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루나라이트


클로에 스텔라 


(3)편:https://arca.live/b/yandere/69860709?category=%EC%86%8C%EC%84%A4&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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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다음날,

나는 비몽사몽한 채로 잠에서 깬 뒤 공방으로 출근할 준비를 마쳤다.


"하암~ 피곤해 죽겠네."


어제는 밤늦게까지 정보를 모으느라 쪽잠밖에 자지 못했다.

그래도 밤새 머리를 굴린 결과 그녀가 어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약혼을 유지한 이유를 3가지 정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는 그녀가 오래 전 용사님의 약속을 지킬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고려해 볼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넘어 가고. 


두 번째로 생각해볼 가능성은 어제 알아낸 꽤나 흥미로운 정보에서 기인한다.

나와 그녀가 약혼하기 며칠 전 루나라이트가의 현 가주인 자크 루나라이트가 실종됐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라벤시아 가문과 주고받던 루나라이트 양의 혼담이 붕 뜨게 되었다고 .


만약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나라이트가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딱 명분도 적당하고 작위도 낮은 나를 약혼자로 세워뒀다면 어떨까.

적당한 시간벌이가 될 뿐더러 실제로 결혼하더라도 부리기 쉬운 꼭두각시 남편이니 상관없겠지.


하지만 이 가설의 문제점은 그녀가 나에게 보였던 태도를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권력을 위해 사랑까지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세 번째 가능성이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 번째보다 더 말도 안 된다고 보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이다.


"그녀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말하고나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리가 없잖아 바보야.

어찌 되었든 내가 그녀의 심장을 찢어놓은 건 사실이니까.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라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결론난 게 없잖아?

나는 어제 밤새 뭘 한거지?

...

정신 차리자 루크.

너가 포기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잠시 몰려든 회의감을 쫓아내기 위해 양 손으로 뺨을 치면서 나는 기합을 다졌다.


"얼굴에 뭐라도 붙었어?"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놀라 문가를 보니 스텔라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야."


"너한테 꼭 알려줘야 할 게 있어."


"알려줄 것이라니?"


어제 그녀가 무슨 말을 듣고 돌아간 걸 생각하니 무슨 말을 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나는 짐짓 모른척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앨리스 루나라이트. 그 여자는 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거짓말?"


"너희가 서로 사랑했다는 거. 그녀는 너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이용하고 있어."  


여기서 무슨 반응을 보여줘야 자연스러울까

잠깐의 고민을 마친 뒤 나는 약간 놀란 척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서로 사랑한다고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는데 역시나였네."


"흐음~  약혼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바로 내 말을 믿어 주는 거야?"


스텔라는 담담한 내 반응이 의외였다는 듯이 의아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기억은 없지만 너는 나의 소중하고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된?"


뭔가 히죽히죽 웃고 있으니 갑자기 말하기 되게 창피해지는데.


"친구잖아?"


"친구..?" 


친구라는 말에 웃음기가 돌던 그녀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진다.


"그래 친구. 절친이라는 말이 어울리려나."


"친구.. 절친.. 그렇긴 하지.. 

아 참 그러고 보니."


내가 한 말을 되뇌이던 그녀는 주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내일 백사자의 날인건 알지? 매년 그랫듯 파티에는 나랑 같이 가도 상관없다고?" 


백사자의 날.

용사님의 승전을 축하하며 그의 이명을 따서 만든 기념일.

성대한 축제가 열려 거리에는 백사자 가면을 쓴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왕궁에서는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참가하는 파티를 개최한다.

매년 둘 다 같이 갈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에 둘이서 함께 파티에 참가했지만 올해는 다르다.


"아. 이번에는 같이 못 갈거 같아. 미안."


"역시 그럴 줄 알.. 

이번에는 안된다고? 왜?"


"사실 어제 루나라이트 양이 같이 가자고 해서."


내 말을 듣고 난 뒤 그녀는 아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제 한 번도 백사자의 파티에서 본 적 없었던 앨리스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상당히 놀랐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약혼녀가 같이 파티에 가자고 하는데 다른 여자랑 같이 간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나는 그녀의 제안을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응 선약이 있다니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먼저 선약이 있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나도 참 눈치가 없다니까. 

하하...

그 썩을 여자가.."


"응? 뭐라고?"


스텔라의 마지막 말은 9시 정각에 맞춰 울린 방 안의 뻐꾸기시계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아냐 아무것도."


"뭐야. 싱겁게.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괜찮은 척 가면을 쓰는 듯한 그녀를 뒤로 한 채 나는 공방으로 향했다.





공방에 들어서자 안경과 작업복을 입고 일에 한창 집중 중이신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셨는지 손만을 바삐 움직이고 계셨다.

평소에는 경박하시지만 일 할 때의 그 진지하신 모습에 어머니가 반했다고 하셨지 아마.


"일은 잘 되가요?"


넌지시 말을 건네자 아버지는 그제서야 손에 든 것을 놓고 나를 바라보셨다.


"내일 불꽃놀이를 장식할 폭죽을 만들고 있었단다.

마정석 가루와 기타 화합물들의 정확한 배합이 중요하다 보니 꼭 두세 번씩 다시 확인하게 되서 시간이 좀 걸리지.

천문학적인 금액이 단 몇 분만에 허공에 사라지니 나는 항상 이맘때마다 돈의 덧없음을 느낀단다."


"오늘따라 상당히 센치하시네요."


"너도 나이를 먹어 보면 알거다. 아 참."


무언가 생각나신 듯이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셨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서 솔라리스님의 편지가 왔더라. 자 여기." 


나는 아버지께 건네받은 빛나는 태양 인장이 박힌 편지를 받아 꺼내 읽었다.


"그대의 상태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 

북부에서의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들리겠다.라니 

그 분답게 짧고 간결하네요."


"그녀의 장비는 너가 직접 만든 거니까 기억을 잃은 너가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걱정이 되시나 보군. 

그나저나 언제 오시려나.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난 항상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렇게 가슴이 대단한 미녀는 꽤 찾아보기 힘들다고 ."


아버지 그게 아들한테 할 말입니까.


"그렇게 한심하게 쳐다보지 말아라. 그래도 나는 니 애비니까. 

그리고 가슴은 남자의 로망이란다. 부끄러운 게 아니야!

나는 옛날에 거유 여자랑 결혼하는 게 꿈이었던 적도.."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란 얼굴로 하던 토하던 열변을 멈추는 아버지.

어머니라도 왔나 싶어 뒤돌아보니 귀신의 정체는 전혀 생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아가씨, 여기에는 어쩐 일로?"


"루크를 만나러 왔는데 여기 있다고 들어서요. 혹시 방해한 걸까요?" 


"아뇨 아뇨 별일 없습니다. 빨리 데려가세요."


거의 쫓아내다시피 나와 앨리스를 내보내던 아버지는 방문을 쾅하고 닫았다. 


"역시 루크도 큰 게 좋은 건가."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신의 특정 부위를 훔쳐 보는 그녀를 못 본척하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그녀를 따라 야외 정원으로 향하자 나는 그녀를 가볍게 책망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셨으면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요."


"그냥 평소의 루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몰래 와봤어.

내가 봐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걸까?"


"아뇨."


"농담이야."


농담이라면서 얼굴 표정 하나도 안 변하는 게 좀 무서운데요.


"그래서 무슨 일로..?"


"생각해 보니 내일 입고 갈 옷이 없어서 말이지. 그래서 너가 시내에서 옷을 좀 골라줬으면 해서."


이렇게 불쑥 찾아온 이유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나.

마땅히 댈 핑계도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권유를 수락했다.


좋았어라고 작게 말하며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과연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그녀와 동일인물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그 의문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마차는 밖에 대기시켜놨으니 어서.."


"에이든? 공방에 없길래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하던 말을 멈추는 그녀들.

정원에는 한낮인데도 살을 에워싸는 듯한 냉기가 주위를 감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이대로라면 이 공기에 동사당할거 같아 나는 어느 정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몰랐는데 둘이 구면이었구나. 서로 소개는 필요 없을거 같네.

나는 루나라이트님과 잠깐 볼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가려고 하는 중이였어."


"혼약자 간의 데이트에 끼어들 정도로 눈치 없진 않겠죠?"


앨리스의 면박에 클로에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데이트라니 생각보다 농담도 잘 하시네요.

마침 저도 루크랑 볼일이 있는데 동행해도 될까요?"


서로 싫어하는 이유는 짐작하겠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건 아닌가.

아무튼 클로에한테는 미안하지만 여기서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야 한다.

생각해 봐라. 

루나라이트가의 영애와 별의 마녀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린다. 

입방정 떨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눈 돌아갈 상황이지.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게 어때?

나는 루나라이트님이랑 둘이서 그..음.. 데이트를 즐기고 싶거든."


",,,"

"..."


두 명 모두 침묵을 지켰지만 그 얼굴에 담긴 희비 차는 명확한 듯 하였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클로에한테 뭐라도 말을 하려고했지만 빨리 가자는 앨리스의 재촉에 못 이겨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원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돌아 봤을 때 그녀는 마치 원래 거기 있던 석상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얀데레 소설에서 좋아하는 건 점점 뒤틀려가는 사랑입니다.

아이 때의 순수한 사랑이 오해로 인한 후회와 미련으로 범벅칠 되어 

성인이 됐을 때는 그 마음이 끈적거리고 질척하게 바뀐다던가

우정이라는 안식처 아래 조용히 키워가던 풋풋한 사랑이 

갑작스러운 연적의 존재로 검고 음습하게 물들어가는 과정이라던가   

정말 최고지 않나요.

단지 그걸 표현할 필력과 시간이 모자라 아쉬울 뿐이다.