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맺힌 창틀, 겨울바람에 커텐이 흔들리는 방 안.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볕에 카를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나, 둘, 느려졌던 사고를 가속시키며 카를은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전날의 이사벨.  

제게 용서를 구하던 이사벨,

저를 끌어안던 이사벨.

사랑을 속삭이는 이사벨.


하나같이 현실성 없는 모습들이었다.

푸흐,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자신이 생각해도 과하게 비현실적인 일에

카를은 이사벨의 일을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했다. 


"이사벨이 나를 사랑할 리 없는데 말이야.."


늘 보던 허름한 천장, 낡은 침대.

그 어떤것도 바뀐 건 없었다.


그래, 그냥 꿈이었다.

질 나쁜, 어쩌면 망상이었을지도 모르는.


카를은 뻐근한 몸을 일으키곤 

창밖에 돋아나는 백색의 꽃을 바라봤다.


수선화. 겨울에도 피는 아름다운 꽃.

예쁜 하얀색이 자신의 백발과 닮아 있어

결혼 이전에도 좋아하던 꽃이었다.


밖에 나가면 가게에 수선화를 장식해볼까.

이 가게에만 있는 트레이드마크! 라고 소개해도 좋을 터였다.


카를은 입가에 자그마한 호선을 그리며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곧 하인들이 아침 인사겸 세안수를 가져올 시간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미 한 시간 전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기고만장해진 하인들에게 정상적인 대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벌컥-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주의한 입장.

벌써 하녀들의 표정에는 귀찮음, 짜증 등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세안하실 시간입니다."


하녀 하나가 떨어뜨리듯이 거칠게 세숫대를 내려놓았다.

그 탓에 굵은 물방울들이 튀었지만, 

카를에게는 예사였기에 

딱히 신경쓰지 않고 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앗..차.."


멀쩡히 얼굴을 씻으라고 줬을 것 같진 않은 냉수.

바깥 냇가에서 대충 퍼온 건지, 그다지 청결한 물조차도 아니었다.


" 부인, 물은 마음에 드세요?"


명백히 조롱의 의미가 담긴 질문.

뒤에 선 하인들이 불쾌하게 키득거렸다.


" 응...고마워..."


카를은 또 감정 없는 감사를 건네고는 

찬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찬 물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간을 빨리 넘기고 싶었다.


뭐가 또 성에 차지 않는지, 하녀의 표정에는 불만이 서렸다.

퉁- 갑작스런 하녀의 발길질에 세숫대가 엎어졌다.


"앗,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물을 덮어쓴 우스꽝스런 자신의 모습이 웃긴 것인지, 

하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수건 좀 줄래?"

"그럼요, 여기요."


완전히 젖어버린 카를은

애써 미소를 짓고는 하녀가 가진 수건으로 손을 뻗었다.


휙- 

하녀가 수건을 갑자기 잡아끌었고, 

그 덕에 카를은 보기 좋게 바닥에 고꾸라졌다.


거친 바닥에 무릎팍이 쓸려 피가 흘렀다.


쓰라림과 서러움,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 

오늘도 카를의 눈물샘을 기어코 터뜨려 버렸다.


"흐윽,...윽 히윽.."


애써 씹어삼킨 신음이 터져나오듯 새어흘렀다.

갸냘픈 손목으로 쓸어담으려는 눈물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그렇게 괴롭혔겠지.

저항할 수 없다, 반항할 수 없다. 무력감이 카를을 뒤덮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녀들의 비웃음은 이미 최고조였다.


하녀들에게 카를의 일그러진 표정은 하나의 오락에 가까웠다.

살면서 공작가의 일원을 괴롭힐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더군다나 공작이 신경쓰지 않는 멍청한 공작부인.

길고 지루한 하녀생활에 이다지도 즐거운 놀이는 희귀했다.


자신들이 카를을 가지고 놀고, 이내 카를이 울음을 터뜨리고,


그렇게 오늘도 별 탈 없이 넘어갈 일이었다.


"너희 뭐야, 뭘 하는 거야."


갑작스런 공작의 방문만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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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이사벨 발렌시아는 전례없는 행복에 잠겨있었다.


"카를, 카를, 나의 카를."


부르기만 해도 좋아서 미칠듯한 그 이름.


다시는 못 볼줄 알았는데, 못 만날줄 알았는데.


무신론자인 이사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신이라는 이에게 엎드려서 절을 바칠 수도 있었다.


구름을 저며 살포시 얹어 놓은 듯한 백발,

진하고 아름다운 루비색 눈.


저의 반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굳었던 이사벨의 표정이 눈 녹듯 풀어지고,

아랫배가 쑤시듯 욱씬거렸다.


카를,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우선은 식사부터 같이 하고,

같이 산책하다가, 티타임이라도 즐겨 볼까.


그 더러운 누더기 방도 내 방으로 옮기고,

옷도 복도의 모든 방을 채울 만큼은 사야지,


그렇게 새로 산 옷을 입은 그를 품에 안고, 서로 장난치듯 웃다가,

그러다 밤에 동침을-


흐윽- 그만. 더 이상 하다간 못 버틸 것만 같다.


"아, 역시 못 참겠어."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를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이사벨은 성큼성큼, 카를의 방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비었어."


분명 하녀들이 상주하고 있어야 할 복도는 

비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인원이 적었다.


그나마 있는 하녀들도 건성건성에 하는 둥 마는 둥.


이사벨의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앗... 공작님을 뵙습니다."


이사벨은 못 올 사람이 왔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멍청하게 인사를 건네는 하녀를

가볍게 무시하고 카를의 방문 문고리를 잡았다.


"아...! 저기 부인께서는 지금..."


아까의 하녀가 이사벨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사벨은 자신의 앞을 막은 벌레를 서서히 훑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눈.

이사벨은 저런 부류들을 손쉽게 꿰뚫어내곤 했다.


" 비켜. "


단 두 음절의 말을 건네는 것 만으로

이사벨을 하녀를 간단히 제압했다.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는 하녀.

지금의 이사벨은 설령 황제가 와도 막지 못했다.


그렇게 이사벨은 무언가 수상쩍은 

카를의 낡은 방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하녀들.

나동그라진 세숫대,


피가 흐르는 무릎을 끌어안고는

엎어져서 눈물을 훔치는,



카를.


"뭐야, 너희 뭘 하는 거야."


지독하게 차가운 음성이 방 안을 내리깔았다.


한 발 한 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이사벨이 내뿜는 끔찍한 살기에 

하녀들은 발 한짝조차 제 의지로 뗄 수 없었다.


"저기, 그게 아니라.. 공작님 .. 저희는.."


이사벨은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버러지의 목을 부러트릴 듯 틀어쥐었다.


"무얼,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아니면, 모자란 네 년의 입으로는 덜떨어진 변명밖에 지껄일 수 없는 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력에 하녀의 눈이 까뒤집히고 입가에 거품이 일었다.


감히 카를을, 그것도 피를 보이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쓰레기들을 으깰 이유는 충분했다.


" 벌레만도 못한 너의 목숨으로 죗값을 값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네년의 가족, 친척, 그 밖에 너와 관련된 모든 이를 찾아 모조리 불사를 테니."


이사벨은 그녀가 느끼는 분노를 단 한톨도 감추지 않았다.

이 오물을 죽이면 다음의, 다시 다음 오물을 싸그리 죽일 것이었다.


"어윽,억,으억"


생사를 넘나드는 하녀는 이제 돼지가 우는 듯한 신음밖에 흘리지 못했다.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까. 하녀 모두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지,진짜 죽겠어요, 그만,해요"


웅크렸던 카를이 이사벨의 옷깃을 잡으며 말렸다.


"카,카를... 하지만 저년들을 널 다치게 했는데..."

"그,그치만...죽,이는건 싫어요.."


자신의 옷깃을 잡고 간신히 말을 이어가는 카를,

마음같아선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사랑하는 카를의 부탁이었다.


"다 꺼져."


이사벨은 마지못해 하녀들을 내쫓았다.


"가,감사합니다!!"


부리나케 달려가는 하녀들,


후에 이사벨이 손수 그 하녀들 모두를 다시 찾아 

수차례 고문하고 끝내 죽여버린 것은 또다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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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호화로운 식당.

일렬로 늘어선 시종들과, 얼마인지조차 가늠이 가지않는 식기들.

분명 몇백 금은 우습게 넘는다던 식재료들이 떠리 상품들처럼 놓여져 있었다.


식당이야 이전까지 와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였던 적은 없었는데.


대접받아 본 적 없는 음식들에 놀란 카를이 

구석에 놓인 작은 빵만 씹고 있었다.


빵만 먹고 있는데도 훌륭한 맛에 

카를도 조금씩 즐겼지만,


실은 계속 옆에 밀착해 있는 이사벨이 부담스러워 

음식이 잘 넘어가질 않았다.


애초에 왜 자신이랑 식사를 하는지,

이사벨이 어제와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거들떠도 안 보던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왜인지,


거듭되는 의문들에 카를이 잠시 멍을 때렸다.


"카를, 혹시 맛이 없어?"

"아, 아니에요.. 너무 맛있어요.."

"아까부터 빵만 먹잖아, 조리사를 족쳐야 하나..."

"저,정말 맛있어요..!"


급해진 카를이 아무 음식이나 집고는

입안에 넣었다.


"헤,헤헤"

"흐윽"


멋쩍은 웃음을 살짝 짓자 이사벨이 고개를 돌렸다.

웃음까진 짓지 말걸, 카를이 살짝 후회했다.


물론 고개 너머로 홍조를 띈 이사벨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통제하는 것을

카를은 전혀 모를 일이었다.


"카를, 오늘부터 나랑 같이 자자."

"...공작,님이랑요..?"


"응, 언제까지고 너를 그 더러운 방에 재울 순 없으니까."


동침은 파혼까지 절대 없다고 했는데,

갑작스래 합방을 요구하는 이사벨에 카를은 당황했다.


"....음, 파혼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공작님이 수, 수고하실 필요는..."

".......뭐?"


순식간에 공기가 가라앉았다.

방금까지 조금 풀려있던

이사벨의 눈에 거짓말처럼 빛이 없어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말이야, 파혼이라니?"

"어,저기 원래 2년동안만이었으니까, 1달 뒤면 저는 나가야..."


"안돼."

"...네?"

"우린 평생 같이 살거잖아? 네가 나가다니, 그런 일 따위 없어."


"아,아니, 분명 왕실요청권으로.."

"아냐,안돼, 파혼 같은 건 무효야.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그럴 수 없어."


중얼거리는 이사벨은 무슨 말을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걸 깨달아버린 카를은 이내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다물었다.


"....있잖아 카를."

"........"

"아이는 좋아해?"

"...좋아,해요"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성지식이 없는 카를로썬

파악하기 힘든 말이었다.


"오늘 밤 일단 내 방으로 와줘. 남은 얘기는 그때 마저 하자."


그렇게 말한 이사벨은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잘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진 카를은 조금 신난 채 마찬가지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카를이 억지로 범해진 후 감금되기까지 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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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안하다. 이번에도 근 3개월 가까이 걸려버렸네.

빨리빨리 속편 낼 수 있게 더 노력할게.


이사벨 눈 색깔에 대한 질문이 있던데 이사벨은 금안이고 카를이 적안이다.

적는 과정에서 오타가 발생한 것 같다.


얀챈이다보니 스토리에 후회보다 얀농도가 좀 더 짙을것같아.

내 글 봐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