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건배~!"


애써 활기찬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지만 잔을 들어올리는 시늉이라도 하는 건 명문가 소속인 남궁세아와 남궁세영, 그리고 황녀님 정도였다.


마희영은 텅 비어버린 새빨간 눈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고 있었고, 수연 사저는 내 제안은 들어줄 생각이 요만치도 없다는 듯 손톱이나 살피고 있었다.


'...좆됐네.'


술잔을 단번에 비운다. 화끈한 고량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속을 괴롭히지만, 취기로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으리란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지난 5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갑작스레 전조도 없이 나타난 혈교를 무찌르기 위해 마교와 무림맹이 손을 잡아 '정-마 동맹'이라는 무림 역사에 남을만한 조직이 탄생하기도 했고, 혈교의 테러에 당한 황실이 '관무불가침'을 깨고 삼황녀인 주은수 황녀님을 파견보냈으니.


물론 황녀님도 이런저런 사건 끝에 내 하렘 아닌 하렘에 합류하였고, 무사히 혈마를 무찌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모두의 눈치를 살핀다. 잔에 손도 대지 않은 마희영이나 수연 사저는 물론, 잔을 비운 남궁세아나 세영, 은수도 그닥 표정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명문가 출신인 탓에 몸에 새겨진 예의를 따른 것 뿐이지, 혈마를 무찌른 기념으로 열린 술자리의 흥을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인다.


'....속 쓰려.'


탈칵-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은 은수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창월검제(蒼月劍帝). 아내로 맞는 건 누구인가?"


'...올 게 왔다.'


여태껏 연애 방면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천치인 척 하고 있었지만, 하렘에 속한 모두와 최소한 입을 맞추는 정도의 진도까지는 나간 상태였다.


바꿔 말하자면, 그 누구에게도 확답을 주지 않은 채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아내라니요. 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흠. 총각이 결혼할 생각도 없이 이토록 많은 여자들에게 입을 맞추고 하는 건 창남이나 하는 짓 아닌가."


호르륵-


잔에 담겨 있는 고량주가 차라도 된 양 홀짝이던 황녀님이 신랄하게 나를 꼬집었고,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 그러니까 남녀역전의 무협세계에서는 원래 세계의 여자에게 요구되던 정조 관념을 그대로 남자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역하렘을 꿈꾸면서 남자를 후리고 다니는 치녀에 해당되겠지.


그렇지만,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


남녀역전 세계의 하렘, 어떻게 참냐고...


"...저는, 모두가 소중합니다."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엄숙한 분위기로 말했다. 눈꺼풀을 조금 파르르, 하고 떨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별처럼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쏟아지는 시대이자 은둔해있던 고수들도 의와 협을 위하여 검을 뽑고 나서는 새로운 시대, 하늘의 시대. 


그리고 그 하늘의 시대를 이끄는 선두이자 현경의 고수이며 마교의 교주와 천하제일인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자. 


그것이 바로 나, 창천검제(蒼月劍帝) 강은기.


그리고 현경에 들어선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극한의 신체 연기를 백분 활용한다.


"어느 누구를 고르라는 일은 너무나 가혹한 일입니다.."


"하아아..."

"쯧..."


순간 방 안에 차가운 공기가 불어닥치듯, 싸늘한 하나의 흐름이 지나간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모두가 내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마음에 완전히 들지는 않지만 나름의 대답을 얻었다는 듯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성공인가?'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여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제일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남궁세영이었다.


"봐. 미리 독 타놓기 잘했지?"


"...에?"


"음. 이 남자가 이렇게 쓰레기일 줄은 몰랐기에 반대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대의 판단이 옳았군."


황녀님이 자신의 실책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세영의 말에 호응했다. 아니, 그보다 독이라고?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하나의 가능성. 여태껏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 가능성.


'...다 알고 있었다고?'


물 밑에서 하렘을 만들고 있던 내 헛짓거리들을 여기 모인 모두가 알고 있을 가능성.


"하아... 나는 분명히 말했어, 사제. 내 물건이 된다면 보호해줄 의향은 있다고."


여태껏 무관심한 척 손톱을 살피고 있던 사저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희영은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한 마리의 사냥개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네 수작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어. 다만 마지막에 자신이 선택받으리란 것을 모두가 믿었기 때문에 별 말 안했던 거지."


잔을 내려놓고 나서는 침묵을 지키던 남궁세영도 때가 되었다는 듯 의자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5년 사이 더욱 커진 가슴이 출렁이며 순간적으로 내 시선을 앗아갔지만, 지금은 거기에 넋이 팔릴 때가 아니었다.


"....근데 왜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가요."


드르륵-


나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뒤로 빼며 태연하게 모두에게 물었다. 남궁세영의 쌍둥이 동생, 남궁세아와 심지어 황녀님까지도 내 주변을 포위하듯 서있었다.


'....진짜 위험한데.'


이쪽 세계에서 남자에 대한 취급은 원래 세계에서의 여자에 대한 취급보다 심했다. 그곳에서는 여자가 아이도 낳고, 남자에 비해 일반적으로 몸도 약하니 보호를 해주는 경향이었다면, 아이도 낳지 않고 여자에 비해 몸도 튼튼한 남자에 대한 취급이 좀 더 강압적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 상황은 역하렘인데 주인공에 대한 취급이 좀 심한, 19금이 허용되는 쪽의 역하렘 주인공이나 다름 없다는 이야기.


결정을 내린 이상 행동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발을 의자 옆으로 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동시에 내공을 움직여-


풀썩-


"으에?"


"음. 독이 잘 들었군."


'...말도 안 돼.'


현경에 들어선 몸은 완전한 만독불침까지는 아니더라도, 혈교에서 사용하는 지독한 시독(屍毒)까지는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다. 그런 몸이 고작 먹는 독에 무력화가 된다고?


"혈마 잡을 때 쓰던 거랑 같은 걸 천산에서 가져왔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방으로 가면 안 될까?"


뼈다귀를 앞에 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마희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모두에게 말했고, 이 자리에서 제일 고귀한 핏줄인 황녀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산공독과 마비독이라. 결과는 꽤나 만족스럽다만, 아직 부족하지 않겠는가."


"제가 그럴 줄 알고 챙겨놓은 게 있답니다~"


남궁세아가 빙긋 미소지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바닥에 엎어진 채 눈만 이리저리 굴리던 나는 그녀의 소매에서 나오는 작은 유리병의 내용물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이 시대의 독극물 중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사천당가에서 제조한 것들이다. 혈교와의 전쟁을 거치며 내 조언을 받아들인 사천당가는 독의 강도만 아니라 순도, 보관법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현대식의 일회용 주사기와 밀봉 유리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독은 잘 정제되어 선명한 보라색이나 초록색을 띄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저 유리병 안에 담긴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얼마나 많은 독을 섞고 또 압축시켰는지 보라색이나 초록색이 아니라 시커먼 색을 띄고 있었고, 고체처럼 걸쭉하여 주사기를 여러 번 당겨야만 할 정도로 질척하기 짝이 없는 극독....


이 아니라, 잠깐만. 


"설마 그거 저한테 놓으려는 건 아니죠? 잠깐만요, 잠깐만!"


"후후, 오라버니. 그러니까 한 명을 고르셨어야죠."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 몸을 가볍게 뒤집은 세아가 망설임 없이 팔뚝의 핏줄에 주사기를 꽂아넣었다.


"자아~ 따끔!"


"자, 잠깐만.. 그거 거기다 꽂으면 안 돼애..."


팔뚝을 타고 무언가가 온 몸으로 흘러간다. 멈출 새도 없이 주사기의 내용물을 모두 내 몸안에 집어넣은 세아는 쿡쿡 웃으며 주사기를 뽑아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침대로 갈까요?"


"하아...."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수연 사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먼저 방을 나섰고, 그녀를 따라 다들 별 말 없이 방을 나서 침실로 향했다. 이중에서 그나마 키가 제일 큰 세아가 나를 짐짝 들쳐매듯 어깨에 업었다.


약이 돌기 전에 얼른 머리를 돌려 나를 구해줄 사람을 찾아보지만 답은 절망적이었다. 


무림맹의 본진 한구석에 있는, 새로 지은 자그마한 저택. 혈마를 무찔러 축제 분위기에 빠져있는 무림의 사람들이 이곳을 갑자기 찾아올리도 없고, 설령 찾아온다고 해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막아줄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못 본 척, 못 들은 척을 하면 했지..


이런 내 생각을 꿰뚫고 있다는 듯, 나를 덜렁 덜렁 매고 가던 세아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도망칠 수 없답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맹세했거든요. 오라버니가 '아무도 고르지 않는다' 내지는 '모두를 고른다'는 선택을 한다면 그 소원대로 모두의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걸."


"후우... 일처다부제는 몰라도, 일부다처제를 노린다니. 자네의 정조 관습은 어딘가 꼬인 게 아닐까 싶네."


세아의 옆을 따라 걷던 황녀님이 한 마디를 거들었지만, 슬슬 침실이 가까워지는 탓에 별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약이 도는 것인지, 슬슬 몸이 화끈거린다. 등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심장이 시끄럽게 날뛴다. 


일찍이 지나가버린 사춘기 이후로 이토록 강렬한 성적 욕구를 느낀 적이 있던가.


다행히 세아의 등에 업힌 채 물건을 세우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침실에 도착했고, 세아는 짐을 내던지듯 나를 침대에 내던졌다. 이 시대의 물건이 맞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푹신한 침대가 몸을 받아내준 덕에 허리를 다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몸을 움직여 겨우 모두를 둘러볼 수 있게 돌아 누웠지만, 오히려 머리를 침대에 파묻고 있는 편이 나았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모두의 질척하기 짝이 없는 시선.


마희영은 이제는 감출 생각이 없는지, 헐떡이는 짐승처럼 숨을 마구 몰아내쉬고 있었다. 천살성의 상징, 새빨갛게 빛나는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내 목을 물어뜯고 나를 탐하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제왕성의 주인, 남궁세영도 마찬가지였다.


늘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녀도 마희영과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욕망이 향하는 방향은 희영과는 정반대였다. 희영이 원하는 것은 서로의 목을 물어뜯고, 탐하고, 서로를 덧칠하는 것이라면 세영은 나를 온전히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려는 생각이었으니까.


쌍둥이라는 것을 드러내듯, 남궁세아 역시 그러한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세영은 나를 몸도 마음도 굴복시키겠다는 눈빛이었다면, 세아는 내 몸을 굴복시키면 마음은 알아서 따라오리라는 눈빛이었으니까.


여태껏 한숨을 내쉬며 소극적이었던 소연 사저도 막상 잔뜩 흐트러진 채 침대 위에 내팽겨진 나를 보자 욕구가 동하는 듯, 질척하기 그지 없는 시선을 숨기지도 않고 있었다. 세아의 시선과 비슷했지만, 더 질척하고 잔인한 욕망을 담고 있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나마 정상인이라고 믿고 있는 주 황녀님을 간절한 눈빛을 담아 바라봤지만, 누가 그랬던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더 아프다고.


황실에서 후계자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무술에만 한창 매진하다가 이제 갓 성년이 된 그녀의 시선은 다른 이들의 것처럼 잔혹하고 질척이지는 않았지만 그 뜨거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청소년기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미숙한 성인의 끝을 모를 성욕이 물씬 드러나는, 뜨거우면서도 어딘가 수치심과 어색함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 그럼에도 내게서 눈을 뗄 생각이 없는 눈빛.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자아. 그러면 잊지 못할 밤을 시작해볼까."


이윽고 때가 무르익었다는 듯 내뱉은 주 황녀님의 말대로, 내게 잊지 못할 밤이 시작되었다.


*


"다들 그대의 처음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탓에 순서는 제비뽑기로 정해놨다네."


"황녀님. 이제 완전히 뿅 간 것 같은데 그냥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머리는 멍해졌지만, 몸의 감각은 오히려 예민해졌다. 몸을 가리고 있던 의복은 나름 고급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눈 앞의 광경에 잔뜩 흥분해버린 여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방 구석을 구르고 있었다.


"음. 그러면 실례하지."


그녀 역시도 잔뜩 흥분했는지, 주 황녀는 조금씩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었다. 모두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침대를 미리 마련해놓은 덕에 모두가 나를 빙 둘러 앉을 수 있었다.


"....으웃."


주 황녀는 망설임 없이 내 물건을 질척하게 젖은 자신의 안에 밀어넣었다. 처음임에도 거부감 없이 들어가는 물건이 어딘가에 닿고 나서야 주 황녀는 멈췄던 숨을 몰아 내쉴 수 있었다.


"헉, 허억, 헉..."


"어, 어떠신가요..."


모두가 긴장했던 순간이 지나고, 세아가 미지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품은 채 주 황녀에게 파과의 소감을 물었다. 원래의 세계라면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 여성의 처음임에도 남녀역전의 세계에서는 처녀를 잃는다는 건 오히려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별 거 아니군..."


주 황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나름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녀가 입으로 내뱉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


약을 맞은 탓일까, 쉴새 없이 두근거리는 은기의 물건은 닿아서는 안 되는 곳까지 닿고 있었다. 첫 경험에 대한 나름의 이상을 품고 있던 주 황녀로서는 갑자기 쏟아지는 이 쾌락과 미약한 아픔에 어쩔 줄 모른 채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를 깨운 것은 은기의 나지막한 신음이었다.


"으, 으우웃..."


이제는 공기조차 따끔거릴 정도로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은 여성의 뜨거우면서도 질척한 점막에 환희의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 세상에 넘어오고 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쾌락에 그 역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으며,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곱고 단정하던 입술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그의 비이성적인 모습이 주 황녀에게는 제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되었다.


"...후, 후웃-"


허리를 움직인다. 천천히 그의 물건을 뽑아내듯이 엉덩이를 위로 들어올렸다가, 내려찍는다. 척추를 타고 쾌락이 번개처럼 내지르지만, 자신의 밑에 깔린 은기의 격정적인 비명이 쾌락을 잠재운다.


"아, 안돼애.. 황녀님, 잠시만-!"


"후, 후욱, 훗-♡"


허리를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그 때마다 은기가 신음을 흘린다. 목 너머로 신음을 억누르려 하다가도 자신이 주는 쾌락에 짓눌려 잔뜩 비틀린 신음을 내지른다. 


팡- 팡- 팡-


"하웁-"


허리를 움직이며 그의 입술을 탐한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안타깝기는 커녕 성욕을 자극시킨다. 


'아아...'


그와 혀를 섞으며 주은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돌아갈 수 없다고.


자신이 황궁을 나와 처음 만난 남자. 함께 밤거리를 거닐며 무술 밖에 모르던 자신의 말을 웃으며 들어주던 남자. 뭇 여성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잘 생겼지만 스스로는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듯 굴던 남자. 


그 모두가 거짓이었다. 자신을 다른 여자들처럼 어장에 집어넣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관 없었다. 활화산처럼 터져버린, 끓어오르는 성욕 앞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 남자를 범한다. 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 방 안에 있는 여자들도 이 남자를 안겠지만, 상관없다.


이 남자가 울먹이는 걸 보고 싶다. 넘쳐나는 쾌락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에게 굴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이렇게 매력적인 남자가 스스로의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자신의 밑에 깔려 신음하는 것을 본다면 이 세상의 누구나 그리 생각할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몸의 끄트머리에서 쾌락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여태껏 느끼던 평범한 쾌락과는 궤를 달리하는 쾌락. 항아리를 채우는 샘물처럼, 언젠가 항아리를 가득 채워 상상도 못한 쾌락을 줄 것이 분명한 종류의 쾌락.


주 황녀는 허리를 더욱 바삐 움직였다. 자신의 밑에 깔린 은기는 이미 자신의 안에 몇 번이고 토정했지만, 남자가 토정하는 것 정도는 성관계 중에는 쉬이 있는 일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는 질척해져버린 남녀의 연결부에서 음란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물보다 진득한 액체가 은기와 자신의 몸을 이었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방 안에 있는 모두도 숨을 죽인 채 음란한 결합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윽고 황녀는 갑작스레 찾아온 엄청난 쾌락의 파도에 허리를 잔뜩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아흑, 아흐읏-♡"


"크으윽-!"


그녀가 가면서 질내를 잔뜩 쥐어짠 탓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안에 사정한 은기는 주 황녀가 기절하듯 옆으로 쓰러져 눕자 잠깐이나마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눈빛이 사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우~ 내 차례네, 사제."


수연 사저는 몸에 달라붙는 옷을 찢듯이 내벗고는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를 약들을 하나하나씩 주사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보라색, 초록색을 띄고 있던 약들은 주사기 안에서 섞여 진득하고 잔인한 검은 색을 띄기 시작했다.


"걱정마, 사제. 고작해봐야 오감이 100배 예민해지고, 성적인 감도는 300배 정도 올라가는 것 뿐이니까."


약물을 다 섞은 수연 사저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주사기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몸을 비틀어 그녀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어느 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이 내 몸을 꾹 눌러 고정시킨 탓에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자아~ 들어갑니다~"


약물이 또 혈관을 타고 흐른다. 몸이 점점 예민해진다. 이제는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아하핫~♡ 맛이 가버렸네, 완전. 뭐, 나야 좋지."


잠시라도 쉬는 것을 못 봐주겠다는 듯 점막이 내 성기를 덮쳐온다. 형언할 수 없는 쾌락에 몸을 비틀며 괴성을 내질렀지만, 온몸을 누르는 손과 어느 새 입을 덥쳐오는 누군가의 혀 탓에 전신의 자유를 빼앗긴다.


"하웁- 헤웁-♡"


'...아.'


슬슬 무리다. 머리가 멍해진다.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쾌락에 머리가 마구 돌아가지만, 과속한 마차처럼 가로수에 쳐박는 느낌 밖에 안 난다. 


이건 쾌락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남궁세영은 허리를 내리찍으며 과연 몇 바퀴나 돈 것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그것이 쓸모없는 생각임을 깨닫고 허리나 마저 움직였다.


은기는 평범한 남자라면 이제 메말라 복상사를 걱정해야 할 수준으로 사정했지만, 현경에 다다른 그의 육신은 그러한 어이없는 죽음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정자를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을 탐한다.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그의 턱을 붙잡고 자신의 혀를 집어넣는다. 그의 혀가 잠깐 움찔거리더니 그녀의 혀를 휘감아온다. 


몇 시진이 지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바깥에 해가 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관 없었다. 중원 온 곳이 혈마를 무찌른 평화에 젖어 밤새 마시고 취했을 테니까.


그리고 눈 앞의 이 남자도 취하긴 했다. 술이 아니라 약물에 취했지만.


처음에는 나름대로 반항도 하고, 도리질도 하던 은기는 어느 순간부터 반응을 잃었고, 점점 그녀들이 주는 쾌락에 매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도 아니지.'


간밤에 그에게 집어넣은 약물의 양으로만 따져도 명문세가 하나 정도는 전원 독살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성이 날아가버리고 쾌락만 찾는 몸이 되어버렸어도 이상할 일은 없었다.


이제 그의 몸에는 입술을 맞춘 자국이나 이빨 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고, 눈물이나 침을 흘린 자국은 말라붙어 더욱 그녀의 성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여자들도 이제는 자신을 제외하고 전원 지쳐 드러누워 자고 있었지만, 그녀는 적어도 세 발 정도는 더 착정할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이끄는 별, 제왕성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 스스로도 여기에서 만족하고 멈출 생각은 일절 없었기 때문에.


'이건 경쟁이야.'


은기는 이대로 모두의 것이 된 채 평생 구속되어 살아가는 것은 확정이었다. 


문제는 모두의 것이라고 한들 각자 비중이 다르리라는 것.


이제는 마교를 이끄는 교주가 된 마희영이나, 삼녀이긴 해도 황가의 정당한 계승권을 지닌 주은수는 자신과 세아, 그리고 수연처럼 그에게 딱 달라붙어 있을 수 없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들로부터 그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도망친다.'


어디로든 상관없었다. 붙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찬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시간. 


아무도 몰래 혈마의 연구자료를 손에 넣은 그녀가 은기에게 벗겨낼 수 없는 주박을 남길 때까지의 시간. 그것이 그녀가 필요로 하는 전부였다.


"흐후훗♡"


음흉한 웃음을 흘린 남궁세영은 이윽고 은기의 사정과 함께 찾아온 가벼운 절정에 몸을 한 번 떨었다. 그러나 숨을 고른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다시 허리를 흔들었고, 이제는 정신이 완전히 날아가버린 은기는 그녀의 밑에 깔린 채 간헐적으로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아니, 이제 휴식이니 절정이니 하는 것들은 그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제 그의 삶에 남은 것은 여자들에게 쥐어짜이는 삶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