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런치 모드
게임 개발자들이 마감기한을 맞추기 위해 지속적인 근로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개뿔 개발자 놈들은 지들이 항상 제일 바쁜 줄 알아요


어느 직업에나 마감은 있고 기한도 있다.
공사장에는 준공일자가
제조업에는 납품기한이
회계직에는 각종 세금신고일과, 결산일이
간호사는 연말 건강검진 이
영업직에는 월말/분기말 실적발표일이 있다.


나도, 우리팀도 분기말 마감에 맞추어 크런치모드에 돌입했다.
우리팀 부장은 8시에 출근해서 19시에 퇴근한다. "먼저 들어가 볼게, 이것 좀 정리 해 놓고가"
우리팀 차장은 7시 50분에 출근해서 20시에 퇴근한다 "끝낫다~~ 이거 마무리좀 부탁해요"


그렇게 되면 나와 안주임은 7시 반에 출근해서 22시에 퇴근하게 된다.
미친 일간 근로시간이 15시간을 육박한다.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인권 침해다.
하지만 우리회사는 노조가 없고, 난 쥐뿔도 없으니 가만히 있는다.


퇴근하자마자 씻고, 빨래를 널고, 쓰러져 잔다.
맥주 한캔 마실 시간도 사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샤워하고, 다리지도 않은 셔츠를 입고 출근을 한다.

월화수목금금금월화.... 그리고 대망의 크런치 모드 10일째.
차부장들도 퇴근시간이 점점 늘어진다.  20시....21시...
그렇다는건 나도, 동료직원인 안주임도 퇴근시간이 점점 늘어진다. 22시, 23시....
정말 '오늘' 퇴근할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튼튼하면서, 망가지는 것은 빠르다.
쓰러지진 않지만,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자차도 없이 1시간 30분의 출퇴근 거리(편도)를 가진 안주임이 가장 먼저 망가졌다.

"대리님"

"네?"


"저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평소에 말도 잘 섞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안주임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100% 망가진 것이다.

"어..음...아.....네"

당황했던 나는 언어로써 성립되지 않는 긍정의 대답을 내놓는다.

가방을 매던 안주임은 머리를 박박 긁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에게 설명을 해준다.
지금 시간이 많이 늦엇고, 막차시간은 옛날옛적에 지나갓으며, 하루 일당보다 비싼 택시를 탈 생각도 없고, 여자 혼자서 회사나 모텔에 자는 것 또한 위험하기 때문에 하룻밤만 신세를 지고 싶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길, 안주임은 잠시 편의점에 들려 칫솔같은 위생용품을 산다고 한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나오는 안주임의 손에는 캔맥주 2캔이 들려있었다.

"수면제"

라며 캔맥주를 간단히 흔들어 보이고는, 아무말도 없이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던 나는 '아침에 방정리 하고 나왔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금장치가 해제되자  안주임은 거칠게 현관문을 열어제꼇다.

"실례합니다"

알고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이 널부러진 잠옷을 제외하면 집안은 깔끔했다.
안주임은 피곤한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먼저 씻어도 되죠?'라고 물어본다.

이미 가방도 던져놓고, 외투도 옷걸이에 걸어놓고, 스타킹도 벗어재끼면서 말하고 있으니 저건 질문이 아니다.

나는 늘어진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무언의 긍정을 하였다.
지금 시간은 00시 05분.. 솔직히 나도 한계다. 일일이 태클을 걸기엔 나의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

안주임이 순식간에 샤워를 마친 뒤, 나도 씻는둥 마는둥 물기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순식간에 쓰러져 자고싶은데 안주임은 묻지도 않고 열어버린 맥주캔을 나에게 내민다.


"수면제"

라며, 이미 자신은 자신몫의 맥주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다.
양치하고 나온 뒤 이지만, 먹고나서 생각하기로 한다.

안주임은 순식간에 맥주캔을 비워버린다.
나는 맥주캔 2개를 정리하고, 침대위의 전기장판을 틀고, 불을 끄고, 내 침대위에 눕는다.

안주임도 같은 침대 위에 눕는다. 자취방에 손님용 이불이 있을리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야근과 맥주 한 캔과 전기장판은 3cm거리에 이성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기 충분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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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타인의 숨결과 약간의 술냄새, 그리고 이성의 살내음에 내가 먼저 일어나게 되었다.
'동요하면 지는거다''동요하면 지는거다''동요하면 지는거다'
중요하니까 세 번이나 말했다. 옆사람이 깨지 않도록 살며시 일어난다.
출근 준비를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 사이에 일어난 안주임과 눈이 마주쳣다.

"잘 잣어요?"

라는 질문에 고개만 까딱거리며 긍정하는 안주임이였다. 참 말수도 적다.
안주임은 부리나케 나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간다. 어제 마신 '수면제' 때문인지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출근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안주임이 감사의 표시로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별일 아니라는 듯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우리는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이때 괜찮다고 말하면 안되었다.

다음부터 안주임은 퇴근이 늦는 날이면 바로 우리집으로 향했다.
처음엔 나에게 괜찮은지 묻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를 직접 누르고 있다.

언제 본거야...

그녀가 나에게 하는 말은, 씻고 나온 나에게

"수면제"

라며 맥주캔을 건낼 때 쓰는 한마디 뿐이다.


그렇게 우리집에는 점점 안주임의 물건들이 늘어났다.
냉장고의 맥주캔, 칫솔, 여성용 샴푸와 린스, 예비용 속옷과 와이셔츠, 수면용 티셔트와 돌핀팬츠.
슬슬 어떻게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안주임이 먼저 퇴근 한 날,
잔업에 늦게까지 일한 나는 현관문을 열자,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한참은 일찍 퇴근해서 막차도 상관없었을 안주임이 당당히 내 집 침대위에서, 편안한 티셔츠와 돌핀팬츠를 입고, 뒹굴거리며 넷플릭스(나의 계정)를 보고 있는게 아닌가?

한마디 하려고 숨을 들이키는데 그것보다 먼저 안주임이 움직였다.
말도 없이 성큼성큼 냉장고를 열더니, 맥주 한캔과 마른 오징어를 나에게 내밀고는

"고생하셧어요"

라며 환하게 웃는다.
신발도 벗지 않고 맥주를 한모금을 햇다.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시원한 맥주 때문인지 불같던 마음속이 찬찬히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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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저차 크런치 모드가 끝을 맞이하였다. 

부장은 '이대로 하다간 딸내미가 아빠얼굴을 잊어먹겠다'며 신입사원 채용을 천명하였다. 2주만에 신입사원의 서류전형과 면접까지 진행되었다. 


그동안에도 간간히 안주임은 맥주 한 캔과  넷플릭스를 보러 놀러오곤 했엇다. 이전과 다른 점 이라면,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갓다는 것이다.

 새로 입사한 진순애 사원은 화사하고 밝은 여성이였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 21호 파데를 쓸법한 하얀 얼굴, 렌즈를 착용하고, 정장치마에 구두를 또각거리며

 "안녕하세요~❤️"

라고 해맑게 인사를 하였다.
생산직 근로자들이 괜시리 얼굴한번 보겟다고 사무실에서 커피한잔을 하곤 했다.


신입사원의 업무가 어느정도 익숙해 질 무렵, 같은 밝은 성격의 차장님이 신입사원 환영회를 제안하였다. 왠일인지 사장님께서 직접 법인카드를 하사하였으니.. 신입사원의 힘이 대단하긴 했다.

 법카도 나왓겟다 소고기 집에서 부장, 차장, 나, 안주임, 진순애 사원 5명의 회식이 시작되었다.
 밝은 성격의 신입사원은 회식자리에서도 중심이였다. 잘 웃지않는 안주임도 신입사원의 농담에 살짝 웃어보일 정도였으니... 역시 저 미소는 반칙이다.

 이제와서 숨겨서 뭐하랴. 안주임에게 홀딱 반했던 나였지만 쑥맥마냥 고백도 못하고 있었다. 사내연애에 대한 막역한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안주임의 미소를 안주삼아 한병 두병 홀짝거리고 잇으니. 어느 덧 말수가 많던 진순애신입이 웃기만 할뿐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이내 의사소통이 되질 않는다.

 '시간도 슬슬 집으로 갈 시간이니..'라며 부장이  회식자리를 파한다.
 귀찮은건 딱 질색인지 차장과 부장은 술에 취한신입사원을 나에게 미뤄두고 돌아가버렸다. 진순애 사원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지, 이젠 나한테 착 달라붙어서 기대온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팔뚝을 자극하지만 애써 무시한다.

 "우리 한잔 더 하러가요!"
신입사원의 발언에 벌써부터 숙취가 몰려오는듯 하다

"진순애씨도 이제 집으로 가봐야죠, 벌써 시간도 많이 늦엇다구요. 막차 끊겻겟어요"
취객은 적당히 구슬려서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자

"그럼 대리님 집에가서 한잔 해요~ 히히히"
미치겟네, 우리집이 여기서 가까운건 어찌 알고 있는거야?

"진순애 사원,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보죠"
천사와 같은 안주임의 목소리, 아직 살아날 구멍은 있나보다

"시러요~. 대리님 집에가서 한잔 더 하고싶단 말이에요"
슬슬 혀가 짦아지는 신입사원과

"안돼요"
다정한 말투로 진순애 사원을 달래는 안주임.

하지만 진순애 사원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에게 엉겨붙어 방방 뛴다.
아. 팔뚝에 부드러운 감촉이...
"그러지말구~~ 안주임님도 같이 가서 놀아요"
"안됩니다"

안주임은 한손만으로 신입사원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이외로 강력했던 안주임의 손아귀 힘에 진순애 사원은 나에게서 떨어지게 되었다.

"히끆!"
놀랏는지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는 진순애 사원과

"아직. 막차 늦지 않았으니까. 돌아가도록 하세요. 내일 출근해야죠? 진순애사원"
말은 진순애사원에게 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노려보고있는 안주임이였다.

그렇게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신입사원을 바래다 준 후에. 집으로 살살 걸어가볼까 하는데..

"그... 안주임? 집에 안갔어요?"


안주임이 아직 내 옆에 있다.

"저 막차 놓쳣어요. 대리님"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만, 어색한 국어책 읽기와 같은 대사

"네?"

"저 막차 놓쳣다구요. 재워주세요"


방금 헤어졋던 진순애 사원이 탄 열차가 막차인듯 한데
왜 그걸 타지 않앗는지. 어째서 당당히 재워달라 하는 건지 따지고 싶은것이 한가득이지만...

"어..음...아.....네"
당황했던 나는, 다시 한번 언어로써 성립되지 않는 긍정의 대답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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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술이라도 한잔 햇기 때문일까. 안주임이 바짝 붙어서 걷는다.
서로의 팔이 스치듯 걸으며, 우리는 평소처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앗다.

이윽고 집앞의 편의점을 지날 때, 안주임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수면제"

"그.. 맥주라면 안주임이 사다놓은게 냉장고에 아직 잇어요"

"수. 면. 제"

다시한번 강조하듯 말하더니. 총총걸음으로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안주임이였다.
편의점 밖에서 오도카니 안주임을 지켜보고 있는데
맥주코너에서 자신이 먹는 맥주 2캔과 함께, 생필품 코너에서 무언가 작은 한박스를 같이 집어오는 안주임이 보였다.
저건...그......피임용품일텐데....

"가죠"


편의점에서 나온 안주임은 술때문인지 귀를 붉게 물들이며, 내 옆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편의점에서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2분.
2분내에, 나는 안주임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자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