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소리가 들린다. 


특유의 냄새도 느껴지고 나무판자가 짓눌리는 듯한 끼익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져, 나는 눈 뜨기로 했다.


짙은 피색과 같은 보라빛 눈동자와 하얀 머리결을 소유한 소녀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상황으로 봐서는...... 키스를 하려던 것 같았다.


" 일어나셨군요.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아서 입술에 작은 장난을 치고 있었답니다~? "


막 깨어나서 그런지 아직 정신이 몽롱했기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 뭐랄까, 놀라지 않으시네요? 조금 더 재미있는 반응을 원했는데~ 너무 침착하셔서 조금 창피해지네요.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대답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내 입은 테이프로 봉쇄되어 있었으니까.


팔과 다리도 묶여있었고 만약 이걸 푼다고 해도 이 주위는 드넓은 푸른 바다뿐이었다.


우리는 두명이 겨우 탈만한 나룻배에 타고 있었다.


" 후후훗,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가시는 것 같네요. "


호흡이 거칠어진다. 나 지금 납치 당한거야...? 애초에 이 년은 누구야!!!


" 으읍읍읍!! "


내가 몸부림을 치자, 나룻배가 흔들렸다.


" 너무 움직이시면 둘 다 바다에 빠져버릴거에요? 저 수영 못하니까 만약 빠지시면 구해드리진 못하니까 조심하셔야해요~? 만약에 당신이 바다에 빠진다면 외롭지 않게 저도 같이 바다에 빠져서 죽어드릴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 소리를 들으니까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이 여자, 제대로 미친년이다.


나를 이곳으로 납치한 것도 모잘라서 같이 동반자살 하겠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 하악, 하악.... 그 눈빛 너무 매력적이에요. "


여자가 내 얼굴을 잡았기에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따뜻하면서도 끈적한 무언가가 내 눈꺼플 뒤로 비벼지는걸 느꼈다.


이건.... 혀다. 인간의 혀. 입안에 있는 그 혀.


이 미친여자, 지금 내 눈을 핥고 있는 것 같다.


눈을 핥던 여자는 그대로 볼에 키스를 하더니 이어 입술까지 내려갔다.


그대로 테이프를 뜯어버리고는 입술을 겹쳐왔다.


비록 미친년이었지만 여자의 입술이라는 건 참 부드러운 것 같았다.


" 하악, 하악.... "


그녀는 흥분했다는 듯이 숨을 내쉬며 나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제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 어떠셨나요? 제 입술의 감촉은....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 후후훗, 부끄러워 하시다니. 걱정마세요. 저 방금 한 키스가 처음이었으니까. "


그런걸 들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생전 처음보는 타인을 납치한 것도 모잘라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데리고 왔으니.


" 하지만~? 지금은 감촉에 대해서 듣고 싶네요. 말해주세요. "


말하라고? 절대로 싫다.


" 대답을 안하신다면....? 우리 같이 알몸으로 바다속으로 들어가볼까요? "


크윽!


" ....조, 좋았어요. "


" 존댓말은 안하셔도 돼요. 제가 당신보다 어리니까요. "


반말 했다고 바다에 빠칠까봐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매혹적인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그대로 나를 옆으로 눕히더니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내 머리가 가게 만들었다.


이건....그래, 누군가가 귀를 파줄 때나 하는 포즈이다.


" 저에 대해서 궁금한게 있으면 뭐든지 이야기 해드릴게요. "


" .....왜 나를 납치한거야? "


그게 가장 궁금했다. 내 평소의 행실은 매우 성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정도 착하게 살아왔다고는 생각한다.


나쁜짓은 하나도 안했을 텐데 도대체 나를 납치한 이유가 뭐가 있을지.


"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당신과 함께 도망치고 있는거에요. "


보통 사랑을 이딴식으로 표현해...? 외모를 보면 그냥 고백만 했으면 받아줬을 것 같은데.


" 누구로부터 도망치는데....? "


" 운명으로부터. "


중2병...? 성인으로 보이는데 아직도 중2병이 안 나은거야?


" 하아..... 육지로 돌아가자. 경찰한테는 신고 안할테니까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하자고. "


못생겼다면 당장이라도 경찰서로 데려갔겠지만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으니 충분히 용서해줄 마음이 있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고개를 돌려 위를 쳐다보는 순간 내 얼굴에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 .....울어? "


" 네.... 죄송해요. 고백해주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


그녀는 눈가에 있는 눈물을 닦고나서 아무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계속 바다로 떠 밀려 갈 것 같아, 그녀에게 물었다.


" 우리 어디 가는거야? "


"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과 함께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어요. "


그 말을 듣고 확신한게 있다. 우리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표류 된 것이다.


기러기 소리 하나 안들리는 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내가 노라도 저어볼테니까 밧줄좀 풀어줘. 안 날뛴다고 약속할게. "


그녀는 내 볼에 작게 키스하더니 손과 발에 묶인 발줄을 풀어주었다.


나룻배에서 일어나 준비운동을 끝내고 그녀를 내려봤다.


역시 이 여자, 내 취향이다.


" 우선 뒤로 저으면 될려나? "


나는 노잡이가 있는 그녀의 맡은편에 앉았다. 


어디로 저어야할지는 몰랐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를 저었다.


노를 저으며 나를 매혹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 내 어디가 좋은데. "


" 아침 식사로는 핫바를 먹는 점, 콩은 싫어하지만 콩나물은 드시는 점, 잠을 자기전 스마트폰은 멀리 두는 점, 일주일에 두 번씩 방을 청소하는 점, 빨래를 할 때― "


" 그만그만! 내 일상을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


설마 이 여자 우리집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은건 아니겠지.


" 카메라로 다 봤답니다~? "


역시였냐!


" .....그런거 범죄라고. 하지마 육지에 돌아가면 같이 살거니까 얼마든지 내 일상을 볼 수 있잖아. "


하지만 그녀는 미소만 보이며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같이 살기는 싫은건가. 납치까지 해놓고 그건 아니지.


" 저 꿈이 있답니다. "


그녀가 난데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


" 무슨 꿈? "


" 좋아하는 상대와 결혼식을 올리는 게 꿈이랍니다~? "


" 너라면 그 꿈 바로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며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돈 열심히 벌게. "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뒤쪽에 있던 가방을 집어왔다.


안에 있던 내용물은 웨딩드레스를 입을 때 머리에 쓰는 베일이었다.


그걸 머리위에 쓰며 나에게 말했다.


" 지금 결혼식 올리고 싶어요. "


" 지금...? 더 좋은 곳에서 해줄게. 나룻배 위에서 결혼식하는건 여러모로 이상하잖아. "


인생에 한 번 뿐인 결혼식을 이런 곳에서 하면 평생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 결혼식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꼭 지금하고 싶었던건지 양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내밀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뭐하는 건가 싶었다.


" 꼭 지금해야겠어? "


" 네, 꼭 지금하고 싶어요. "


분위기를 보니 꼭 지금 해야할 것 같았다.


" 하지만 나 지금 반지가 없는 걸? "


애초에 납치되고 나서 결혼식을 올릴 줄은 상상도 안해봤는데.


" 괜찮아요, 반지가 없어도. 저를 영원히 사랑하다고 속삭여 주세요. "


정식적인 결혼식도 아니니까, 나중에 한 번 올린다고 생각하자.


나는 젓고 있던 노를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결혼할 때 무슨 서약의 말 같은 걸 했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분명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아 기쁠때도 슬플때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떄까지...아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당신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


설마 이런 대사를 나룻배 위에서 하게 될 줄이야.


내 대사를 들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서약을 읊어갔다.


" 저, 저도.... 당신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때도 항상 사랑하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


그녀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서로 껴안으며 서약의 입맞춤을 했다.


납치되서 결혼까지 하게 된다니. 어디 가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 .....하아, 하아 "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가 가쁜 호흡을 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얼굴에 홍조가 띈 것 처럼 붉어져 있다.


흥분 한건가?


설마 나룻배 위에서 허니문까지 경험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런 나의 걱정은 쓸 모 없다는 듯이 갑자기 그녀가 기침을 해댔다.


" 쿨럭, 쿨럭! "


침이 얼굴에 튀겼나 싶어서 닦아 냈는데, 팔에 피가 묻어져 있었다.


" 피!? 너 괜찮은 거야!? "


" ....하,아, 하아.... 제 체액을 당신의 얼굴에 ..... 행복해요. "


" 지금 그딴 소리를 할 때야!? 죽게 생겼다고!? "


그녀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던걸 간신히 끌어안았다.


" 운명으로부터는.....하아, 하아.... 못 도망쳤네요. 헤헤... "


운명이라는게 죽을 운명을 말하는 거 였냐고!!!


" 죽지마! 죽지말라고! 나랑 결혼한다며 ! 좋아한다며 ! "


" 하...아, 하아...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


만난지 한 시간도 안 된 여성이지만 나름 호감을 가졌었다.


갑작스럽게 키스하고 결혼식하고 이젠 죽어버리겠다니 너무하다.


그녀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 나랑 좋은 미래를 가꾸어 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의 소망과 다르게 그녀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힘 조차 없었는지 품에서 잠든 것처럼 있었다.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내가 할 수 있는건 그녀가 죽기 전까지 사랑을 속삭이는 일 뿐이다.


" 고...마워요. 저도 정말 .....사랑해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만을.... "


눈물이 흘러나온다.


" 사랑해.... 사랑해. "


그렇게 10분.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더이상 호흡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계속 사랑을 속삭였다.


해가 저물고 바다의 색이 검게 물들어갔을 때,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