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내 이름은 강은기. 불행하게도 무협세계에 떨어져버린 현대인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남녀역전 무협세계였지만.


평범한 무협지물로 따지자면 내 위치는 후지기수들 중 으뜸을 두고 다투는 '용봉' 중에서 '검봉' 정도 될 것이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검룡의 칭호를 땄으니까.


다행히 키나 외모로 남자가 평가받는 건 이쪽 세상도 마찬가지라 이 몸의 뛰어난 외모 덕에 이런저런 좋은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성 내에 퍼지자마자 이토록 사람이 몰리는 것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음음.


"강대협의 미모 덕인지 사람들이 꽤나 몰리는 것 같습니다."


은근슬쩍 달라붙으며 가슴골을 노출하는 제갈세가 가주의 둘째딸로부터 애써 눈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원래 무협지에서도 유독 여자한테만 엄격한 정조 의식이 요구되듯, 이쪽 세계에서도 남자가 여자의 몸을 함부로 훔쳐보는 것은 자칫하면 정조정신을 의심받을 수 있는 일이다.


'본래 세계로 치면 여자가 남자의 양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훔쳐보는 일처럼 취급받으니까.'


다행히도 난데없이 스무살의 몸에 빙의되는 게 아니라 화산파에 맡겨진 갓난아기 시절부터 이쪽 세계에서 살아온 덕에 그런 쪽 지식이 부족하지는 않다. 


허공을 바라보며 1초, 2초.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짓는다.


"그렇습니다, 소저."


시선을 자연스레 떨어뜨리는 척하면서 가슴골을 슬쩍 훔쳐본다. 저 사이에 나무꾼이 도끼를 떨어뜨리면 산신령님도 '이건 못 찾는단다'라며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올 것 같은 경이로운 계곡.


'....진짜 장난 아니네.'


이 남자에게 수상할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는 세계에서 살아온지 어연 20년. 이 정도 기술은 익히는 게 당연하다.


얼핏 봐도 G컵은 가볍게 넘길 것만 같은 그녀의 가슴에서 시선을 돌려 은근히 모여든 사람들 쪽을 쳐다본다.


부잣집 규수 같은 여성분들이 네다섯, 얼굴을 붉히고 있는 30대 누님들도 네다섯, 그리고 완전히 대상에서 벗어난 아주머니들이 열명 정도. 


"...크흠."


아주머니들의 맹렬한 시선에 보이지 않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원래 세계로 치면은 당대의 '검봉'을 보러온 할 일 없는 백수 호사가 아저씨들. 그런 사람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는 뻔한 일이다.


"...물건이..."

"침대에서는 어떨지....."


'다 들린다고요, 아주머니들.'


마음 같아서는 가서 성희롱하지 마세요! 하고 외치고 싶지만, 이런 음담패설은 오히려 못 들은 척하는 편이 낫다.


검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이상 무림맹에서 인정한 후기지수이자 공인이 되는 법이고, 그런 명함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존중하기는 커녕 약점을 못잡아서 안달이니깐.


지금 내가 가서 아주머니들에게 화를 낸다고 해도,


'것참, 성깔 있구만! 침대에서도 그런지 한 번 볼까?' 하고 후안무치하게 나를 성추행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물론 그런 수준이 되면은 옆에 있는 제갈세가의 둘째 따님이 해결해주시겠지만,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건 되도록 지양하는 게 좋다.


"....흠."


아주머니들의 음담을 들은 제갈세가의 둘째 따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갈 소저."


"...무림인이었다면 저런 이야기를 입에 감히 올릴 수도 없었을텐데요."


둘째 따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자리를 벗어나도록 하죠. 대협께서도 보는 눈이 많으면 불편하실 것 아닙니까."


"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


"됐으니까, 따라오시지요."


제갈 소저는 내 오른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손은 검수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부드러웠다. 아마 주요인물에게 주어지는 보정, 그런 거겠지.


'....진짜 꼴사납다니까.'


남녀역전의 세계. 바꿔말하자면 무협 클리셰 중에서 여자가 하는 반응을 남자가 그대로 따라해야하는 세계. 


나는 내 손을 잡아당기는 160cm의 제갈 소저의 손에 질질 끌려 종종 걸음으로 저자거리를 벗어났다.


160cm짜리 여자의 손에 끌려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는 180cm 성인 남성이라. 진짜 꼴사납네.


*


일단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지금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소저의 이름도 모른다.


용봉지회가 마무리되고 화산파에 겨우 돌아왔는데 스승님이 냅다 '한중에 다녀오거라'라며 쫓겨났으니까.


'아니, 스승님! 무슨 일로 다녀오라는 건지는 알려주셔야하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이놈아! 너는 장가 안 갈 생각이냐!'


그리고 한중에 들어오자마자 구렁이가 담 넘듯이 이름도 모르는 제갈가주님의 둘째 따님과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조신한 남자로 이미지 작업을 해놓은 덕분인지, 스승님은 시간만 나면은 내게 약혼이니 혼인이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곤 하셨다. 그 때마다 내가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탓에 부글부글 끓던 스승님의 조바심이 임계치를 넘은 것이겠지.


물론 내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남녀역전 세계에서 스무 살에 결혼하라고?'


적어도 이 세계에서 결혼은 볼 장 다 보고, 할 거 다하고 나서야 생각해볼 일이다...


라는 생각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은기."


"넵."


"왜, 둘이 있어?"


의식을 잃은 제갈소저를 벽에 대충 내던진 그녀, 마희영은 눈을 시뻘겋게 빛내며 나를 천천히 벽으로 몰아넣었다. 제갈소저보다는 살짝 큰 165cm 정도의 그녀였으나,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기는 그녀를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착각입니다, 소저. 스승님께서 이리로 보내셨는데, 어느새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은기. 너는 내 거야."


"본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나는 양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어깨 정도까지 올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명백한 항복의 의지와 함께 강경한 거절의 의지를 내보이는,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대처-


쾅-!


가, 아니었나보네.


순식간에 내 몸을 밀어붙여 소위 말하는 '카베동' 자세를 취한 그녀는 고개를 뚜두둑, 소리가 날 듯 비틀어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눈과 온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별도, 하늘도 인정했어. 우리는 하나라고."


"그렇게 따지면 제왕성을 지닌 남궁 소저와 저도 하나겠군요."


"..."


순간 그녀의 몸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독하고 진득한 마기가 뿜어져나온다. 


'...역시 마교의 소교주.'


스무살에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선 자신도 세간의 사람들에게 차기 천하제일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미지의 땅, 신강에서는 열여덟에 완숙한 초절정에 달한 괴물이 있었다.


언젠가 전장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던 운명이었던 둘은 그녀가 지닌 별이 내게 이끌리는 탓에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을 죽이겠다는 잔인한 운명의 별, 천살성. 


그런 그녀의 별을 잠재우고 목줄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별과 함께 밤하늘을 밝히는 달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나와 만나, 고독할 수 밖에 없는 별은 비로소 지음을 얻었으니.


'내게 집착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이 쪽은 지금 누군가에게 얽매여서 살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지.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어 지긋이 밀어내었다. 내 분명한 거부 표시에 희영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어깨를 한 번 내려다보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마 보통의 무협세계에서는 집착 특성의 로맨스 남주 같은 역할인가 보다. '넌 내거야'라고 외치며 다른 남주들의 저항을 싸그리 무시하고 들이대 생태계 혼란을 일으키는 그런 종류.


그렇지만 나는 그런 방종을 가만히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쌀쌀맞은 목소리로 그녀를 밀어내곤 제갈소저를 등에 업어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희영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 제자리에 서서 한참 내 등을 쳐다보다가 내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춘 때에 맞춰 내게 달려왔다.


"미, 미안하다, 은기. 앞으로는 이렇게 과격한 일, 절대 하지 않을테니까!"


"제가 소저의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천살성, 그래. 천살성의 탓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버렸다!"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없으니 천살성이 내 말을 듣지 않더구나. 봐라, 지금도..."


허둥지둥대며 자신의 온 몸으로 억울함을 표시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이럴 때는 열여덟살 소녀답단 말이지.


"알겠습니다, 소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여기서 부드러운 미소 한 번. 


"....."


미소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희영은 얼굴을 벚꽃처럼 부드러운 분홍으로 물들인 채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저,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 아니다!"


희영은 고개를 돌려 팔꿈치로 얼굴을 가린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벌하던 마교의 소교주의 모습은 어디가고 내 살인미소에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아가씨만 남아 있었다.


'...성공.'


그리고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


이 세상은 기묘할 정도로 미녀들이 넘쳐났다. 현실의 무협지에서도 산적들은 거지꼴로 묘사하는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이 산적은 물론이고 개방의 거지들도 잘 씻기면은 현실 모델들 뺨칠 정도의 미녀였다.


그래서 한 때는 진짜로 몸을 막 굴릴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고쳐먹은지 오래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하렘'.


하나의 꽃을 노리는 꿀벌들에게 꿀을 줄 듯, 주지 않을 듯 이리저리 애태우면서도 그들이 떨어지지 못하게 알게 모르게 그들을 칭칭 묶어놓는. 그래서 그들 모두가 하렘이라는 결말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는 상황.


스르릉-


그것도 목 앞에 겨눠지는 검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지만.


"그래서? 희영이 그 녀석과 데이트를 했다고?"


"...데이트가 아니라 제갈 소저를 모셔다 드리는 걸 같이 했을 뿐입니다, 남궁 소저."


"너나 그렇겠지. 그 음흉한 녀석은 전혀 다른 생각이었을 거란 말이야."


나는 아하하, 하고 어설픈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눈 앞의 여자는 그게 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검을 내 목에 스치듯 내질렀다.


거유를 넘어서 폭유 수준이던 제갈세가의 둘째 따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마음의 풍요로움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정도의 가슴. 그리고 그 가슴 위로 흘러내리는, 파도처럼 상쾌하면서도 제멋대로인 남궁세가 특유의 푸른 머리카락. 


용봉지회 때 만나고 난 뒤로 난데없이 '수련'을 하겠다며 화산파에 죽치고 있는 골칫거리 손님이자, 스스로가 내 주인임을 주장하는 여자들 중 하나.


사악-


"내가 진짜 너 팔다리 잘라서 가둬야겠어?"


남궁세가 특유의 싸늘하게 식은 파란색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바짝 굳은 채로 어설픈 미소를 계속 흘렸다.


"농이 과하십니다, 소저."


"농 아닌데. 왜 자꾸 돌아다니려는거야? 너는 내거라니까."


"늘 말씀드리듯, 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나는 목 왼쪽에 겨눠진 검을 피해 오른쪽으로 슬금슬금 걸어나왔지만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내가 움직이는 대로 검을 따라 움직였다.


"있잖아. 네가 그렇게 마음을 정하지 않고 돌아다닐수록 너에 대한 처우만 나빠지는 거라니깐."


"검룡이니까 검봉이랑 짝을 짓는 게 맞다는 거에는 동의를 전혀 못하겠습니다만."


"그래서?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 그런거야?"


나는 여차하면 튈 생각으로 문 옆에 서서 문고리를 살짝 붙잡았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악수였는지, 남궁세영은 발을 한 걸음 앞으로 옮기며 단도를 뽑아 문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박아넣었다.


"오늘 대답을 들어야겠어."


"소저. 검룡에게 자신과 혼인하라며 겁박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 어찌 하시려고-"


"지금 겁탈하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는데. 왜, 겁박당했다는 소문 대신 겁탈했다는 소문 퍼지게 해줄까?"


'어, 저야 좋습니다만.'


나는 쾌재를 부르는 마음 속의 나를 발로 뻥 차 어딘가로 날려보내곤 표정 연기에 몰두했다. 지금 나는 정조를 중요시하면서도 무자각하게 남자들을 홀리는, 로맨스 소설의 여주를 연기해야한다.


"대 남궁세가의 장녀께서 하실 말씀으로는 옳지 못한 것 같군요. 이만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쾅-!


남궁세영이 재차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며 진각을 밟는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가공할 정도의 내공이 솟구쳐 올라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어라?'


무언가 잘못되었다, 는 직감과 함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방울 뚝 흘러 떨어진다.


여기서 이대로 붙잡혀서 정조를 잃어버리는 것도 나름 오예지만, 그랬다가는 여태껏 잔뜩 쌓아놓은 업보들이 안 좋은 방향으로 터지게 된다. 


당장 마희영만 하더라도 그 소식을 들었다가는-


'그대로 신강으로 돌아가 전쟁을 준비하겠지.'


그리고 중원은 적어도 20년 내에는 전례 없던 수준의 정마 전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건 나는 물론이고 중원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지독할 수준의 비극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머리를 굴리던 와중, 등 뒤에 있던 문이 덜컥 열린다. 그리고 그 틈새로 나온 손이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나를 방 밖으로 끌어내주었다.


"정말이지, 오라버니. 언니를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등 뒤에 형언하기 어려운 여체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은근슬쩍 쇄골을 가로지르는 팔이 몸을 꼭 끌어안는다. 


"....세아? 다행이다. 좋은 타이밍이었어."


"후후. 갑자기 내공이 느껴지길래 얼른 달려왔죠."


"네 년. 그 손 놓아라."


문에 박힌 단검을 회수한 세영은 이를 으득 갈며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 남궁세아를 노려보며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는 악의를 감출 생각도 없는 듯, 흉흉하게 불타오르는 푸른색 검기가 검 위를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베에~ 싫은 걸. 언니는 너무 폭력적이라서 문제란 말이지."


세아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귀여운 척을 했지만, 그게 오히려 세영의 부아를 치밀어오르게 한 것 같았다.


"됐다. 일단 네 년부터 베고 시작해야겠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세아는 말은 그리 하면서 은근슬쩍 내 몸을 더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세영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의 신체부위를 은근슬쩍 매만지면서 자연스럽게 성추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그녀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그녀의 손을 피하는 척을 했다. 


희영이나 세영이 집착과 맹공이라면, 세아는 음흉함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걸 그녀에게만 '비밀'이라는 걸로 털어놓자 '조력자'를 자처하며 나선 그녀였지만, 사실 그 속은 나를 도와주는 착하고 순수한 동생인 척하다가 순식간에 내 위에 올라탈 생각이 가득한 음흉한 여우다.


그리고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언니에게 비밀을 알리겠다'는 그녀의 협박에 당해주는 척하면서 그녀와 은근하고 배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지금 그녀는 스스로가 나를 잡아먹는 거미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벗어날 수 없는 관계의 고리로 그녀를 얽매는 것. 어느 새 그녀가 내게 안달나게 만드는 것. 그녀와 내가 지키던 비밀을 공유하는 다른 누군가를 만듦으로써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까지.


이미 나는 그녀의 두 수 앞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세아와 세영의 다툼 속에서, 나는 둘 중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그래서, 사제. 그 계획은 잘 되어가는 중이야?"


푸흡-


남궁가의 자매들로부터 도망쳐 내 방에서 겨우 얻은 평온도 잠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넘치는 쾌활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차를 뿜을 수 밖에 없었다.


"커흐, 커헉! 사, 사저.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울 귀여운 사제가 화산으로 바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지."


'패착이다.'


적어도 이 정신 나간 여자가 이 시간에 화산에 존재하는 건 내 계획에 없는 일이다.


"후후, 우리 사제. 아직도 그 귀여운 계획을 굴리고 있구나?"


"....으음."


나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차만 계속 홀짝였다. 사저는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가슴팍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트윈테일의 핑크색 머리카락. 그리고 과감하게 몸에 짝 달라붙는 옷과 그걸로도 만족 못했다는 듯 이곳 저곳 트임이 들어가있는, 정신나간 옷. 


축 처진 눈매에 늘 웃음이 머금어져 있어 행복한 여우 같은 얼굴이지만, 속에 들어가 있는 건 사천당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한 독사 덩어리들이다.


"말했잖아, 사제. 그런 갸날프고 우스운 계획 때려치우라고."


"사저. 제 일에 대해서는 참견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우후후, 여전히 차갑구나."


장수연. 현 화산파의 장문인의 외동딸이자 내 사저. 


그리고 내 속내를 알고있는 유일한 인물.


물론 내 성씨인 장씨는 고아였던 내게 아무 성이나 가져다가 붙인 것인 반면, 그녀의 성씨는 장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내 친누나라든가 하는 끔찍한 일은 없다.


"말했잖니. 내게 오면은 나 혼자서도 네 성욕을 풀어줄 수 있다고."


"싫습니다. 누굴 성욕 하나 주체 못하는 바보로 아십니까."


"후후, 어릴 때는 그랬지 않니. 덕분에 누구의 성취향도 비틀어버려놓고는."


'제가 그런 적 없습니다만.'


내게 가져다 준다고 몰래 구했던 책에서 잘못된 성지식을 배운 탓에 취향이 비틀린거지. 강압적이고 모욕적인 쪽으로.


나는 입을 꾹 닫은 채 차만 계속 홀짝였다.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이 우습다는 듯 입을 가리곤 다시 쿡쿡 웃었다.


"어릴 적에는 그리 내게 매달려놓곤, 자라서는 이토록 매정하다니."


"제 몸을 삼등분 내버릴 뻔한 분께서 말씀이 많으십니다."


"후우, 정말. 네가 세운 계획이 너무나 빈약한 탓 아니었니."


그녀가 내 하렘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했던 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 일이었다.


[허접이라 남만의 여자에게는 이기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당신...♥] 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편지를 특급으로 남궁세가와 신강으로 보낸 것. 


당연히 칼을 들고 뛰어온 남궁세영과 세아, 그리고 날 죽이고 함께 죽을 생각으로 달려온 텅 빈 눈의 마희영을 마주한 나는 그녀들을 필사적으로 달랬고, 질 나쁜 장난임을 깨달은 그녀들은 안도한 채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내 마음은 심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저가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은 편지 한 통으로 하렘(계획)의 멤버들을 한 자리에 손쉽게 모을 수 있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희영이 나를 제압해 분곤착골로 심문이라도 했다면 바로 정체를 드러냈을 내 어설픈 계획.


그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나눠졌겠지. 아니면 감금당해 공용 변기로 쓰였거나.


어느 쪽이든 이 위태위태하고 아찔한 감정을 유지해 하렘을 완성시키려는 내 의도와는 정 반대의, 이른바 베드엔딩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리라.


"저는 사저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사저께서도 혼약자가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후후, 내 성벽을 잔뜩 비틀어 네가 아니면 몸이 반응도 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주제에."


".....누가 들으면 어릴 적에 몸이라도 겹친 줄 알겠습니다 그려."


나는 텅 비어버린 잔에 차를 다시 채워넣곤 쉴새없이 홀짝거렸다. 


마희영과 남궁세영이 집착, 남궁세아가 음흉이라면 이 여자는 능욕일 것이다. 


주인공의 몸을 조금씩 비틀고, 정신을 모욕하고, 쉴새없이 불안에 떨게 하다가 결국 주인공 스스로가 제 품에 안길 때만 평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


그녀가 그리 강조하는 어릴 적의 경험도 사실 별 일 아니다. 내가 무협 세계의 남자들과는 다르게 성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성욕이 넘쳐나는 걸 깨달은 그녀가 은근슬쩍 내게 접근해 야한 책을 전해줄 뿐의 관계였지.


물론 그마저도 남자에게는 엄격한 이 세계 기준으로는 아웃이었지만.


"후우. 사저. 나는 늘 말하지만, 네가 내게 온다면 그 여자들 모두로부터 지켜줄 자신이 있어."


"그야 그러시겠죠. 하지만 제가 싫단 말입니다."


"내 밑에 깔린 채 앙앙대게 되기 전에 제 발로 들어오는 편이 좋을텐데 말이지."


"백날 눕히려 해보시죠. 제가 밑에 깔려 앙앙대나 봅시다."


"......흐훗♥"


그녀는 열기를 감추지 못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본심을 드러낸 음흉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나를 슥 한 번 훑어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탈칵-


나는 그녀가 방을 나서자마자 잔을 내려놓곤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대로 줄타기를 실패하는 날에는 그대로 줄에서 떨어져 이리저리 나뉘어져 중원 곳곳을 떠돌게 되거나, 아니면 중원 어딘가의 비동(秘洞)에 팔다리가 잘린 채 묶여 24시간 365일 착정당하며 살아가겠지.


그렇지만 남녀역전 세계의 무협하렘. 이걸 어떻게 참냐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에 털썩 몸을 맡겼다.


몰라,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해결하겠지.


*


여기서부터 써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