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어쩌다 내 언니가 저런 남자한테 호감을 가지게 된걸까. 


그도 그저 언니의 외모만 보고 반한 한심한 남자일까? 나와 달리 화려한 외모와 공부도 공부도 잘해서 과탑을 놓쳐본적 없는 언니의 주변에는 항상 접근하는 남자가 끊이지 않았다.

 

언니와 달리 공부는 못하지만 키는 큰 나는 일찌감치 공부는 포기하고 체대쪽으로 진학해서 언니와 같은 대학의 배구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언니한테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착한 언니를 대신해서 내가 블로킹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가 먼저 어는 남자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언니가 먼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그 언니가 그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 대해 조사를 해보기로 결심하고 몰래 뒷조사를 해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방윤. 교양수업에서 처음 언니와 만났으며 언니와 같은 3학년이지만 과는 다르고 성적과 외모를 포함한 대부분이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키가 살짝 작다는 정도. 


언니와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샌가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화제가 전환 되었고 결국 나는 언니에게 그 남자에게 관심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누가봐도 티나게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부인했고 단지 그는 나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한것 같지 않고 착한 사람인 것 같은게 전부라고 말했다. 


그 때 나는 그 남자에게 질투심이 생겼다. 나는 아무리 언니를 도와줘도 단순한 여동생일 뿐인데 그 사람은....


"언니, 그 사람이 나쁜마음을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알아? 그리고 착한 사람인걸 어떻게 판단해?"

"아니야. 방윤이는 진짜 착한 애야. 너도 만나서 같이 다녀보면 알게 될걸?"


아니야, 그 녀석이 위선자일지 어떻게 알아.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야. 단지 잘보이기 위해서 착한척 하는 사람일거야. 

그렇게 판단한 나는 언니에게 나도 그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고 셋이 만나서 소개받은 다음, 며칠후 그 남자에게 따로 둘이 카페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나는 최대한 차려입고 카페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선연씨.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부르신건지?"

"네, 안녕하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말할게요 방윤씨. 완전 제 이상형이에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네...네? 아...아니 갑자기 그 그렇게 말하셔도. 당황스러운데."


얼굴은 빨개지면서 말도 많이 더듬는 걸 보니 확실히 언니가 말한대로 순수한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남자도 결국 속내는 다른 남자들이랑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혹시 진연 언니한테 관심 있으신건가요? 그런게 아니라면 저랑 만나보는거 어때요?"


언니에게 갈 징검다리로써 나랑 사귈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언니보다 만만해 보이는 나와 사귀자고 판단해 고백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이 남자에게 마음은 하나도 없지만 사귀는 척 하면서 이 남자의 추악함을 알아낼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결정한 방법이었다. 


혹여나 거절하더라 언니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이 남자를 정떨어지게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저보다 언니가 더 예쁜..."

"저기 선연씨?"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에 있던 당황스러움은 사라지고 잠시 혼자 생각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사실 진연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선연씨가 자기를 엄청 생각하고 도와주는 동생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아까처럼 더듬는 말투도 완벽히 사라진채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진연이한테 나쁜 녀석들이 붙어서 곤란하던 때에도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는 믿음직한 동생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방금 그 고백은 혹시 제가 흑심이라도 품었을까봐 선연씨가 저를 한번 떠본거라고 생각하는데 제말이 틀렸을까요?"


그 남자에게서 사라졌던 당혹스러움이 나에게 옮은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카페에 오기전만 해도 최대한 당당하게 그리고 고백을 거절당한다면 최대한 싸가지 없게 말을 하리라고 했던 다짐이 사라져 버리고 속내를 들켰다는 쪽팔림만 남아있었다. 


어떻게든 숨기려고 표정연기를 해봤지만 그의 눈은 마치 용의자를 추궁하는 형사처럼 날카로워서 이미 내 진의를 다 들키듯 보였다.


"저는 진연이한테 그런 마음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죠. 가져본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적어도 현재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야 당연히 진연이가 훨씬 아깝잖아요. 저는 지금 친구로 지내는 관계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데 고백해서 이 관계를 박살내고 싶지 않아요. 단언컨데 소위 말하는 진연이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은 먹어본적 없어요. 제 모든 걸 걸고 맹세코 진심입니다. 믿어주세요."


그는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추악함을 입증하려고 그를 만났지만 되려 그가 진짜 착하고 흑심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한 꼴이 되어버렸다. 


완전히 나의 예상과 반대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마지막까지 떼를 쓰고 말았다.


"당신이 거짓말을 이렇게 태연한 얼굴로 하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제가 믿죠?"

"마음을 꺼내서 직접 눈앞에서 확인 시켜드릴 수는 없으니 친구로 지내면서 증명하는 방법 밖에 없겠네요. 만약 그런 나쁜 마음이 있다고 판단 되시면 그때는 저를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두들겨 패도 좋고 진연이랑 다시 못 만나게 해도 좋아요. 최대한 동생분한테 걱정끼치지 않게 노력할게요. 그리고..."


그는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동생분도 자기를 좀 소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너무 언니만 신경쓰지 말구요.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진짜로 위험한 녀석이 접근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거짓고백해서 사귀는 척하면, 그 다음엔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줄 알고 그래요? 물론 운동하셔서 웬만한 남자들보다 힘이 쎄신건 알지만 그래도 조심할건 조심해야죠. 다음부턴 이상한 녀석이 진연이한테 접근하면 진연이한테 먼저 사정을 듣고나서 무조건 경찰한테 말하세요."


그렇게 카페를 나와서 헤어지자 마자 도망치듯 집까지 빠르게 뛰어갔다. 그리고 집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어봤다. 먼저 카페에서 미쳐 다 느끼지 못한 창피함과 쪽팔림이 뒤늦게 집에서 나를 덮쳐왔다. 나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뻥뻥차며 쪽팔림을 발산했다. 

그 다음 느낀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상대를 떠본다는 행위는 상대가 그 목적을 알아차리는 순간 상대에게 한 도발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그의 첫 반응을 보면 연애에 관해 서투를 것 같은데 거짓고백이라니, 꽤나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화를 내기는 커녕 나를 안심시키려고 맹세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마지막엔 나를 걱정해 주다니,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 나름의 사죄의 의미로 그날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언니에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 남자는 좀 다른 것같다, 그래도 혹시라도 이상한 짓하면 꼭 말해라, 이런 말들과 함꼐 그가 해줬던 말을 들려주니 언니는 실시간으로 표정이 기뻤다가 실망했다가 시시각각 변했다. 아마 나를 걱정해줄만큼 착한 사람인걸 알아서 기쁘지만 자기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에는 실망한 거겠지. 그런 언니를 보니 나도 마음이 착잡했다.


그 다음날부터 부쩍 방윤씨와 마주치는 날들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언니를 만나려다가 방윤씨도 같이 만나는 상황이 많아졌다. 그럴때마다 나는 언니를 만나려 했는데 불청객이 있다며 툴툴댔지만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오붓하게 언니랑 데이트 하려던거 방해해서 죄송해요. 요즘 왜인지 진연이랑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아져서... 그래도 셋이 놀면 할게 더 많지 않을까요?"


이 남자는 둔감한걸까 바보인척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적으로 마주치려고 방윤씨가 수업듣는 건물을 일부러 경유해서 가는 건데. 아마 언니가 자기한테 호감이 있다고 생각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심 자체를 안하는 듯 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또 괜히 심술이 나서 그 사람한테 틱틱대고. 이제 그런 생활이 일상이 된 것 같았다. 카페에서의 일을 사과하고 싶었지만 왜인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과하자고 마음을 먹어도 직접 마주치면 오히려 더 심술궂은 말이 나오곤 했다. 그럴때마다 언니가 옆에서 핀잔을 줬지만 그는 그때마다 넉살좋게 동생분이 다 너를 생각해서 그런거라며 웃으면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런 나날이 지속된지 한달쯤 됐을까. 여느 때와 같이 언니를 만나러 가는 중에 사거리 골목길 왼쪽에서 언니와 방윤씨를 만났다.


"어 선연씨 안녕하세."


그 때 갑자기 내 뒤쪽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내가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방윤씨는 험악한 표정으로 나에게 돌진했다. 그대로 방윤씨는 나와 몸을 부딪혔고 나는 땅에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야야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에 어.... 바 방윤씨?" 


고개를 들어서 방윤씨를 쳐다보니 방윤씨는 어떤 남자가 들 부엌칼에 복부를 찔려있었다. 저 남자는..... 예전에 내가 사회적으로 매장시킨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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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기억났다. 방윤씨와 언니가 친해지기 몇 달전 어떤 남자가 언니에게 접근했었다. 언니는 그냥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친해진 평범하고 착한 남자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때도 언니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그 남자의 통화를 몰래 엿듣게 되었는데


"야 거의 다 넘어왔다니까. 곧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야 이 새꺄, 그렇게 공주님처럼 생긴 애들이 오히려 쉽게 넘어온다고 내가 말했지? 시발 내가 먼저 맛보고 후기 말해줄게"


그 통화내용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남자를 죽을 때까지 패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잠시 뒤 나는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과 함께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해졌다. 그래 이런 새끼는 분명 과거나 연애사가 구릴 것이다. 패버릴 시간이 아까울 뿐더러 과거를 뿌려서 얼굴들고 대학을 다닐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몰래 그를 따라다니며 통화내용들을 녹음했고, 그의 주변을 조사하면서 과거를 캐냈다. 예상과 다르지 않게 그는 양다리는 기본에 여자를 기분따라 먹고 버리는 쓰레기 중 쓰레기였다. 그런 주제에 관리는 어떻게 한건지 주위의 평판은 또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렇게 조사한 자료와 녹음내용들을 그가 속한 과단톡방과 커뮤니티에 올렸고 그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증언들과 함께 그는 완벽하게 쓰레기로 낙힌찍히게 되었다. 


언니는 그때 그 새끼를 꽤나 믿고 있었던 모양인지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언니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패버릴까 고민도 했지만 재빠르게 휴학하고 잠수를 타버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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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쓰레기가 나를 찌르려다가 방윤씨를....? 나는 잠시 머리가 하얘져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고 그 남자는 그대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를 추격할 생각도 못하고 바로 방윤씨에게 달려가 천천히 무너지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언니도 방윤씨에게 달려와 펑펑 울면서 폰으로 119를 부르고 있었고 나도 결국 울먹이면서 어쩔줄 모른채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응급실로 실려갔고 우리 둘은 병원에서 발을 동동 구른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로부터 근처 cctv를 통해 범인을 붙잡았다는 연락이 왔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딴 녀석을 응징하는건 방윤씨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후에 해도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초조하게 그가 들어간 응급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죽으면 어떡하지? 사과도 못했는데? 나때문에 죽는다고? 맨날 짜증이나 내던 나때문에? 이럴순 없어. 이러면 안돼. 나도 따라서 죽어야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제발 죽지만 말아줘.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제발 살아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옆의 언니를 보니 눈을 꼭 감고 기도라도 하는 것인지 두 손을 모은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 언니를 보니 또 다시 여러가지 감정이 요동쳤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모질었던 행동에 대한 미안함일까? 아니면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때문에 다쳤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나왔다. 다행히도 얼굴은 어두워보이지 않았다. 깊게 찔렸지만 천만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언니와 나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내일 깨어나면 연락주겠다는 말과 함께 병원을 나왔다.


"언니 미안해. 나 때문에..."

"방윤이가 다친건데 사과를 왜 나한테 해. 아니, 아니야. 너가 애초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잘못은 칼로 찌른 그 자식이 한거지. 딴 생각 말고 잘 회복하기만을 빌자."


정말 바보같았다. 언니를 신경 쓴다고 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히 나의 행동들은 주변에 적들을 만드는 행동들이었다. 그것에 대해 간과했고 그 대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쳤다.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속으로 내 자신을 향해 욕을 내뱉으면서 언니를 보니 언니도 뭔가 골똘히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결심을 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일어나면 꼭 말하자'라고 중얼거렸다. 고백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방윤씨는 착하고 언니와 이어질 만한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언니와 사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걸까? 역시 나도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구나. 하지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다. 그 남자를 그렇게 위험에 빠뜨려놓고, 게다가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좋아해도 되는 걸까? 


마음이, 아니 심장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후회된다. 그에게 모질게 대했던 것이 후회되고 빨리 사과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언니보고 착해빠진 바보라고 예전에 말한적이 있지만 누구보다 바보인건 나였다. 자기 자신의 본심도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누가 바보란 말인가? 내일 언니가 고백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옆에서 축하해야 할까? 아니 차라리 이제부터 그를 만나지 말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한숨도 자지 못한채 다음날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깨어났으니 한번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고 언니와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 왔어? 의사 선생님이 나 괜찮다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수술 잘 끝났고 좀 만 회복하면 퇴원해도 된대. 그나저나 병원밥 진짜 맛없더라. 너희는 입원같은거 하지마라"


오자마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던지는 걸 보면 역시 이 사람 답다 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언니는 갑자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듯 밥을 먹고있던 숟가락을 놓쳤고 언니는 잠시동안 가만히 있다가 포옹을 풀어주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방윤아, 이런말 좀 갑작스럽겠지만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응.... 어? 지금 뭐라고."

"지금 바로 답 안해도 돼. 단지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 내 마음을 빨리 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돼서 내 멋대로 내 마음을 알려준거야.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고 답줘도 돼. 그리고 내 동생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어..... 그래. 나는 근데 너가 진짜로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너가 싫다거나 한건 절대 아니고 단지 좀 너무 의외라서 그런거니까..... 일단은 알겠어."


바보같은 남자. 멍청한 남자. 그렇게 언니가 어필했는데 모른다고? 이 남자는 둔감해도 너무 둔감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멍청하고 바보같은 건 내 마음을 어필조차 하지 못하는 바로 나겠지.


"방윤씨 정말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괜찮아요 선연씨. 저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그리고 나쁜건 날 찌른 사람이지 선연씨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요. 정 미안하면 퇴원하고 밥이나 좀 사주세요. 병원밥은 너무 맛없어서 뭘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것 같네요. 하하"


내 마음속은 타들어가는데 이렇게 너스레나 떨다니 정말 나쁜 사람이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그는 퇴원했다. 그리고 병원에 있을 때의 약속을 언급하면서 저녁식사 약속을 잡게 되었다. 


"선연씨, 약속 잊지 않으셨죠? 내일 저녁 때 시간 어떠세요?"

"아, 물론 안 잊었죠. 그래도 이렇게 빨리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일 스테이크 썰러 가시죠. 제가 아주 맛있는 곳으로 쏠게요."

"하하,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선연씨에게 상담 할 것도 있어서 내일 뵙자고 한거에요. 그러면 내일 봐요, 선연씨."


나는 바로 직감했다. 높은 확률로 언니의 고백에 대한 상담일 것이다. 그는 무슨 대답을 준비했길래 나에게 상담까지 요청한걸까? 

느낌이 좋지 않다. 매우 불안하다. 아무래도.... 준비를 해야할것 같다.


다음날 저녁이 되고, 나와 방윤씨는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 


"선연씨, 여기 와도 괜찮아요? 가격이 만만찮아 보이는데."

"저를 구해주신 주제에 싸구려 식당을 기대하신거에요? 안되죠. 안돼."

"하하, 그러면 사양않고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맛있게 하는 와중 나는 넌지시 운을 뗐다.


"저기, 그래서 어제 말한 상담하고 싶은게 뭔가요?"

"아, 그게 말이죠. 진연이 고백에 관한 건데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고백을 받기가 좀 그래서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내 표정을 눈치챘을까?


"사실은 제가 먼저 고백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진연이에게 선물을 하면서 고백하고 싶어요. 그래서 진연이가 좋아하는게 뭐가 있을까 동생인 선연씨가 잘 알고 있을거 같아서요. 하하. "


시발. 사실 그는 나를 놀리는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울화가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험악한 표정을 지을 뻔했지만 침착하게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런 내 속을 모르는지 그는 조용히 나를 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셨구나, 음 언니가 좋아하는거라...."


그 다음부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타들어가는 속과 엉망이 된 뇌 때문에 무의식으로 나오는대로 말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기억에 남은건 경청하고 있는 방윤씨의 얼굴 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선연씨. 너같은 놈한테 언니를 넘길것 같아? 이러실까봐 사실 좀 무서웠거든요. "

"하하... 방윤씨 정도면 언니를 믿고 맡길 수 있겠죠."


앉아서 식사만 했을 뿐인데 배구시합을 휴식시간 없이 뛴것처럼 온 몸이 지쳐버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대로 두 사람을 축복해준다면 둘 다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겠지? 


분명히 그건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 일텐데, 왜 이렇게 슬플까. 


"저기 선연씨? 속 안좋으세요? 왜 이렇게 많이 남기셨어요?"

"아.... 오늘은 뭔가 배가 빨리 찼네요. 방윤씨 다 먹었으면 일어나죠."


집으로 같이 돌아가는 길,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어제 준비한 걸 써야겠다. 정말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도 내 마음이 주체가 안되는걸.


"선연씨, 식사 고마웠어요."


내 집앞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결심을 완벽히 굳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기 방윤씨, 실은 저도 진지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제 집에 와주시면 안될까요?"

"네? 선연씨 집에서요?"


방윤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예상치도 못하게 진지한 얼굴로 내가 말을 꺼내서 그런듯하다.


"딱 20분 정도만 시간 내주세요. 얘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방윤씨 밖에 없어요. 부탁이에요."


그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같이 내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언니는 내 바로 옆집에서 살고 있지만 오늘은 도서관에서 늦게 까지 공부한다고 했으니 걸릴 염려는 없다. 그래, 이제 한걸음 남았어...


"얘기가 조금 길어질수도 있으니 물이나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죠."


나는 부엌쪽으로 걸어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고 그의 컵에는 어제 준비한 수면제를 탔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의 사각에서 준비했으니 아마 모를 것이다. 그에게 물을 건네주었고 그는 역시나 아무의심도 없이 그 물을 한모금 마셨다.


"그래서 진지하게 할 말이 뭔가요 선연씨?"

"그게 뭐냐면요.... 안타깝게도 언니가 방윤씨의 고백을 받아주는 일은 없을거란 거에요."

"네?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윤씨는 고개를 식탁으로 쳐박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방윤씨는 언니에게 고백을 할 수 없을테니 말이죠."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어제 수면제와 함께 준비한 밧줄로 그를 내 침대에 묶었다. 


"예전에 방윤씨가 그랬죠? 자기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방윤씨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 같으니 제가 방윤씨를 마음대로 해도 되겠죠? 몸도 마음도 언니는 생각이 안나도록 만들어줄게요."


역시 이 남자는 너무 순진하고 착해빠졌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니 이 남자는 언니와 어울리지 않아.


이런 남자에게 어떻게 언니를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언니는 넘기지 않아. 그리고.......




언니에게 절대로 넘기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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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100% 얀데레의 시점으로 써진 소설은 본적이 없어서 써봤음. 이 정도면 백합주의라고 쓸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