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얀붕이는 바보같이 착한 성격의 귀족자제였으면 좋겠어.


귀족가문 사이의 정략혼이 잘못되었다던가, 누구라도 좋아할 사람과 결혼할 권리가 있다거나 하는 파격적인 사고방식까진 가지 못하지만, 적어도 정략혼이 맺어진 이상 '내 여자는 내가 행복하게 해주겠다!'라는 각오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은 뜨거운 상남자이기도 하지.


그런 얀붕이의 정략혼 상대는 나라 최고의 유력 가문 중 하나의 외동딸인 얀순 공녀야. 이 공녀님에 대해서는 가문 밖에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 무척 조용한 성격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소문만이 전해질 뿐이야.


얀붕이는 개인적으로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억지로 방 밖으로 끄집어내거나 사람들과 만나게 하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적어도 곧 결혼할 사이라면, 얼굴 정도는 익혀두고 대화 정돈 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있었지.


그래서 얀붕이는 약혼이 정해진 그날부터 매일같이 공작가를 찾아가 얀순 공녀와의 만남을 청했어. 물론 공작가에서도 얀붕이의 그런 행동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었지. 아니, 오히려 마음을 쉽게 잘 안 여는 예비신부를 대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먼저 공략하는 게 좋다는 얀붕이의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고나 할까.


찾아갈때마다 공작과 공작부인, 심지어는 공녀와 가까운 측근들의 취향까지 모두 파악해 최대한 싹싹하게 대하며 그들의 환심을 산 얀붕이는, 공작가에 찾아갈 때마다 모두의 환대를 받는 귀빈이 되었지.


얀붕이가 찾아갈 때마다 그를 떠들썩하게 환대해주지 않는 사람은 없었어. 오직 한사람, 얀순 공녀만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녀에 대한 소문은 허언이 아니었어. 그녀에게 약혼자로서의 장점이 있다면, 적어도 어디있는지 찾아내기는 쉽다는 것 뿐이었지. 가장 조용하고 가장 은밀한 저택의 서재, 얀순 공녀는 언제나 그곳에서 지식을 탐구하며 책에 몰두해 있었어.


독서를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아. 하지만 얀붕이는 찾아갈때마다 늘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소녀를 보며 매일 아무 말도 없이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어.


말을 걸었어. 천천히, 조금씩. 그녀는 가끔가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식으로 대답했지만, 쉽게 입을 열지는 않았지. 그래도, 의사소통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도 몰라.


진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어. 얀붕이는 얀순이가 읽고있던 책들의 제목을 외우기 시작했어. 그녀는 읽는 속도가 매우 빨랐고, 또 무척 총명했는지 아주 다양한 책들을 읽었거든. 책들의 제목을 외운 후에는 메모로 정리해 자신의 측근들 중에서 그 책들을 읽어본 사람들을 찾아 그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해서 정리하기까지 했지 뭐야.


그리고 그 내용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고 또 찾아서, 결국 얀붕이는 얀순 공녀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앞으로 어떤 책을 읽을 것이고,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대강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의 분석력을 갖추게 되었어.


얀순이는 어느 날은 얀붕이가 자기가 읽지도 않았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흥미를 느끼며 귀를 쫑긋했어. 그가 말한 책이, 마침 흥미를 느껴서 구비해뒀지만 아직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그런 책이었거든. 얀붕이는 얀순 공녀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뿌듯함을 느끼며 더 열심히 이야기했지.


어느 날에는 심지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조용히 얀붕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경우도 있었어. 엄청난 진전이었지만, 그뿐이었어. 얀순 공녀는 얀붕이의 말에는 관심을 가지는 듯 했지만,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거나 함께 대화를 이어나가진 않았지.


얀붕이는 조금 지치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어. 말을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공녀의 호감을 살 수 있을거라는 희망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어. 글쎄, 그녀가 흥미를 가질만한 이야기를 하는 기술은 어느정도 익힐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얀붕이란 사람 자체가 그녀의 호감을 사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처럼 느껴졌지.


사건은 그런 와중에 터져버리고 말았어.


얀붕이의 가문은 한순간에 몰락했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주 없을법한 일도 아니지.


삼촌 중의 하나가 적성국으로 몸을 의탁했고, 얀붕이만큼이나 정이 많았던 아버지께서는 형제와 연락을 끊지 못하시다가 그만 반역 혐의가 걸려버리고 말았지.


물론 반역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기에 멸족의 화가 닥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반역의 불씨를 제거하겠다는 의도로 온갖 트집을 잡혀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병권마저 빼앗겼어. 명문가로서의 위치는 거의 박살났고, 가문은 '당장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여버렸지.


얀붕이는 직감했어. '아 약혼은 끝장이구나.'라고.


당연하잖아. 상대는 공작가의 외동딸이야. 둘째, 셋째도 아니고 외동딸. 얀붕이네 가문이 개박살이 난건 아니지만, 풍비박산은 났다고 할 수 있지. 누가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그런 집안에 시집보내겠어? 얀붕이의 예상대로 공작가는 침묵을 지키며 혼담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던 척 하기 시작했어. 얀붕이도 이걸로 상대를 걸고 넘어져봐야 이쪽 세계에서 평판만 떨어질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지.


대신, 그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결단을 했어. 왕실에 대한 가문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후계자이자 외동아들인 그가 일선 대대장이라는 하급간부로 최전선에 나가 창과 방패를 들기로 한 거야.


공작가에서 그 결정을 듣고는 얀붕이가 못내 걱정되었는지 비밀리에 시종을 보내 정황을 묻게 했어. 약혼건에 대해서는 내쳐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의 연이 있으니, 전사의 위험이 아주 높은 초급간부 징집만은 피할 정치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제스쳐였지. 여기서 잘만 이용하면 갑옷만 입은 채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보직에서 더 높은 지위로 복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얀붕이는 정중하게 시종에게 그 제안을 거절했어.


한창 전선으로 떠나기 위한 짐을 싸고 있던 얀붕이가 평소에도 꽤 친하게 지냈던 공작가의 시종장에게 말했어.


"말씀만은 정말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이런 시기에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해주시는 게 정말 큰 위험을 무릅쓰는 것임을 압니다. 만일 전장에서 위험에 빠진다고 해도, 그 은혜와 마음만은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 그 문제가 있군요."


생각해보면 약혼은 '실질적' 파기이긴 해도 확실히 파기된 것은 아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어.


"그... 말씀좀 대신 전해주십시오. 공식적인 약혼파기에 동의한다, 라고. 저는 이미 임관 날짜가 정해진 몸입니다. 지금도 이미 조금 늦은 터라, 공작가에 직접 인사드릴 기회는 없을듯 합니다. 제가... 제가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가문 입장에서 도움이 되진 않을테고요."


"하지만 당사자끼리의 이야기는 직접 오가는 편이..."


"그것이 예의긴 하겠지요.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평소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녀도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히려 원치않는 굴레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할테니, 제 얼굴은 보지 않는 쪽을 좋아할지도요."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기-"


하지만 얀붕이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어. 이미 그를 최전선으로 데려가줄 마차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거든. 아주 간단한 짐을 꾸린 얀붕이는 가방을 등에 맨 채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가, 그만 숨이 멎어버릴 뻔했어.


마차 안에 얀순 공녀가, 어지간해선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는 얀순 공녀가 떡하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거야.


'군사운용의 기본'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이었어.


너무 놀라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얀붕이를 향해, 공녀가 생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왔어.


"초, 초, 초급간부의 생존율은, 오,오,오히려 병사보다 낮대요."


"저, 공녀님? 지금 왜 여기 계신지부터 설명을..."


"ㅇ,오,왜 거절했어요?"


"그, 무슨 말씀이신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마부, 일단 마차를 공작저로 운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우선 공녀님을 자택으로 모셔야할 것 같습니다."


"ㅁ,마부는, 야, 얀붕님 말 안들어요. 내 말, 들어요."


공녀가 있는 힘껏 말을 짜내는 듯한 괴로운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얀붕이를 꽉 붙잡았어. 얀붕이는 아직 전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알았어.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이상해. 뭔가 잘못됐다는 걸 말이야. 이 세상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야. 또, 이런 속담도 있지.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거나, 마녀의 주술에 걸린 것이다.'라는 속담이.


평소에는 말 한마디도 안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공녀가 갑자기 마차를 타고 나타나 먼저 말을 걸어온다? 그녀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잖아. 분명 사악한 흑마술이 개입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긴장감이 돋고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지.


"공녀님?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지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저도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적, 극단적 안 돼. 그, 극단적으로는 얀붕씨 죽어요. 그,그,그건 절대 허용 못해. 파,파,파기도 불가능해. 그런짓 하면 얀붕씨 죽어요. 얀붕씨 죽으면..."


그 순간, 얀붕이는 얀순 공녀의 눈에 희번덕대는 살기를 눈채치고는 몸을 움찔했어.


"나,나, 나도 죽어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아까 전의 속담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어. 사람이 갑자기 행동을 바꾸면 죽을 때가 된 거거나,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이라고 하지. 하지만, 마녀의 저주에 걸린 사람은 어차피 곧 죽게 돼. 둘은 같은 의미나 다름없는 거야.


얀순 공녀의 입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들은 이상, 얀붕이는 주저할 수가 없었어.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약한 마법, 전력 마법을 공녀의 목 뒤에 흘려보내 그녀를 기절시킨 얀붕이는, 마부가 당황해 어쩔줄 모르는 사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공녀를 들쳐업고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퇴마 전문 마법사에게 데려갔어.


얀순 공녀를 마법사에게 떠넘긴 얀붕이가 횡설수설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이분이 흑마술에 걸린 거 같습니다. 안 하던 말씀을 하시고, 안 하던 짓을 하시고, 아무튼 이상합니다. 해주해주세요. 빨리요! 귀하신 분이에요. 이분이 저주에 걸려 쓰러지시면 목 날아갈 사람이 한 둘이 아니란 말이에요!"


마법사가 척 보기에도 기절한 얀순이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 건 찌릿한 정전기마법 뿐이었어. 수염을 쓰다듬던 마법사가 얀붕이를 돌아보며 물었어.


"그... 그 흑마술이라는게 설마 감전마법인가?"


"예? 아뇨. 그건 제가 쓴건데요. 저주에 걸린 사람을 안전하게 데려오려면 기절시키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건 맞긴 하지만... 그것 외에는 이분에게 마법이 쓰인 흔적 자체가 아무것도 없단 말일세.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원."


"예? 그럴리가 없습니다! 제 말 좀 잘 들어보십쇼!"


결국 얀붕이는 자기가 전선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마법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죄다 설명하기 시작했어. 얀순 공녀와의 약혼,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했던 노력, 어쩔 수 없던 약혼 파기, 그리고 오늘의 일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마법사가 고개를 갸우뚱했어.


"그냥 이 아가씨가 자네에게 숨겨뒀던 호감이 있던 건 아니고?"


"예? 바보이십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그러십니까? 만약 그랬다면 제게 단 한 마디도 안했을리가요!"


"언어장애를 앓고 있어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을 뿐일지도 모르잖나. 마차 안에서도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다며? 오히려 말을 꺼내기 힘든데도 애써 입을 열며 말한 것을 보면 의지와 애정이 대단한 것 아닌가 싶은데."


"그건 분명 저주의 영향 때문에 말을 더듬거린 걸겁니다. 고통스러운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걸 제가 봤어요!"


"아니 그야 말을 하기 힘든 지병이 있으면 더듬거리면서 말하더라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겠지."


"왜 자꾸 그런식으로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마법사님까지 속일만한 강력한 저주인가봅니다. 빨리 다시 검사해보세요! 정말 바보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보다 훨씬 고귀한 분을 기절까지 시켜서 들쳐업고 온 제가 뭐가 됩니까?"


"뭐가 되긴 뭐가 돼. 자네야 말로 세상 최고의 바보가 되는 거지."


얀붕이가 할 말을 잃고 마법사를 노려보고 있던 그 때였어. 얼마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던 공녀가 슬며시 손을 들어올려 얀붕이의 소매를 붙잡았어.


얀붕이는 깜짝 놀라 얀순 공녀를 내려다보았지. 그녀는 여전히 말을 꺼내기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고 있었어.


"그, 그, 그 말 맞아요. 얀붕씨, 세상 최고 바보에요."


"예, 예?"


"그런 바,바, 바보, 전쟁터 나가면 민폐. 나라에 미,민폐. 도움도 안되는 마이너스."


갑자기 더듬더듬 들이닥친 매도에 얀붕이가 멍하니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얀순 공녀가 찌푸린 표정을 풀고 싱긋, 미소를 지었어.


"다, 당신 같은 바,바보가 플러스일 수 있는 곳, 오직 ㅇ,여기 뿐. ㄴ,내, 내 옆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