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거기서부터 조금 더 흘렀다.

그것은 창 너머의 앙상한 나무가 온기와 푸르름을 되찾아 갈 무렵.


"으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누워있던 여인의 입에서 자그마한 침음이 흘렀다.

베개에 내려앉은 흑단(黑緞)처럼 길고 고운 머릿결.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눈가도 뒤덮을 만큼 깊게 내려앉은 앞머리.

그사이에 위치한 여인의 눈은 곧이라도 떠질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 이윽고.


서서히 그녀의 눈이 떠진다.


"아..."


그 안은 깊게 내려앉은 색채.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그리고 어두운.

짙고 검은 눈동자가 음울히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


한차례 떠진 그녀의 눈은 오랫동안 다시 감기지 않았다.

그저.

마치 하나의 인형처럼 멍하니.

아무 말 없이 그녀는 한참이나 천장을 응시했다.

그것은 수면과 함께 가라앉은 정신을 다시금 끌어올리기 위한 행동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면.


스륵.


습관처럼 그녀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조금은 불안한 기색으로.

치미는 불안감을 가슴속에 꾹꾹 묻어둔 채 삐걱삐걱 고개를 억지로 꺾어낸다.


그리고.


"하아..."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자신의 옆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그이'를 보고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딱딱히 굳어있던 얼굴이 단숨에 풀어진다.

숨 막히기만 한 회백색의 풍경이 단번에 황홀한 색채를 띠어내듯.

그녀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온 주변이 화사해지는 미소를 그렇게 양껏 피워냈다.


"후후..."


헤실헤실 피어오르는 미소와 함께 웃음이 툭 튀어나와 버린다.

기껏해야 꿈이나 상상에서야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풍경이 현실에서 이루어진 덕에.

그녀, '정희수'라는 여자의 평소 이미지와는 한참이나 먼.

그런 푼수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이'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그이'가 아침잠이 많은 덕에, 항상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귀한 광경.

매일같이 보는 것임에도 전혀 질리지 않는 남편의 곤히 자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사랑스러우니.


그렇게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정희수는 '이정우'가 잠에서 깰 때까지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2.

달각, 달그락.


아침에 쓴 식기를 씻어내는 손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입가에 잔뜩 핀 미소는 지워낼 생각도 없는 것인지.

심지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싱글싱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면.


호롭.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정우가 눈에 들어온다.

그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는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는 제 쪽을 쳐다보는 남편.


"음? 왜?"


그 말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살짝 저은 희수는 다시금 시시덕시시덕 웃으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자신이 원했던 삶.

색채를 되찾은 삶.

그 삶의 중심이 되어준 그이기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라는 낯간지러운 표현도 왠지 조금은 부족하다 느껴져서 그저 말을 아낀다.


탁탁.


이내 설거지를 마치고 손의 물기를 털어낸 정희수가 쪼르르 남편의 옆에 자리했다.

그이가 보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살짝 돌리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똑같은 유튜브 영상들.

한때 자신과의 갈등으로 인해 놓았던.

드로잉 영상들을 비롯한 수많은 그림을 그리는 영상들이었다.

영상의 화가들의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남은 손으로는 그들의 드로잉을 따라 하는.

그 진지한 남편의 모습은 퍽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남이 보면 콩깍지가 껴도 진짜 단단히 끼었구나 혀를 찰지 몰라도.

정희수는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그 콩깍지를 웃으며 영구박제 해버릴 만큼 이정우에게 푹 빠져있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이런 영상보다 아예 전문가에게 직접 배워보실래요?"


"응?"


정희수의 갑작스러운 말에 이정우가 영상에서 눈을 떼고 그제야 제 쪽을 쳐다보았다.


"그림 말이에요. 여러 영상을 보면서 공부하는 것도 분명 도움은 되겠지만, 직접 얼굴 보며 지도받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그렇긴 하지."


제 말에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정우 씨.

자신의 말에 긍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신이 잔뜩 난 정희수가 당장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이정우는 깜짝 놀라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까. 지금은 괜찮아."


"아…. 그런가요."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너무 성급했나.

아무리 남편을 위해서라지만 그래도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자신 혼자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정희수는 속으로 자책했다.


"그래도, 고마워. 당신."


"...읏."


하지만, 남편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주자 그런 약간의 우울감마저도 휙 날아가 버린다.

자신에게 고맙다며 웃어주는 남자.

어찌 안 사랑스러울 수 있겠는가.


정희수는 얼굴이 훅 화끈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우물쭈물하다 이내 고개를 폭 숙였다.

자신과 비슷했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눈에 초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그 남편이 짓는 미소는, 어찌 저렇게 치사하단 말인가.

연분홍빛.

그 미소를 마주하면 제 안은 그렇게 물들어버리기 일쑤였다.


"음,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도 좋은데, 나리 데리고 같이 산책이나 할까?"


"ㄴ, 네! 그럼 나리랑 먼저 준비해주세요. 저도 곧장 나갈게요!"


남편의 산책 제안에,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 희수가 곧장 옷을 갈아입으러 호다닥 안방에 들어갔다.

산책이라.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걷는다.

그 점만으로도 희수는 어린아이처럼 동동거린 채 옷장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뭘 입어야지...?"


밖에는 봄이 만개해 있었다.

종종 밖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느낀 바람은 제법 포근했으니, 원피스도 제법 괜찮은 선택일터.

한참이나 옷을 찾던 정희수는 이내, 자신의 눈에 훅 들어오는 흰 원피스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응, 이걸로 하자.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였다.

그렇게 옷과 머리를 단정히 하고 거울로 점검까지 마친 정희수가 방을 나서니, 거실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아...


너무 기다리게 했나.

나리도 없는 것이 설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나 싶어, 창가를 보니 밖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리의 모습과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나가야지.

그리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은 정희수는 이내 화사이 웃으며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음?........"


그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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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웃는 미소와 함께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그때.



자신을 보는 순간, 굳어버리는 그 얼굴을 보며.



창백해진 낯빛과 함께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는 남편의 그 모습은.



행복했던 그녀 자신마저 산산이 깨부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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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미안하다.

매일매일 기다리면서 댓글 주던 게이들한테 진짜 할 말이 없다.

진짜 하다못해 주말에라도 꼭 써보도록 할게.


ps. 정우는 희수를 용서한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