장에 가까웠다.

 

여긴 동굴 안인가? 주위가 어두컴컴했고 구덩이 주위로 도적들이 보였다.

 

“자, 이제 재미를 좀 보자고. 너도 즐겨, 인생 마지막 순간이니까.”


놈들이 내 맞은편에 무언가를 풀어 넣었다.

 

저건…….

 

“키히이이익!”


“캬하아아아악!”


고블린이다. 어설픈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고블린들이었다.

 

“자, 이 더러운 고블린 새끼들아! 저 남자를 죽인 놈은 풀어주도록 하마!

 

전력을 다하라고, 안 그럼 내가 너희를 죽여 버릴 테니까! 으하하하!”

 

…….

 

나는……아직 죽어선 안 된다.

 

아직은, 당장은 안 된다.

 

내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알레이나를 고향으로 데려 가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판받아야만 한다.

 

“한꺼번에 덤벼……이 버러지 새끼들아…….”


아직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살아야만 한다.

 

 

 

 

 

 

 

 

 

 

 

 

과거 회상 드디어 끝. 오래 기다렸다...

이 페이스대로면 15편전에는 끝낼 수 있겠지...

이렇게 말해놓고 또 틀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완결치도록 노력해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